75화
“마구간이 생각보다 멀어서 생긴 일 같습니다. 줘도 먹지를 않고…….”
“그보다는 여물을 줘서 그런 듯한데요.”
“네?”
“이 아이들은 육류 위주로 먹어요.”
“아이고, 저런. 제가 무지해서.”
“아닙니다.”
통 라드들이 먹지를 않는다고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의 별관까지 찾아왔던 마구간지기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유, 제가 더 알아볼 것을.”
“모르실 수도 있죠. 저는 가 보겠습니다.”
“네, 네. 푹 쉬십쇼.”
마구간지기는 몸이라도 닦고 가라며 수건을 내밀었지만 나디사는 웃으며 거절했다.
빨리 뛰어가는 게 우산을 쓰고 가는 것보다 나았다. 비를 맞는 느낌이 딱히 나쁘지도 않고.
비가 내리는 중에 비행은 심심치 않게 해 봤다. 우산을 쓰는 것보다 이게 훨씬 편했다.
나디사는 마구간을 나와 별관으로 이어지는 숲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당연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히아신을 만났다.
혼자 가겠다는데도 굳이 따라온 히아신은 손으로 우산을 만들어서 그녀의 머리에 씌워 주고 있었다.
“하지 말라니까.”
그러자 그가 걸어와 그녀의 앞으로 왔다.
손으로 만든 우산 아래서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살며시 피했다. 하지만 히아신은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웃을 뿐이었다.
“손으로 가리기 아까운 미모이긴 하다. 나의 나디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거야, 그래서.”
또 그 말. 나디사는 어느 순간부터 주야장천 듣고 있는 그 말이 더는 낯설지 않게 됐다. 익숙해지기 전에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데, 그 말이 주는 달콤한 울림은 너무도 유혹적이라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
그는 나디사의 손목을 잡고 비 오는 숲길을 걸었다.
뿌리칠까 싶어서 손목을 가벼이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디사는 그가 잡은 부위만 유별나게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이 비처럼 여기저기 스며들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특히 그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디사에게 큰 모험이었다.
이제야 제 삶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중인데 사랑 같은 큰 것을 느껴도 되는 걸까. 그것도 히아신과.
“히아신.”
“왜 불러요.”
“나하고 데이트하자고 그랬지?”
“그랬지.”
초록색의 이파리가 싱그럽게 있던 숲길을 빠져나와 아름다운 별관 정원으로 들어왔다.
나디사는 그와 보폭을 맞추어 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의 데이트는 내게 너무 무거워.”
“어떤 부분에서? 나 무게 그렇게 많이 안 나가는데.”
이 와중에도 농담이라니. 하지만 임무 중에 들어가면 더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
요즘처럼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임무보다 그를 더 많이 신경 쓸 것 같았다.
“나는 너의 과거도, 지금 마음도, 나한테 왜 이러는지도 알지 못해.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네 데이트 신청이 너무도 무거워.”
그 말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없던 히아신은 천천히 나디사의 손목을 놓았다.
미끄러져 내려가는 손이 그의 단단한 허벅지 옆에 놓였다.
히아신은 이해를 바라는 그녀의 말을 찬찬히 곱씹는 표정이었다.
“너의 전부를 알아야겠다. 그래야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거구나.”
“……보통은 그렇지.”
“나의 전부를 알지 못하면, 나를 평생토록 이해할 수 없다는 거고.”
히아신의 콧잔등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아름다운 입술로 톡 떨어졌다.
“전부를 알아 봤자 나랑 얘기도 안 하려고 할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
“나도 내 전부를 기억 못 해. 나는 과거는 거의 잊었거든.”
히아신은 고개를 숙여 멍하니 있는 나디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잠시나마 이 비와 어울리게 그가 진지하다 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제 목적을 되찾았다.
“딱 하나 방법이 있어. 데이트하면 기억이 날 것 같아.”
“히아신, 또 장난이었어?”
그러나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나디사의 어깨를 안고서 비를 피해 달아날 뿐이었다.
히아신의 말이 맞았다. 전부를 알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도 전부를 그에게 내보이지 않는데. 그건 실은 핑계에 불과했다는 걸 나디사는 알고 있었다.
* * *
아이의 생일 파티까지는 열흘이 남았는데, 그중 사흘을 장마에 갇혔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아이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고.
또 라드군이 되고 싶다던 아이는 정작 라드가 집 마당에 있음에도 열이 올라 외출 금지를 당했다.
그런 아이에게 생일이 의미가 있겠냐만. 거금을 주고 라드군을 부른 이상, 그들도 성과는 내야 했다.
“그러면 우리가 빙글빙글 도는 건 어때? 하늘을.”
나흘째. 날이 개고 드디어 해가 떠오르는 날. 남은 엿새 동안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으나 나오는 수준이 다 고만고만했다.
사흘 동안의 휴식이 뇌를 게으르게 만든 걸까. 정원에서 식사를 대접받고 나서 이어진 회의 시간은 나른하기 짝이 없었다.
장마 동안 축 처져 있던 몸은 나른한 햇볕 아래서 맥을 못 추었다.
나디사는 사흘간의 장마 동안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따듯한 햇볕 아래 나와 있으니 몸이 노곤노곤하면서 잠이 쏟아졌다. 회의를 위해 간간이 던지는 말들이 자장가처럼 그녀를 재웠다.
나디사는 턱을 괴고 있다가, 누군가의 손길에 눈을 떴다.
빠르게 사라지는 손은 옆자리의 것이었다. 아트리스였다. 나디사는 선잠에서 깨어나 눈가를 비볐다.
“열이 있는데.”
“아, 잠깐 감기가 오나 봐.”
“잠깐 오는 감기도 있나? 들어가 쉬어.”
“아니, 괜찮아.”
그런데 그때 히아신이 옆, 옆자리에 있는 마벤의 손등을 콕콕 찔렀다. 화한 차를 마시고 있던 마벤은 그를 째려보았다.
“뭐야.”
“바람피우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마벤.”
순식간에 테이블 위는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싸한 공기가 퍼졌다. 미끼에 걸려든 아트리스가 차갑게 읊조렸다.
“히아신 아스. 할 말, 못 할 말 가려서 해.”
“어떤 게 할 말이고, 어떤 게 못 할 말인데?”
“방금 네가 한 게 못 할 말이지. 그 정도 구분도 안 되면 이 회의에 도움 될 것 없으니 나가든가.”
테이블 위를 오가는 날 선 말은 밤샐 듯 이어졌다. 그리사는 중재하며 목소리를 차분히 깔았다.
“그러면 일단 밖으로 나가서 이 축하 파티에 도움이 되는 게 있는지 살펴보죠. 여덟 살이 되는 어린아이 취향을 우리는 모르니까. 활동비도 넉넉하고요.”
“마, 맞아.”
“이랬는데도 계속 싸울 거면, 난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아트리스는 그리사의 말을 듣고 조금 진정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내 그리사는 빠르게 일어나 나디사를 가리켰다.
“조를 나눠 조사하고 오죠. 거기 두 사람은 분위기만 망치니까 알아서 하고. 나디사, 마벤, 시네라는 저랑 가요.”
그리사는 의자에 걸린 재킷을 들고서 야외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푸르른 정원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그리사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열이 받아 보였다.
마벤은 그리사를 달래 보겠다며 나디사의 손을 잡고서 나갔다.
시네라만이 테이블을 지켰다. 감정을 추스른 아트리스는 힘 빠진 목소리로 시네라에게 전했다.
“시네라, 너도 가 봐.”
“그, 아니, 난 너희랑 갈게.”
아트리스는 졸려 죽겠다는 표정인 히아신과 시네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시네라는 수줍게 웃으며 그리사와 여자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너희끼리 두면, 더, 싸울 것 같아서.”
시네라의 말에 히아신과 아트리스는 동시에 딴 곳을 바라봤다.
시네라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