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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4화 (74/210)

74화

이렇게 제대로 우린 찻물과 간식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여름 숲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백색 테라스와 이따금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는 꿈꾸던 여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정략혼을 하던 남편이 병으로 명을 달리하고, 처녀 시절부터 사랑을 키웠던 남자와 혼인을 한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어떠한 슬픔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아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찻물, 맛있는 쿠키, 샌드위치. 한 상 가득 차려 놓았지만 모세스 가주의 말이 시작되고부터는 모두 하나둘씩 그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빈손의 발톱 부대를 보며 모세스 가주는 그러지 마시라 권했지만 그 누구도 다시 쿠키를 먹으려 들지 않았다.

물론 히아신이 눈치 없이 쿠키를 집으려고 했지만 그건 그 옆에 있던 이가 처리했다.

“제 아버지랑 같은 유전병인 것인지. 날 때부터 몸이 약하긴 했지만…….”

마침 테라스 밑을 지나가는 아이가 제 계부와 뛰어다니며 술래잡기 중이었다.

그저 그 나이대처럼 해맑고 밝아 보이는 소년을 계부가 불러 세웠다.

계부는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소년의 코를 풀어 주었다. 누가 보아도 다정한 부자지간이었다.

“남편이 아파서 몸져누울 때부터 저이가 아버지 대신이 되어 줬죠.”

모세스 가주의 감상을 깨고 싶진 않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가 그들의 의뢰였을 줄은 몰랐다.

아트리스는 그녀의 목소리가 잠잠한 차에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만약 도련님 일이라면 저희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일로 부르셨습니까.”

“우리 집에선 도련님이 아니라 라이라고 불러요. 라이의 꿈이 라드군이 되는 거였거든요. 얼마 뒤면 여덟 살이 되구요. 그 생일날, 작은 공연 열어 주셨으면 해서요.”

생일날 공연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모세스 가주가 너무도 미안해하는 게 얼굴에 보여 그들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죽어 가는 마당에 더 무서울 것도 없어 보였다.

“부탁드려요.”

모세스 가주는 대신 식비부터 의류 구입비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하며, 개인적으로도 보상을 하겠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트리스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임무로 온 겁니다. 저희 군에 지불하신 것 외에는 주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럼, 아이 마지막 생일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건요?”

모세스 가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이 메는지 찻물을 들이켜듯 마셨다.

귀족의 지위, 가주의 지위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여인처럼 울 수 있었을 테지만 모세스 사람인 그녀는 타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열흘 뒤가 생일이에요. 아이도, 저도 이 생일에 기대가 커요.”

그리고 한 가지. 아이는 저가 얼마 뒤면 죽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마지막 임무. 아름다운 숲속 한 가운데에 사는 요정과 같은 사람들. 그들이 건네는 마지막 임무는 장마와 함께 찾아왔다.

* * *

여름의 절정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이 장마는 지겹도록 끝이 나지 않았다.

열흘 뒤가 아이의 마지막 생일이라는 소식이 하늘에 전해졌나 보다. 비가 통곡하는 것 같았다.

마벤은 혼자서 쓰기엔 커다란 손님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손님방을 보고 혼자서 쓰기에 크다고 생각했을까.

바로 옆방인 나디사가 벌써 보고 싶었다. 아예 같이 자자고 하는 건 어떨까.

슬픈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녀는 이 장마를 혼자서 이겨 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창가에 손을 올려 두고 있던 마벤은 조금 더 슬퍼졌다. 일 층 현관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선 한 남자의 뒷모습은 꿈에도, 현실에도, 한 번에 그녀를 슬프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비를 감상하듯 서 있는 그를 보면서 마벤은 망설였다.

이 임무를 마지막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만큼의 장기 임무는 앞으로 없어서일 것이다.

성탑에서 훈련이나 잠시 하다가, 아마 가을이 시작되면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까.

떼쓰기, 윽박지르기. 지금까지 그것밖에 해 보지 않았었다. 마벤은 주먹을 쥐었다. 이번 열흘이 자신에게도 마지막일지 모른다.

마벤은 달려 나가 저택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일 층 현관문을 열고 나간 마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아트리스를 보며 걸어 나갔다.

“아트…….”

그러나 아트리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시선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우산 없이 뛰어가고 있는 두 사람. 멀리서 보아도 나디사와 히아신이었다. 정원을 달려가며 웃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정다웠다.

손님방이 있는 별관에는 발톱 부대만이 묵고 있었다.

마벤은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을 쫓는 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침을 삼켰다.

“아트리스.”

차분해진 마벤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겨우 돌아온 그의 시선은 가까스로 그녀를 인식했다.

“마벤.”

이렇게 둘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마벤은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을 가리키며 애써 발랄하게 말했다.

“그거 나랑 같이 쓰려고 들고 있는 거지?”

아트리스는 제 손에 들린 우산을 보고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피식 웃었다.

“방금 라드에 관해 물을 게 있으니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하길래 나디사를 보냈어. 우린 들어가자.”

그렇게 된 거였군. 우산을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빗줄기를 함께 맞아 주는 남자를 봐 버렸구나.

마벤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트리스의 팔목을 잡았다.

“잠시 상담할 게 있는데. 나랑 저기까지만 걷다 오자.”

뭐 하냐는 듯이 눈으로 우산을 가리키자 아트리스는 망설이다가 우산을 폈다.

그가 편 우산으로 쏙 들어온 마벤은 실소를 흘렸다.

부정했던 사실이 이제는 확실하게 보인다. 그래도 혼자 머릿속으로 망상하던 때보다는 이리 눈으로 보이니 인정하기가 쉬웠다.

아트리스는 친절히 그녀 쪽으로 우산을 씌워 주며 제 어깨를 젖도록 내버려 뒀다.

좋아하는 여자도 아니면서. 그런 과한 배려는 여자에게 좋지 않았다.

마벤은 그래도 그의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순간이라도 그를 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단정한 그의 머리나 목 끝까지 채운 단추 같은 것들은, 봐도 봐도 좋으니 말이다.

“고민이라는 게 뭔지 말해.”

“나 라드군을 그만둘까 봐.”

의외의 말이었는지 허공을 떠다니던 그의 시선이 마벤에게 닿았다.

걸음까지 멈추어 선 아트리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애초에 여기도 뒷돈 주고 들어왔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 없이 새로운 부대에 들어가서 적응할 자신 없어.”

“마벤 로사.”

“나는 너처럼 이 일에 진지하지도 않고, 나디사나 그리사처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네라처럼 지도 보는 능력도 없어. 있으면 돈인데 그게 라드군에 무슨 소용이겠어.”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날, 마지막 임무가 된다는 말을 들은 날에 한 생각이었다.

마벤은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그의 금색 눈동자가 따듯하지 않아도 좋았다.

본래의 사툰 종족의 것이 아닌, 혼혈의 특징을 담은 그의 금안은 다른 사툰 종족보다 선명한 색감이었다.

“마벤.”

“왜.”

“너도 재능 있어.”

마벤은 웃는 얼굴을 더는 유지할 수 없었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빗소리는 이렇게나 뚜렷한데도 그의 목소리는 다른 결로 그녀의 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약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본 너는 이 일에 누구보다 진심이었어. 다른 이들이 기운 없을 때도 홀로 씩씩한 것도 네 장점이고.”

“……그래?”

“그래도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나약한 이유로 도망가진 마. 그럼 두 번 다시 널 보지 않을 테니까.”

다정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말이지만, 마벤은 그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그녀의 가슴에 쌓여 있던 고민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우산이나 똑바로 들어. 내 어깨 젖는 거 안 보여?”

“모르나 본데. 내 어깨가 더 젖었어.”

“알고 있어.”

아트리스는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마벤은 그의 팔을 잡고서 앞으로 이끌었다.

“저기까지 보고 가자.”

“그만 들어가.”

“저기라고, 저기! 바로 코앞!”

결국 아트리스의 고집대로 다시 들어갔지만, 마벤은 오는 내내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짝사랑은 오래가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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