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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3화 (73/210)

73화

폭풍 전 고요처럼 바람 잘 날 없던 발톱 부대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통솔권을 가진 왕세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서, 그가 매번 열던 파티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둘째 왕자와 셋째 공주의 처소로 슬슬 눈을 돌렸다.

왕실의 쌍둥이 남매는 유례없는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첫 번째 신관이 쌍둥이 왕자 쪽에 붙었기에 그쪽으로 힘이 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신관이 일부러 왕세자를 치료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돌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소문은 소문.

왕도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왕세자까지 허약해진 마당에 신전의 막강한 권력을 함부로 무시할 이는 없을 거다.

정식 훈련은 아마도 통솔권 자가 새로 정해지든, 기존의 통솔권을 갖고 있는 왕세자가 건강해지든. 둘 중 하나를 해야지 다시 열릴 듯싶었다.

나디사는 저를 포장한 인형처럼 끌고 다니던 왕세자의 병이 슬픈 것도 싫을 것도 없지만, 그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것만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실상 마지막 임무가 떨어졌다.

“가을부터 부대를 재편성한다고?”

“겨울에 신입들 들어오기 전에 부대를 정리하고 싶은 모양이죠.”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 몰랐는데…….”

그리사의 말에도 마벤은 쉬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식탁을 두들겼다.

그간 정이 들 대로 든 마벤의 말은 나디사에게도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같은 부대에 들어갈지도 미지수고, 지금이야 직급이 같지만, 상위 부대라도 들어간다면 남처럼 더욱 멀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나디사 때문일 거야. 심장으로 갈 가능성이 우리 중 가장 크니까.”

아트리스는 수장 회의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한 눈치였다.

요즘 따로 바깥에서 볼일을 많이 보고 들어오는 터라 아트리스를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아트리스는 피곤한 기색을 지우고 나디사에게 웃어 보였다.

“미리 축하할게, 나디사.”

나디사는 어딘가 제 자랑처럼 느껴져 대답을 어물쩍 넘겼다.

“왜 나디사만 축하죠? 우리는 수장의 안중에도 없나 봐요.”

“비꼬지 마, 그리사. 너희가 안중에 없었으면 사비를 들여 이것을 사 왔겠어?”

아트리스는 돌아오는 길에 작은 빵집에 들러 조각 케이크를 사 왔다. 보기보다 투박한 맛이었지만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떨기 좋았다.

나디사는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슬픔에 잠기는 중이었다. 이별이 쉬운 줄 알았다.

하지만 가을부터 흩어질 수도 있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힘이 빠졌다.

이들이 꽤나 소중해졌구나.

하지만 같은 라드군이니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런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일이 있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소식을 물고 온 아트리스는 식탁을 짚고 서서 제 동료들을 하나, 하나 바라봤다.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임무가 생겼어. 장기 임무가 될지도 모르는. 임무 내용은…….”

“잠깐.”

듣고 있던 마벤은 갑자기 코를 마구 손으로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마지막, 하는데 술 한 잔도 안 해서 되겠어? 올라가서 술 좀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임무 얘기는 내일 해도 되잖아.”

마벤의 말에 아트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찌푸렸지만, 그리사가 웬일로 그녀에게 동의 표를 던졌다.

“좋아요. 마벤은 좋은 술 많이 갖고 있으니까 이참에 나눠 줘요.”

“간만에 마음에 드는데? 그리사?”

마벤은 호탕하게 웃으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나디사는 그녀의 코끝이 빨간 것을 저만 보았나 싶었다.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하고도 마벤은 아트리스만 보며 살았다.

고민하던 나디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벤을 도와주고 올게.”

“무거운 것이면 같이 갈까?”

“아니, 괜찮아.”

아트리스의 도움을 거절하고 식당 밖으로 나온 나디사는 침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방문 앞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그녀의 방문을 거절하고 있었다.

나디사는 잡고 있던 문고리를 서서히 놓쳤다. 마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친구의 시답지 않은 위로가 아니라.

식당으로 가려던 나디사는 계단에 있는 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망설였다.

“나디사. 나랑 언제 데이트해 줄 거야?”

“……조만간.”

“나 조만간이라는 단어가 싫어지려고 해.”

그렇지만 결국 제 마음대로 할 거면서. 나디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말과 다른 기대감을 품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히아신은 계단을 내려온 나디사의 팔을 잡았다. 툭, 잡히자마자 습관처럼 둘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허그, 제 목뒤를 쓰다듬는 손. 친구의 슬픔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 무능함을 탓하다가도 입맞춤을 반가워하는 이 간사한 마음 같으니.

히아신은 틈만 나면 입술을 가져갔다. 그 행위가 조금이라도 싫었더라면 자신이 지금처럼 히아신의 목을 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왕 하는 것 조금 더 편하게, 어차피 히아신은 제 마음대로 할 테니까 포기하자. 하지만 과연 그 마음뿐일까.

여유로운 그의 혀 놀림에 정신이 산만해질 즈음. 쾅, 문 닫히는 소리에 나디사는 눈을 떴다.

히아신의 목적을 달성한 미소와 닫힌 아래층 식당 문소리. 히아신은 나디사의 귓속에 달콤한 말을 흘려 넣었다.

“바람 소리야, 바람.”

뻔한 거짓말. 하지만 나디사가 그의 목에 손을 감고, 그 부드러운 키스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며, 마지막 임무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수비타 왕국은 여름과 겨울이 미친 듯이 길었다.

여름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에 염증을 느낄 만도 하지만.

이 아름다운 숲은 여름의 혜택을 받는 듯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라드를 타고 하늘을 날며 바라본 동쪽의 끝.

이 숲은 왕족의 팔촌뻘 친척으로 알려진 모세스 가문의 소유였다.

모세스 가문의 의뢰는 단순하면서, 많은 인원을 필요하지는 않다고 했다.

다만 상급 부대는 참여하기엔 소소하고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가장 평균 나이가 어리고 비교적 바쁘지 않은 발톱 부대가 파견된 것이었다.

“노인에 이어 아기 돌보기라니.”

하지만 불평을 내뱉은 마벤의 눈은 기쁨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모세스 가문의 성은 가히 녹지의 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다.

라드로 넓은 숲길을 날아서 성 앞에 착륙한 이들은 이미 저희들이 날아올 거란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의뢰인을 만났다.

대여섯 살 난 아들과 모세스 가문의 가주, 그리고 그가 얼마 전 결혼한 새 남편이 걸어 나오며 수장인 아트리스와 악수를 나눴다.

“어서 오세요.”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여자였다. 그녀는 이 집안을 물려받고 데릴사위를 들여 혼인했으나 재작년 남편이 죽고 나서 오랜 첫사랑과 재혼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어린 모세스 가문의 도련님에게는 계부가 생긴 것이겠다.

“아빠. 저거, 라드.”

세 사람의 사이는 처음부터 가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란해 보였다.

“들어가서 얘기하실까요.”

“엄마.”

어린 도련님은 제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뒤뜰 마구간의 라드를 보러 가자고 칭얼거렸다.

“라이. 아버지하고 저쪽으로 가서 잠깐 기다릴까? 라드도 조금 있다 보고.”

소년은 계부의 말을 듣자마자 그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떠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모세스 가주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자, 그럼.”

다시 발톱 부대를 맞이하는 그녀는 완벽한 모세스 가문의 가주로 돌아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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