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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2화 (72/210)

72화

란 피습 사건은 한 괴한의 침입으로 흐지부지 넘어가는 듯했다.

무엇보다 신전 쪽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왕세자 일로 정신이 없는지라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아트리스가 다녀왔으나 라드군 내부에서도 이 일을 크게 문제 삼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걱정 말라는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사흘. 내심 본인이 해결하려고 나섰다가 일이 커진 거 아닌가 싶었던 나디사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요즘 같은 시기에는 몸이 더 바빴으면 했다.

“도울 일 없어?”

“오늘은 내가 당번인데 왜 당신이 도와요.”

“그러게.”

그리고 나디사는 불안증이 생겼다. 식사 자리나 다른 회의에 참석할 일만 생기면 몸을 가만두지 못하겠다.

그게 특정한 사람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어서 이렇게 밖으로 나도는 중이었다.

그래서 라드 먹이 당번인 그리사를 쫓아 나와 이렇게 도울 일이 없냐고 떼를 쓰는 중이었다.

“훈련 없어서 심심하면 청소라도 하던가요.”

“식당 청소, 샤워장 청소, 침실 청소, 계단 청소까지 했는데 어디 더 청소할 곳 없을까.”

그녀의 말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던 그리사는 갈수록 입이 벌어졌다. 이내 고기를 들고 옮기던 그리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디 청소부로 취직했어요?”

“할 게 없어서.”

“할 게 없으면…….”

나디사는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덫에 말려들고 말았다. 이 층 성탑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히아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히아신?”

“아, 나, 저기. 마구간에 볼일이 생겨서.”

녹색 웃음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여름과 잘 어울리는 싱그러운 웃음을 보자마자 나디사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탁 켜졌다.

‘그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나디사.’

정신없이 그 말을 피해서 도망치기 위해 달리던 나디사는 성탑 쪽으로 접근하는 신관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역시 자신이, 아니, 히아신이 관여된 것이 걸린 것인가. 그러나 그는 공손하게 웃으며 성탑 쪽으로 걸어왔다.

마침 아트리스는 아침부터 부재중이라서 지금 그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나디사 경.”

“아, 네.”

“록 님이 부르십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성탑 문이 열렸다.

빨랫감을 널기 위해서 하얀 이불을 들고나온 히아신이 그녀를 발견했다. 말을 걸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얼른 가죠.”

“네? 아, 네.”

나디사아,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디사는 신관의 멱살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하고 성탑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가슴이 뛰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녀로서는, 도망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히아신처럼 이상한 사람에게 빠졌다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녀는 그냥 이 모든 과정에 서투를 뿐이었다.

* * *

수비교의 신관들은 두각을 보이면서부터 신전으로 끌려와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버렸다. 존경하는 이나 아버지 같은 이의 이름을 물려받고 평생 신전에서, 수비교의 이름 아래서 살았다.

그중, 첫 번째 신관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을 만큼의 재능이 있었던 그가 한 번 수비교를 버리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록, 이라는 이름은 별로인걸.’

‘그렇다면……. 당신이 부르고 싶은 데로 불러 주세요, 나는 상관없어요.’

‘당신의 부모가 지어 줬다는 이름. 니아도스. 그건 어때.’

‘부모님은 니아라고 해 주셨죠.’

‘사랑스러운 이름이야. 니아.’

첫 번째 신관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그 자리는 란에게 물려 주기로 했다.

이미 한 번 마음속으로 수비교를 버린 자신은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평생 순결하겠다고,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그 여자를, 자신에게 말도 없이 떠난 여자를 마음에 품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말도 못 하게 차가워졌었던 그 여자를.

“록 님.”

신력으로 과거의 기억을 엿보고 있었던 록은 천천히 머리에서 손을 뗐다.

오수를 즐긴 듯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록은 저보다 더 꼴이 말이 아닌 하급 신관을 보았다.

“밖에 바람이 세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라드를 타고 와서.”

과거를 엿보기 전, 록은 본인이 내린 지시를 떠올리곤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과거에 심취하여 초대한 손님에 대한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이다.

록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눌러 정리하며 밖으로 나갔다.

처소 마당에 있는 라드 한 마리가 신이 나서 빨간 생고기를 뜯고 있었다. 그가 오전에 준비해 두라고 한 식탁에 나디사가 앉아 있었다.

주인이 오기 전까지 멍하니 식탁만 바라보는 그 모습에 미안함이 솟구쳤다.

“미안, 미안해서 이거를.”

“아.”

나디사는 그가 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 가벼운 목인사를 나누었다.

황급히 달려가 자리에 앉은 록은 연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초대해 놓고 이런 무례가, 진심으로 미안하여 이걸 어쩌지.”

“괜찮습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지. 혹시, 이 조림은 먹어 봤나?”

“아니요.”

록은 처음 준비해 본 식사 자리에서 꽤 서투른 움직임을 보였다.

항상 긴장하거나 잘 보여야 하는 상대 앞에서 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징크스가 있었다.

록은 나디사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준 뒤 찬물로 입가심을 했다.

나디사는 얌전히 그가 떠 준 음식 중에서 고기 대신 채소부터 골라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티사 생각이 났다.

“아, 오늘 부른 이유는…….”

그러자 나디사의 포크 질이 멈추었다. 록은 계속 먹으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란의 일에 대해 묻어 주어서 고맙다고.”

깨어난 란은 며칠 전부터 계속 그에게 보자고 이야기를 했으나 그는 그 요청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의 대자에게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대자는 이름 모를 환영에 당했고, 그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단지 나디사와 대련했던 것만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불편하겠지만 가볍게 넘겨 듣게. 그날 혹시 범인을 봤는지 궁금해서.”

“……아뇨.”

그러나 록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넘기지 않았다. 따져 묻기에는 그녀가 숨기는 사정이 있겠지.

“나중에 들은 보고에 의하면 날개를 두 개나 펴서 몸이 안 좋았고, 정신을 잃고 눈을 떠 보니 침실이었다던데. 라드가 주인을 옮겨 준 것 같다고.”

“네.”

대답을 들으며 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에 갑자기 당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사람을 죽일 뻔한 상황에 처해 불러낸 트라우마 같은 것인지. 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첫 번째 신관은 왕세자의 병환을 돌보느라 불려 가 있었고. 이 일은 록이 대강 마무리 짓고 있었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록은 묘하게 시무룩해진 나디사의 잔에 물을 따라 주고서,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디사가 찰랑거리는 물잔을 보다가 조심히 물었다.

“란 님은……. 아들 같은 분입니까?”

그녀가 궁금해하지 않을 주제라고 생각했기에, 그에 대한 대응이 조금 늦었다.

“그렇지. 어린 시절부터 내가 키우고 가르쳤으니.”

“그러셨군요.”

“신관은 자식을 낳을 수 없어서, 관계가 깊어지면 아버지, 아들이라고 하며 지내지.”

“그래서 더 제게 화가 나셨나 봅니다. 아버지 같은 이를 뺏겼다고 생각해서.”

나디사의 말에 록은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을 움찔거렸다.

평범한 말이었다. 아버지, 라는 단어.

란이 늘 불러 주었기에 아무렇지 않았던 단어가 그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저 때문에 혼을 내시면, 더 화내실 겁니다. 단지 저는 제 부대에 아무런 피해만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금처럼.”

“……나디사 경의 부모님은 좋으신 분들인 것 같아.”

부모님 이야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디사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떠올리기만 해도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도 알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탈이죠. 저한텐 과분하세요.”

“이리 훌륭한 라드군인데 무얼.”

그러나 록은 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대화가 없어지자 나디사는 무엇도 먹지 않았다.

더 붙잡아 두고 싶으나 이 이상 붙잡을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결국 록은 식사도 채 끝내지 못하고 그녀를 보내야 했다. 제 동료가, 가족이 있는 그녀는 눈이 부셨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들 특유의 광채가 그녀에게 있었다.

예전 그녀처럼.

“나는 참 이기적이었구나.”

“네?”

“……아니다.”

저 빛이 탐이 나서, 내가 가질 수 없는 게 탐이 나서. 붙잡아 둘 수 없는 신분으로 붙잡아 뒀으니 말이다.

그러고도 잘 먹고 잘 사는 그는 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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