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나디사의 바람을 본 란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라드군이 왜 수비타 왕국의 자랑이자 무기인지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무서운 짐승이었다. 적의 다리를 이 땅에 붙여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부는 바람과 사람의 맨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두 쌍의 날개가.
하지만 란은 제게로 날아오고 있는 커다란 라드를 보고도 감흥이 없었다.
적당히 맞고서, 적당히 져 주는 척했더라면 덜 비참했을까.
아니, 누가 보아도 자신보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듯이 당당한 저 여자의 얼굴을 보자 란의 심장은 차갑게 얼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지. 반칙 아니야?”
그러나 제 감정과는 다르게 그는 여유로운 미소로 다가온 나디사에게 말을 걸었다.
바로 옆에 서자 더 강렬한 바람이 그의 눈을 찔렀다. 다급하게 노란빛으로 제 눈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눈조차 뜰 수 없었을 거다.
“그런데 그 날개,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버틸 수 있어?”
“저도.”
바람의 섞여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처소 마당에 웅웅, 울려 퍼졌다.
신의 음성처럼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뇌로 파고들었다.
“훈련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서로 훈련하는 거네? 그렇지?”
이만하면 꺾일 때도 됐는데. 꺾이지 않고 꼿꼿한 그녀가 점점 더 싫어졌다.
신의 가장 귀한 아들은 자신임에도 그녀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간신히 얻은 가족을 빼앗을 거란 두려움, 제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의 관심을 빼앗아 가리라는 두려움.
두려움을 담은 빛은 색이 탁해지고 있었다.
수비교의 신관들이 만들어 내는 빛은 오로지 그 사람의 순수한 마음과 신에 대한 충성심으로 우러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두려움과 증오, 질투로 섞인 감정이 들어간 빛은 이처럼 색이 탁해지고 그 힘이 형편없어진다.
란의 눈은 바빠졌다. 아까처럼 라드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는 말할 것도 없고, 방향을 바꾸는 것 또한 도저히 불가능한 각도에서 춤을 추듯 도망쳤다.
게다가 이 바람.
“뭐야.”
란은 제 손에 부른 빛이 바람에 의해 꺼져 가는 것을 보았다.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라드가 내는 바람의 신묘한 힘이 섞여 있었다. 자신의 빛을 꺼트리는 바람을 보며 란의 두려움은 더 커져 갔다.
이러다가 내가 영영 빛을 불러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창!”
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빛을 이용해 그의 처소 안에 있는 창을 꺼내 왔다. 특수 제작한 창은 날아와 그의 손에 착 붙었다.
이성을 잃었다. 란은 지금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온 힘을 그 창에 실었다.
샛노란 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하는 창은 바람에 맞서듯 모든 바람을 튕겨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튕겨 내는 것조차 막아서기 위해 더 많은 양의 바람이 몰려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디사는 멈추어 섰다. 찰랑, 찰랑,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바람의 이동하는 길이 다 보였다. 풀이 눕고, 다시 일어서고, 눕고, 다시 일어서고. 파도처럼 반복하면서 바람의 이동을 알렸다.
제 창에 부딪히는 바람과 마찰이 일면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그 바람을 이겨 내기 위해 란은 몇 년 동안 쓴 적 없던 힘까지 다 끌어냈다.
그리고 창을 들어 그녀를 향해 날린 순간, 눈앞에 암전이 찾아왔다.
아, 지금 내가 무얼 한 거지.
신력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한다면, 그는 영원히 이 신전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권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신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도 란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온실 속 화초. 곱게 자란 그는 날아간 창을 생각하다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검은 장막 속에 그는 갇혀 있었다.
나디사도, 제 처소도, 달도 없는 곳에 그는 서 있었다. 까만색의 커튼이 쳐진 것처럼 그는 제 손, 발만 볼 수 있었다.
“나디사 마로닌!”
그때 발밑에 축축한 무언가를 밟고서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피가 강을 이루고 있었다.
점점 차오르는 피를 보며 란은 이를 악물고 손에 빛을 불렀다.
“이게 왜…….”
빛이 흐르지 않는 손. 그리고 차가운 피에 담가진 발. 어느새 발목까지 잠긴 피를 보던 란은 눈을 감고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피 냄새와 같이 온 두려움은 한순간 그를 집어삼켰다.
나디사 마로닌의 피인 건가. 아니면, 누군가에.
기도가 될 리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교육이 모두 쓸데없었다.
란은 허벅지까지 찰랑거리기 시작하는 피를 보다가, 눈앞이 어지러워 옆으로 쓰러졌다.
모든 신력을 다 쓴 그가 피에 잠겨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가물가물하던 그의 눈이 완전히 감기는 순간이었다.
* * *
무서울 정도의 위협. 나디사는 전과 다른 빛을 품은 창을 보며 날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창은 그녀가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와 움직였다. 바람을 더 세게 하여 밀어 내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고민할수록 창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뾰쪽한 끝에 닿겠다고 생각한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후두두, 떨어지는 피와 함께 몸이 식었다. 나디사는 손이 떨려와 로마가 땅에 내려앉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창은 어깨에 꽂혀 있었다. 전투로 뛰어든 이의 어깨에.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연녹색 눈을 확인하는 순간 나디사의 눈에는 공포가 깃들었다.
다급히 남자를 안으며 란이 있는 자리를 노려봤다. 란은 그곳에 없었다. 증발한 것처럼 없어진 그는 더 이상 안중에 없었다.
나디사는 쓰러진 남자를 안고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집중력이 빠지면서 비행은 위태위태했지만, 워낙 두 쌍의 날개를 단 로마가 바람을 잘 조정하였기에 잠시 손을 놓을 수 있었다.
“히아신.”
정신을 잃은 그를 제 허벅지에 눕히려는 차였다. 그의 어깨에 박혀 있던 창이 노란 별빛으로 부스스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람에 떠밀려 가는 별빛을 허망하게 보냈다.
“히아신, 정신 차려.”
그는 제 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럴 이유가 하등 없었다.
새벽에 몰래 나온 자신을 따라와 이렇게 대신 아플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디사는 의식 없는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로마, 저기.”
감정이 마른 사람처럼 땅 아래를 훑던 그녀는 구원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쭈르륵 미끄러지듯 하강했다.
새벽녘. 어둠만이 가득한 이곳의 유일한 빛은 마을이 아닌, 바깥쪽 산중 한가운데에 있었다.
거리가 꽤 있었으나 속도가 빨라 도착은 금방이었다. 나디사는 로마가 있을 자리를 발견하자마자 착륙 준비를 했다.
불이 켜진 곳의 주인은 바람이 제 오두막을 부술 것처럼 불어오니 밖으로 대피했다.
태풍을 준비하듯 밖에 넣은 빨래를 걷으러 나온 그는 제 머리 위로 내려오는 라드를 보며 허둥지둥 도망쳤다.
“뭐, 뭐야!”
그의 비명을 듣고서 나디사는 오두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
바람에 눈도 뜨지 못하는 이를 보고 나디사는 로마의 날개를 접었다. 미풍이 여러 번 오두막 주인의 머리칼을 빗겼다.
나디사는 피 칠갑을 한 몸으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근방에 있는, 라드군입니다. 사람이 다쳐서.”
군복을 입지 않았음에도 나디사를 함부로 의심할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라드들을 보았으니 말이다.
“아, 알겠소. 근방에 있는 의사를 깨워서 데려오겠소.”
그는 라드로 달려갔다. 힘이 빠져 있는 라드였지만 주인이 아닌 자가 다가오자 고개를 빼꼼 든다.
“아, 안 물죠? 예?”
“로마, 괜찮아.”
안 문다고 했음에도 잔뜩 겁을 먹은 오두막 주인은 쓰러진 히아신의 몸을 안아서 제 등에 업었다. 그의 옷이나 사는 곳이 산중에 혼자 사는 사냥꾼처럼 보였다.
재빨리 오두막 안으로 히아신을 옮긴 그는 얼른 의사를 부르러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나디사는 빨갛게 변한 제 손을 보며 눈을 감았다.
아직도 이 피가 실감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