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히아신 아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신출귀몰하여, 어디서든 나타나고 어디서든 훔쳐 들으니까.
아트리스는 재빠르게 제 감정을 숨겼으나 이 달빛은 많은 것을 상대에게 알려 준 모양이었다.
나디사를 태운 로마는 떠나 버렸으나 그는 자꾸만 빈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혹시나 나디사가 자신이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었을까 봐.
“나는 너를 믿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고 귀여운 여자애 하나 어쩌지 못하고 보내 버린 거야?”
아트리스는 기가 막힌 웃음을 짓고서 히아신을 바라봤다.
줄곧 어둠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음침한 녀석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럼 너는 왜 숨어 있었지? 네가 했으면 설득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나야…….”
히아신은 묘한 웃음을 짓고는 아트리스를 비웃듯이 바라봤다.
“타이밍이 지금은 아니라서.”
히아신은 걸어와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어깨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트리스는 나디사가 제 것인 양 구는 그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히아신.”
“응?”
“너는 죽어도 나디사의 옆을 차지할 수 없어. 너도 나만큼 숨기는 게 많은 인간이거든. 어쩌면 나보다도 더.”
아트리스의 도발에 히아신은 화를 내기는커녕 히죽 웃었다.
“너는 되고?”
“둘 다 아니라는 소리야.”
“아, 이런. 아트리스, 넌 아무것도 몰라. 나는 네가 나디사에게 구애해도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응원하는 바야.”
아트리스는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허세라고 생각했다. 히아신의 눈빛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디사가 다른 이와 다정하게 얘기만 나누어도 약 먹은 놈처럼 훼방하고 다니면서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
아트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네 구애의 끝은 절망일 테니까.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재밌을까.”
아트리스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성탑 문을 열었다.
그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슬픔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
히아신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묘하게 열이 받아, 가슴속에 자리 잡은 쓸모없는 감정은 얼른 잊게 해 준다니.
슬픔은 가셨다. 성탑 계단을 오르는 아트리스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 * *
란은 준비를 철저히 해 놓은 모양이었다.
모두 불이 꺼져 있는 신전 처소 중에 유일하게 빛나는 곳이 보였다.
날고 있는 그녀가 저를 안전하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결국 괴롭히기 위해서 친절해진 그를 보며 나디사는 착륙하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란의 기분, 마음 같은 것. 솔직히 나디사는 그가 저에게 관심이 없듯,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의 고통에 무지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궁금해지고 말았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 두 번째 신관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질까.
연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의 집착은 사랑의 정도에서 어긋난 감이 있었다.
나디사는 로마에게서 내려와 누군가 곱게 깐 잔디를 밟았다. 아침과 달리 서늘한 저녁의 바람을 맞았다. 앉아 있던 이는 나디사를 보자마자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나디사가 올 필요도 없이,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나디사는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로마에 올라탔다.
그의 손에서 노란 무언가가 빛이 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거리낌이 든 것이다.
“왜 그래. 날 밝을 때는 자신만만하더니.”
아무런 위협을 가한 적 없는데 저 혼자 난리라고 하기엔, 그의 눈빛과 손에 든 빛이 흉흉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로마의 등에 올라탄 나디사가 노디를 들어, 배운 대로 가벼운 방어막을 만들었다.
“역시 군인이라 그런지 눈치가 빨라. 해 뜨기 전까지 공격을 잘 막아 내면 내 상을 주지. 맞아도 아프진 않을 거니 걱정 마.”
방어막을 촘촘히 만들고 있던 나디사는 그가 공을 던지는 것처럼 팔을 돌렸다. 노란색의 빛을 피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빛을 피했어도, 그는 금방 새로운 것을 만들어 던질 수 있었다.
그가 던지는 방향을 생각해 로마의 머리 방향을 바꾼 나디사는 옆으로 누워 날면서, 로마의 몸쪽으로 오는 빛을 향해 방어막을 펼쳤다.
쨍그랑,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방어막이 깨진 것이다.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내고서 깨진 방어막을 보며 나디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나디사! 세 번째는 피할 수 있겠어?”
방어막으로 저 빛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구나. 방어막을 만드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피하는 게 낫겠다.
나디사는 노디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목줄을 단단히 붙들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더 높이 올라간 로마는 날아오는 빛을 피해서 왼편으로 한 바퀴 돌았다.
이번엔 연속으로 두 개가 날아왔다. 자신은 몰라도 로마는 이런 공격에 맞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나디사는 날아오는 빛을 보며 필사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누웠다.
두 번 하늘에서 구르며 피하는 로마는 신이 난 것처럼 꼬리를 흔들었지만, 연속으로 세 번씩 구르자 나디사는 살짝 어지러웠다.
더 빠르게, 바람이 제 귀를 때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시끄러워질 만큼 빠르게 날았다. 바람이 온몸을 감싼 것 같은 그 순간.
날아가는 방향을 계산하여 그녀보다 앞선 곳에 빛을 뿌리는 이가 있었다.
제 앞으로 날아온 빛을 보며 나디사는 아래로 방향을 바꿨다. 땅으로 거의 곤두박질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하하하, 땅에 머리라도 박으면 그는 저것보다 더 환하게 웃을 것이었다.
로마는 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려갔으나 금방 다시 상승할 것을 기대하듯 날개를 바로 폈다.
그러나 하강하는 그들을 향해 노란빛이 날아왔다. 지금에서 방향을 바꾼다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디사는 노디를 꺼내 급하게 엉성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쨍그랑, 방어막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번쩍 빛이 그녀의 눈앞에서 깨졌다.
방어막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그 여파로 날고 있던 로마의 몸이 옆으로 쭈욱 밀려났다.
이대로라면 신전 처소를 박살 내고 말 거다.
나디사는 로마의 목줄을 잡아당겨 방향을 바꾸려고 했지만, 이미 한 번 밀쳐져 날아간 몸은 엄청난 속도로 처박히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처소를 박살 내고 라드까지 다치게 된다면, 누가 보아도 란보단 그녀가, 그녀의 부대가 위험했다.
모든 게 끝이 났다는 얼굴로 개운하게 웃고 있는 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바람에 싸여 날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디사는 눈을 감았다. 이 급박한 상황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바람을 느끼고, 라드인 로마의 마음을 느꼈다.
피가 아래로 쭉, 빠져나가는 느낌에 눈을 뜬 순간 하나가 된 것처럼 로마에게 붙은 손이 보였다.
한 쌍의 날개로는 이 바람에 저항할 수 없었다. 제 등에 날개가 생기는 기분, 살갗을 뚫고서 또 다른 날개가 탄생했다.
두 쌍의 날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란은 제게로 부는 바람을 불길한 시선으로 느끼고 있었다.
초원 위를 살랑거리며 날던 바람이 거센 돌풍이 되어 그에게로 가고 있었다.
신전 처소에 처박혀 아름답게 이 사건을 마무리해야 할 나디사는 벽에 닿기 직전, 두 쌍의 날개를 펴 바람을 조종했다.
마침내 완전해진 날개를 가진 로마는 바람에 끌려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날아가던 몸을 세워 그에게로 바람을 보냈다.
두 쌍의 날개가 움직이는 순간마다 엄청난 양의 바람이 이 잔디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선 란의 얼굴은 비장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