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상급 신관들의 처소가 있는 이 궁전은 무척 좋았다. 옛 왕궁의 별장을 개조하여 만든 곳이라던데.
위에서 날아올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문 하나, 창문 하나 허투루 만든 것이 없었다.
나디사는 저 혼자만 시원한 그늘 아래로 들어온 게 미안했다. 란이 그녀를 위해 깔아 둔 판에 함께 휘말린 것은 그녀의 동료들이었다.
란은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처소 안은 바람이 드나들도록 창을 열어 두었다.
하얀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 방에는 온통 흰 가구뿐이었다.
때가 탈까 무서워 발을 들이길 망설이던 나디사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발을 올리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더워지는 날씨에 맞춰 냉차를 따라 마신 란은 서 있는 나디사에게 건방진 턱짓을 했다.
“말해, 할 말.”
불량하게 포도 한 송이를 들고서 한 알씩 뜯어 먹는 란은 제 앞에 있는 이가 땀을 흘리든 말든 관심 없어 보였다.
“불만이 있는 사람한테만 화를 내시면 안 됩니까.”
“나 불만 없어. 함부로 나를 생각해 주네?”
“불만 있지 않습니까. 저한테.”
란은 한 알씩 뜯어먹던 포도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내가 진주 찾아 달라고 한 게 그리 아니꼬워?”
“진주가 있긴 합니까?”
“그리고 이번엔 수신인을 오해했어. 내가 불만을 접어 보낸 건 네가 아니야. 넌 얻어걸린 거지.”
란의 말을 완전히 신용할 수 없었으나 나디사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를 비꼬면 비꽜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아니면, 누구한테 보내는 불만입니까.”
“네 수장.”
손에 묻은 과즙을 손가락으로 빨던 란은 다리를 꼬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눈깔 보니 사툰 종족 혼혈 같고. 그런데 메놈이라는 성이 흔하지 않단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그가 아트리스를 찍어 누르려는 건 알겠다.
그리고 나디사는 백 번을 물어도 이 어린 신관보다는 아트리스를 신용했다.
저와 이간질을 하기 위한 란의 작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그 불만은 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쏘십쇼. 나머지는 보내 주시고.”
“이제는 발톱 정도밖에 안 되는 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기까지 하네.”
“자꾸 그러시면 저도 방법이 있습니다.”
우습게 그녀를 바라보던 란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나디사는 하얀 커튼과 잘 어울리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번째 신관님께 모든 걸 고해바치겠습니다.”
“……뭐라고.”
“파티장에서 저를 겁박하신 일부터 지금 이 진주 사건까지. 저희는 정식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닌데, 심지어 그것을 조작하기까지 하셨다면 피해가 없진 않으실 텐데요.”
바람이 불어와 그의 눈을 가릴지언정. 저 샛노란 눈에 담긴 생생한 증오까지 가려 주진 못한다.
나디사는 그가 슬슬 염증 나는 중이었다. 지난 기도실에서부터 여기까지.
이만큼 당했으면 됐나 싶었는데.
“저만 괴롭히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란의 눈이 증오로 번들거려도 상관없었다. 그의 감정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저도 저 나름대로 이야기가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헤쳐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에게 볼일이 있으면 저에게만 하면 된다. 제 동료를 음해하고, 괴롭히는 것은 보지 못하겠다.
“……좋아.”
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뜨거운 날임에도 그가 걸어올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웃음을 잃은 신관, 란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키가 큰 란은 위압적으로 그녀를 깔보며 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가 마침 시험할 사람이 필요했다.”
“시험이요.”
“요즘 실력이 예전 같지 못해서, 적당히 나를 달구고, 적당히 나를 받아 줄 강한 이가 필요했거든.”
나디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거면 됩니까?”
“새벽에 이리로 와. 너 혼자.”
“네.”
그때 신전 처소 안으로 하급 신관이 들어왔다. 란은 마침 잘 왔다는 듯이 그에게 손짓했다.
“밖에 있는 이들을 물러. 진주는 내 처소에서 찾았다고 전해.”
“네.”
물러가는 신관과의 대화를 들은 나디사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 모든 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였구나.
란은 뒤돌아서며 그녀에게 차가운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네가 안 오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나디사는 방 안쪽에 딸린 작은 욕조로 들어가는 란에게 대답했다.
“네.”
누구도 듣지 않는 대답이었다.
* * *
그들은 아주 늦은 저녁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몸이 지친 터라 비행 속도를 냈다간 사고가 날 것 같다는 이유였다.
마벤은 저녁을 먹으면서 신관 것들이 아주 개놈이라는 막말을 했다.
누가 들으면 수비교에 대한 모독으로 잡혀갈 뻔했으나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나디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란과 왕세자의 파티에서 친분이 있어, 내부를 잘 찾아보라고 했더니 마침 진주가 나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그들은 믿어 주었다. 아니, 믿어 주는 척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겠지만, 입을 닫은 나디사에게 답을 얻어 낼 순 없었다.
더욱이 나디사도 어디로 가지 않고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으니 그게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줄고 있었다.
들어와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오자마자 마벤은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나디사는 옷을 벗고 망토를 곱게 개어서 장롱 서랍에 넣어 두었다.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새벽에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야지. 나디사는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마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 이불을 가져다가 마벤에게 덮어 준 후 차차 몸을 일으켰다.
문밖으로 나오자 이제 여름이 찾아오는 것을 알리듯 울고 있는 풀벌레의 소리가 들렸다.
이 더운 고생을 시킨 란에 대한 분노가 다시 차오르며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나디사는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딱 걸리고 말았다.
그녀의 일탈을 알고 있는 듯 아트리스가 마구간 앞에 있었던 것이다.
아트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천천히 나디사의 앞으로 걸어왔다.
“조건이 뭐였는지 얘기해 줘.”
“무슨 조건.”
“지금 그 신관에게 가려는 것이지. 거짓말은 안 해 줬음 해.”
식사 때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에, 당연 아트리스가 모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디사는 조용히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노디를 꺼내 들었다.
“로마.”
노디와 그녀의 부름을 듣고서 마구간 문을 열고 나온 로마가 아트리스를 지나쳤다.
쑤, 날아가 주인 옆에 안착한 로마를 보며 아트리스는 표정을 굳혔다.
“네가 가면 모두를 깨우겠어. 이런 식으로 너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왜 몰라.”
“그 신관은 나한테 불만이 있어. 너희한테 한 말은 거짓이야. 파티에서부터 쭉 그랬거든.”
나디사는 로마의 등에 올라탔다. 떠나려는 그녀에게 다급히 아트리스가 다가왔다.
그녀의 팔목을 잡은 아트리스는 무엇을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강철같이 단단하고 냉철해 보이던 아트리스가 그녀를 잡은 손을 얕게 떨었다.
나디사는 달빛 아래서 유난히 촉촉해 보이는 그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가지, 마.”
나디사는 제 손목을 잡은 아트리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려놓았다.
“전부터 해결하고 싶었어. 그 신관이 알고 싶은 건, 나도 알고 싶은 거라서. 무사히 다녀올게.”
“할 말이 있어.”
아트리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곤,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가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정말 너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 그건 거짓이 아니야.”
“알아.”
여러 번 말을 하지 못하는 아트리스를 보며 나디사는 기운차게 웃었다. 서서히 나디사의 손목을 놓쳤다.
나디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오히려 위로하고 하늘 위로 떠올랐다.
* * *
작은 점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나디사. 그리고 그 아래 남겨진 자신.
아트리스는 제 손에 남은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신관은 제가 왜 신전에 있었는지 탐문하기 위해서라도 나디사에게 진실을 전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방금 그녀의 손목을 잡았을 때, 그녀가 자신의 손등을 덮어 줬을 때, 오랫동안 숨긴 진실을 고백하고 싶어졌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동료를 향한 감정이라고 하기엔 짙고 어두웠다.
“결국 보낸 거야?”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사람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