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전날 마벤과 술을 마신 나디사는 훈련에 참여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물론 그녀 자신이 아니라 마벤이.
비틀비틀 일어나 군복 단추를 잠그고 있는 마벤을 보며 나디사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딱 한 잔만을 주고 나머지 술을 모조리 마신 마벤은 계속 같은 말을 외쳐 댔다.
‘아트리스, 이제 안녕이야, 안녕.’
하지만 그러다가 또 울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트리스, 그리사, 시네라, 히아신은 방 근처에도 못 왔다.
들어오려고만 하면 오늘은 레이디의 날이라며 물건을 문으로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성탑은 방음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제 새벽에도 참다 못한 그리사가 내려와 잠 좀 자자고 했을 정도니 아트리스도 이미 다 들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벤은 어젯밤 술에 많이 취한 것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씻고 나와서 복장을 갖춘 마벤이 퉁퉁 부은 눈으로 물었다.
“나 어때.”
“부었어.”
“나 절대 아트리스한테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 물어본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응.”
마벤은 그 퉁퉁 부은 눈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걸음이 씩씩해서 다행이었다. 나디사는 천천히 웃으며 그녀를 따라갔다.
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심부름꾼 소년이 나디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편지요!”
“아, 이리 줘.”
부모님에게서 온 것일 터다. 나디사는 웃으며 심부름꾼에게서 온 편지를 받았다. 서랍에 넣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손에 있던 편지가 쑥 빠져나갔다.
“하……. 히아신.”
비틀거리는 마벤이 잘 내려갔나 눈으로 확인 후, 나디사는 뒤돌아 그에게서 다시 편지를 확 뺏었다.
히아신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게 다 연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왜 자꾸 남의 물건을 훔쳐 가.”
“안 가져가. 이따가 같이 읽어 보려고 그랬단 말이야. 우리 둘이, 침대에서.”
“내 초상화는.”
히아신은 히죽 웃으며 제 주머니에 있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그걸 손에 끼고서 양옆으로 살살 흔드는 것을 보고 나디사는 그 회중시계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회중시계는 잡히지 않고 위로 올라간다.
“훈련에 늦겠다. 아, 늦으면 안 돼.”
히아신은 열리지도 않은 회중시계 뚜껑을 보며 심각한 척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디사가 미간을 찌푸리자 장난스럽게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 버린다.
빠르게 사라지는 히아신을 보며 나디사는 고개를 저었다.
장난을 치는 것 같다가도, 묘하게 분위기를 잡으려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를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가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처럼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 때문에 하루 중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었다.
나디사는 목뒤를 주무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히아신 생각을 그만해야 한다. 그만, 제발, 그만.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사고여야 한다.
아니면 무언가 잘못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고 나온 나디사는 출발 준비가 아닌, 어딘가 어수선한 동료들의 분위기에 섞여 들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오늘 본거지에서 하는 훈련은 취소인가 싶었다. 천천히 마벤의 옆으로 간 나디사는 다가오고 있는 먼지바람을 보고 몸을 굳혔다.
구태여 이 좁은 성탑 길로 하얀색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왕세자인가. 나디사는 앞으로 왕세자의 파티에 불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장담한 아트리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아트리스가 아무리 수장이라고 하지만, 일국의 왕세자를 막을 정도의 힘이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지나오는 마차를 불청객 보듯 보았다.
하얀 말과 하얀 마차. 훈련을 가기 위해 막 길을 나서던 발톱의 부대 앞에 마차가 섰다.
하얀 말을 이끌던 마부는 후다닥 내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발끝이 끌릴 정도로 기다란 하얀 옷을 입은 이가 흙바닥으로 내려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의 금발 소년은 이미 질릴 정도로 얼굴을 아는 자였다.
나디사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이 서늘해졌다. 왕세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자신을 찾아 왔구나.
그래, 그 정도 악의를 가진 남자가 순순히 자신을 놓아줄 리 없었다.
나디사가 가진 비밀을 자꾸 캐내고 싶어 하던 그자. 신관 란이 발톱 부대에 당도했다.
이 자리엔 란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태반이었다. 아니,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좋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내리자 잔뜩 긴장한 발톱 부대였다. 란은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잠시 들렀다.”
“누구십니까.”
란은 앞으로 나서는 아트리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마구간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란은 쉬이 대답하지 않는 아트리스를 보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내 이름은 란이다. 두 번째 신관님께서 너희들을 잘 보살피라고 하기에 잠시 들른 것뿐이야. 아, 물론 개인적인 볼일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란이 찾아온 이유가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두 개의 얼굴답게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다른 때보다 더 성질이 날카로워 보였다. 친절하게 웃고는 있지만, 그 눈은 파티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그 눈과 똑같았다.
첫 번째 신관의 후보. 언젠가 신관의 최정점 자리에 오를 자. 란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란은 단순한 시찰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마구간에 뒷짐 진 자세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주인이 오는 줄 알고 고개를 든 라드들은 이내 들어오는 황금빛의 머리칼을 발견한 뒤 풀썩 주저앉았다.
란은 딱히 라드에 관심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 한 마리, 한 마리, 범인을 찾아내듯이 보고 있었다.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이들도 그런 란의 행동을 의아한 듯이 보았다.
그의 행동은 그들을 축복해 주려고 온 신관보다는 트집을 잡으려고 구는 깐깐한 상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디사는 불안해서 손가락을 여러 번 꺾었다. 우드득, 들리는 소리에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는데 그때 그런 그녀의 손을 감싸는 이가 있었다.
나디사는 고개를 들었다. 손을 꺾지 못하게 잡은 히아신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화가 나면 내 손을 꺾어.”
나디사는 자신을 감싼 기묘한 불안감이 히아신의 목소리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손을 감싸 쥔 히아신의 마음을 긍정적인 쪽이라고는 할 수 없다만. 그의 어이없는 말을 듣다 보면 그쪽으로 정신이 빠지니 말이다.
나디사는 문득 그가 경합을 망쳐 놓을까 자신이 손을 잡고서 있었던 때가 기억났다. 똑같이 손을 잡고 있으나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달랐다. 조금은 더, 무언가가.
“잠깐.”
마구간 안을 거닐던 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 고개를 들었다.
란은 어떤 라드 한 마리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이 라드는 누구의 라드이지?”
그들은 오래 같이 살다가 보니, 서로가 가진 라드의 얼굴 정도는 익히 알았다. 란이 앞에 서 있는 라드는 아트리스 메놈의 것이었다.
모두 그게 누구의 라드인 줄 알면서도 답하지 않았다. 싸늘한 바람이 불고, 란이 비웃음을 짓고 있는 순간.
아트리스가 나섰다.
“제 라드입니다.”
란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들어와. 둘이 할 말이 있으니.”
아트리스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를 짐작한 것처럼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나디사는 란과 눈이 마주쳤다.
왜 자신이 아닌 아트리스를.
그러나 마구간의 문은 굳게 닫힌 후였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구간 안은 어둠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