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저 빼고 신이 난 웃음소리는 마치 조롱 같았다.
마벤은 창문 앞에 서서 훈련을 지시하고 있는 남자에게 손가락 욕을 날렸다.
들고 있는 술병을 쥐고서 갈 곳이 없었다. 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려면 이 방은 안 된다. 벽이 너무 얇아서 바깥 소리가 다 들려오니까.
마벤은 아까 본 장면을 잊고 싶었다. 아트리스는 승전보를 들고 들어오는 사람처럼 극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저가 가져온 소식을 나디사에게 전했다.
그러나 달려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그만한 열의가 없었다.
그가 떠나고서 걱정하고 기다린 건 그녀였는데 말이다.
오늘의 저녁은 나디사를 위해 근사하게 먹자고 말해 두었지만, 지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벤은 술병을 쥐고서 방문 앞 돌계단에 앉았다.
제 짝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 건 쓰라림에 그치지만, 그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보고 있는 건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나디사에게 주겠다고 주문해 놓은 이 술을 자신이 혼자 마시는 것만 봐도 얼마나 형편없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디사는…….”
“나디사는 뭐?”
마벤은 깜짝 놀라서 옆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히아신이 바로 자기 옆에 서 있었다.
히아신은 아침부터 꿈나라에 계셨다. 그 누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두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관심이 콧털 만큼도 없는 마벤은 그가 보이든 말든 관심도 없었지만.
“뭐야. 깜짝 놀라게.”
“읏차.”
히아신은 굳이 제 옆, 계단에 앉았다. 비좁은 계단에 그와 나란히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한 계단 더 아래로 이동했다. 다행히 히아신은 거기까지 쫓아오지 않았다.
마벤은 술을 병째로 들어 마셨다. 옆에 앉아 있는 게 히아신이 아니라 아트리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조차 무척 비참했다.
남서부 지역의 손꼽히는 부자 가문인 로사 가문의 막내딸이 왜 이런 꼴로 살고 있을까.
“그런데 나디사 뭐?”
술로 적셔진 입술을 닦고 있었던 마벤은 아직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히아신을 노려봤다.
“뭐.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말고 가!”
“혼잣말은 권장해. 정신 건강에 좋거든. 그런데 혼잣말에 그 여자가 포함되어 있으면 나는 알고 싶어. 안 알려 주면 하루 종일 네 정신을 건강하지 못하게 할 거야.”
이젠 하다하다 히아신까지 시비를 걸어온다.
마벤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히아신은 씽긋 웃었다. 동료 중에 제일 정이 안 가는 놈이 있다면 이놈일 거다.
로사 가문은 대대로 감과 눈치가 좋았다. 그덕에 많은 부를 거머쥘 수 있었고. 타고난 장사꾼이라는 것은 그게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마벤은 그가 나디사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첫날부터 알았다.
하지만 그 관심이 나디사에게 독이 될 거라는 예감도 늘 하고 있었다.
“나디사한테 관심 갖지 마.”
“하하하하, 왜?”
히아신은 갑자기 본인의 턱 밑에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했다.
“나를 짝사랑해? 마벤?”
“미쳤어? 진짜로?”
마벤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히아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난 이미 모시는 자가 있는 몸이라……. 아, 어쩌지.”
“나는 아트리스를 좋아하거든!”
“아트리스?”
아트리스라는 말에 히아신이 웃는 얼굴을 보고, 마벤은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히아신은 그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놀랍지도 않아 하고 있었다.
마벤은 짜증 섞인 몸짓으로 일어나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흘러와 마벤의 발목을 잡았다.
“아트리스는 다른 여자한테 눈독 들이던데.”
“……그런데.”
“그게 하필 네 혼잣말에 들어가 있던, 내가 모시는 분이라서.”
마벤은 그를 돌아보았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히아신은 천천히 일어나 마벤의 바로 뒤까지 따라왔다. 돌벽을 짚고 선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늘에 덮인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아트리스가 다른 여자한테 빠지면 좋겠어?”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짜잔.”
마벤은 히아신의 손바닥 위에 있는 물병을 보고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냐는 듯이 눈으로 묻자 그가 위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의 물약. 확실한 사람한테서 얻은 확실한 거야.”
“뭐?”
마벤은 그 까만색 물이 담긴 물병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겁이 잔뜩 먹은 마벤을 보며 히아신은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이거 비싼 건데.”
“너 진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트리스한테 그걸 먹이라는 말을 제정신으로 하는 거냐고.”
마벤은 혹시나 싶어 도망가려다가, 다시 뒤돌아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히아신은 물병을 얻으러 온 줄 알고 그걸 내밀었지만, 마벤은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그거 나디사한테 먹이기만 해 봐.”
“그거 때문에 올라온 거야?”
“사람 마음은 그딴 약물로 얻는 게 아니라고. 이 멍청아!”
“나도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해.”
“뭐?”
마벤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마침 그때 문이 열렸다.
아래층에서 시끌벅적한 것을 듣고 히아신은 기지개를 켰다.
아까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온 히아신은 물병을 주머니에 넣고서 마벤의 옆을 지나쳐 갔다.
“그냥 네가 아트리스 좀 치워 줄 수 있나, 기대했던 거야.”
자그맣게 속삭이고 내려간 그를 보며 마벤은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히아신은 나디사의 앞에 서서 웃으며 무언가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나디사에게 장난을 치며 웃고 있던 히아신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연녹색의 시선과 마주친 마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피했다.
그 길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운 마벤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썼다.
그만큼 차갑고, 한기가 나는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흘끔 확인했다.
나디사는 들어와 흙투성이가 된 군복을 벗으며 샤워장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마벤.”
“응.”
기운 없는 그녀의 뒤로 다가온 발소리가 들렸다.
다정한 나디사. 처음에는 뭐 저리 나무토막 같은 여자애가 다 있나 싶었지만, 이제는 그녀가 누구보다 따듯한 마음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폭 쓴 마벤은 술기운 때문인지 눈물이 흘렀다.
“가. 가서 식사해.”
“왜 그래.”
“몰라, 그냥 가!”
마벤은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고 더욱더 깊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냥 오늘 느낀 이 모든 슬픔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막판에 크게 자신을 때린 히아신까지 떠오르자 서러운 눈물이 났다.
이불이 들썩거릴 정도로 울던 마벤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더 슬퍼졌다.
그때 오열하는 마벤의 이불이 밑으로 쭉 끌려갔다. 이불이 사라지고 나타난 나디사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마벤.”
“흐, 으윽.”
다른 게 슬프지 않았다. 마벤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녀에게 한순간이라도 미움을 품었던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 히아신이 유혹하듯 내놓은 약물을 가져가고 싶었던 그 마음이 너무도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나디사의 허리를 안고서 울어 버렸다. 그녀는 묻지 않고서 어깨를 감싸 안아 줬다.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해.”
“진짜, 싫어. 정말로.”
“미안.”
아트리스가. 그 아트리스를 사랑하는 제 마음이 너무도 싫었다. 전혀 자신을 도울 생각이 없는 이 마음을 도려내야만 한다.
마벤은 새빨개진 눈으로 바닥에 있던 술병을 집어서 그녀에게 보였다.
“같이 마실래.”
나디사는 잠깐 멍해져 있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안, 나디사. 딱 오늘까지만 더 좋아할게.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로사 가문의 막내딸이자 자랑스러웠던 자신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딱, 제발, 오늘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