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나디사는 끙끙 앓고 있었다.
마벤의 제보로 의사를 불렀으나 크게 잘못된 건 아니고 그저 술병이라고 했다.
몸에 맞지도 않는 독한 술을 연달아 마셔 댔으니 병이 온 것이었다.
한 시간만 푹 자고 일어나면 될 거라는 말을 들었으나 발톱 부대는 걱정이 꺼지지 않았다.
나디사가 왕세자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건 이해했다.
그들 중 누구였어도 아마 나디사처럼 경황없이 불려 다녔을 것이다.
“이 미련퉁이.”
마벤은 잠든 나디사의 옆을 지키다가 정오쯤에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앓는 중인 나디사에게 오늘도 왕실군이 찾아왔다.
마벤은 또 데려가려는 왕실군 앞에 나서려 했다. 차라리 징계를 받는 게 낫지 이건 출세도 뭣도 아니었다.
잠시나마 부러워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마벤은 팔을 걷고 나서서 조목조목 따져 볼 생각이었다.
“저랑 이야기하시죠.”
짝사랑하고 있는 이의 목소리를 모를 사람이 있을까.
마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항의 중인 아트리스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껴 마지않는 친구를 미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는 수장이니까. 동료를 위해서 나설 수 있는 남자니까. 하지만 그 많은 이유를 붙여 보아도 여자의 감이 말해 준다.
나디사에게 보내는 눈빛과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다르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묻기를 꺼릴 뿐이었다.
황금 망토를 두른 군인은 아트리스와 함께 걸어갔다. 아무리 아트리스라고 하더라도 왕세자의 명을 가져온 이를 내쫓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잘난 아트리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던 마벤은 가슴이 시큰거리는 느낌에 설레기는커녕 짜증이 났다.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저 혼자 훌쩍 커 버린 마음은 어느새 마벤을 조종하려 들고 있었다. 이런 마음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했다. 황금 망토를 두른 이가 순순히 떠나는 것이었다.
마벤은 믿기지 않았다. 기껏해야 훈련이나 기합을 받고 나디사를 내어 주지 않는 것에 그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마벤은 얼굴이 굳어서 오고 있는 아트리스를 피해 옆으로 섰다. 아트리스는 가타부타 말없이 빠르게 걸어와 그녀를 지나쳤다.
성탑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거의 뛰어오를 기세로 오르던 아트리스를 다시 마주하는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려온 아트리스는 얼굴을 가릴 후드를 쓰고 있었다.
마벤은 완전 무장을 하고 떠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 가?”
“나디사도 훈련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어. 나는 잠시 다녀올 테니까 오늘 훈련은 너희끼리 해.”
“그러니까 어디.”
나디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트리스가 곤혹스러운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
차라리 전원이 전부 같이 고행을 겪는 게 낫지. 왜 아트리스 혼자 짊어지려는 것처럼 군다는 말인가.
“오늘 주말이라서 훈련 안 해도 아무 상관 안 해. 그러니까 같이 가.”
“마벤 로사.”
마벤은 멈추어 서서 제 어깨를 잡아 눌렀다. 더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아트리스의 눈빛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만큼 견고했다.
“가만히 있어.”
“……아무리 그래도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해?”
아트리스는 손을 천천히 놓고 앞으로 걸어갔다.
제게 불친절하고, 독단적이고, 좋은 말을 해 준 적도 없는 남자에게 빠진 건 그녀의 인생에 최악의 실수였다.
그런데도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떠나는 그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이 순정이 화가 날 뿐이었다.
“빨리 끝나라, 제발.”
짝사랑이 사랑이 되든, 짝도 떠나고 사랑도 떠나든 얼른 끝나면 좋겠다.
* * *
란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그간 거의 출입 금지를 당했던 록의 처소에 들어가기도 하고, 함께 기도실로 출근하기도 했다.
물론 그 기도실에는 저만 있는 게 아니었으나 아버지라고 불러도 화를 내지 않는 록은 엄청 반가웠다.
록은 화가 다 풀린 것처럼 란의 농담에 웃어 주기도 하며, 예전 화기애애하던 두 사람의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하필 록이 두문불출하던 처소에서 나와 외출을 한 장소가 라드군 본거지 근처 대신전이라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이번 기도회에는 웬만한 신관들도 다 참여하고 있으니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하면 오늘 저녁도 함께하실래요?”
“그래. 너와 저녁을 같이 안 한 지도 오래…….”
웃으며 란의 말에 대답하던 록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이곳에 절대 나타나선 안 될 라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곳은 신전의 뒤편으로, 란이 일부러 바글바글 몰려 있는 다른 신관에게 그를 두고 싶지 않아 몰래 찾은 장소였다.
기도회가 열리는 주간에는 신전에 허락을 받은 이 말고는 아무도 오지 못한다.
은밀히 기도회가 열리는 신전 뒤편에 저런 짐승을 숨겨 두고 볼일을 볼 사람이 누구일까.
그 의문은 빠르게 해결됐다. 란은 신력을 꺼내어 그들의 앞에 부드럽게 깔았다.
기척을 숨겨 주는 노란 빛을 발견하지 못한 침입자는 후드를 쓰고서 달려가고 있었다.
록과 란의 시선은 차갑게 그를 쫓았다. 록은 그자가 신전 뒷문 방향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란의 어깨를 잡았다.
“아는 얼굴이구나.”
“아신다고요?”
란은 힘을 풀고서 나무 뒤에 얌전히 앉아 있는 라드를 바라보았다. 라드군 중에 그가 알 만한 이라고 한다면.
“설마 나디사 마로닌?”
“하, 란. 방금 그건 남자였어.”
안다. 그냥 해 본 소리였다. 허락 없이 이곳을 드나드는 것은 중죄이기에 그 여자를 골탕 먹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참에 아버지의 관심이 떨어지면 더할 나위 없고.
그나저나 요즘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 록이 이상했다.
란은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번 떠보기로 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관심 주시더니. 요즘은 왜 안 찾으세요?”
“란.”
“네?”
“나는 요즘 내가 무언가를 자꾸 놓친 것 같아. 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수십 번씩 과거를 헤매고 있지.”
과거를 헤맨다는 것은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말 그대로 혼자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을 거닌다는 뜻일 수도 있겠으나, 신관인 그의 말은 아마도 신력을 통하여 과거로 들어가 본다는 말일 터다.
사람의 단편적인 기억에는 본인의 감정과 왜곡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신력을 통하여 다시 보게 된 과거는 정확히 그 순간을 볼 수 있었다.
고위 신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마저도 몸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웬만해선 권장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아서 살이 빠지셨나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의 수척해진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그건 아버지의 남은 수명을 먹어 치우는 일입니다. 왜 그러셨어요!”
“나의 남은 수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어서.”
“아버지!”
“나는 삶에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 란.”
란은 그 말에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의미가 없다는 건 자신도 포함이라는 거다.
그 의미 안에. 그는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가족은 이제 록뿐인데도. 그는 그를 아들로 여긴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 여자 때문인가요?”
“란.”
“그 여자를 만나고 이상해지셨어요! 매일 드리던 기도도 안 하시고, 갑자기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시고, 저에겐…….”
식사는 했냐, 잠은 잘 잤냐, 왜 그렇게 뾰로통하냐, 왜 기도를 더 성실히 드리지 않느냐.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두 살부터 부모에게서 떨어져 신전에서 자란 그는 이제 낳아 준 부모를 만나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들은 란을 아들로 대하지 않고, 제가 지어 준 이름 대신 란이라고 불러야 했다. 신전의 이름을 말이다.
핏줄부터 잘라내 고립시키는 수비교를 혐오했다. 록은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란은 주먹을 쥐고서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
“란.”
“아버지는, 아니, 록 님은 저를 말로만 아들로 삼으셨군요.”
“너는 지금 너무 감정적으로 나를 대하고 있어. 나는…….”
란은 더 듣지 않고서 그의 옆을 떠나왔다.
달리고 달려 신전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록이 미웠다. 아니, 그 여자가 미웠다. 누구를 미워하는지도 모르는 마음이 칼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