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마셔라! 마시세요! 한 번에!
이번 파티는 이틀 내내 이어졌다. 저번 파티는 하루 종일. 그런 식으로 나디사가 참석한 왕세자 주최의 파티만 여섯 곳.
마차를 타고 왔다 갔다 이동하면서 버리는 시간만 고려해 봐도 이건 엄청난 시간 낭비였다.
술에 잔뜩 취한 나디사는 마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의 귀에 저 외침들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한 번은 중간에 도망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
도저히 이런 식의 모임을 견딜 수가 없어 도망가려던 그녀를 잡은 건, 마찬가지로 꼬박꼬박 참석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란이었다.
‘너는 몰라도 네 부대는 어떻게 될까?’
자신이 어떤 것에 옴짝달싹을 못 하는지, 어떤 것에 미련을 두는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왕세자가 다정한 사람 같아? 오, 한번 시도해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디사는 그날 이후로 왕세자의 모임에서 웬만하면 버티려고 했다.
구석 자리에 박혀 존재감이 없기를 바랐으나 란은 굳이 그녀의 옆에 서서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덩달아 옆에 있는 그녀까지 관심이 쏠리도록 말이다.
해서 나디사는 원치 않는 왕세자의 총애를 받고서, 단숨에 그의 측근들까지 알게 될 정도로 몸값이 올랐다.
몸값이라는 말을 사람한테 붙이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 말밖에 붙일 말이 없었다.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으나 나디사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으며, 쓸데없는 견제까지 받게 됐다.
오늘은 오전부터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회의실 앞에서 그녀는 딱 잘렸다.
황금 망토를 두른 이가 종이 한 장을 나누어 주며 문밖에 서 있게 한 것이었다.
‘아직 자네가 참여할 단계가 아니니 우선 밖에서 설명부터 들어.’
왕세자는 수비타 왕국의 잃어버린 보물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물건이 무언지는 왕세자 본인과 측근 몇몇만 알고 있으나 그 보물을 찾는 일을 두고 모두 신경전이 엄청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디사가 밀려나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어떠한 파벌에도 들지 않은 그녀는 왕세자가 자리에 없자 회의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문지기 신세가 됐다.
왕국의 역사서 같은 것을 한 장 띡 던져 주고는 문밖에 세워 두었으나 그게 마음은 더 편했다.
오늘처럼 숙소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짓궂게 술을 마시게 하는 것보단.
왕세자의 관심이 높아질수록 나디사의 삶은 고달파졌다.
왕세자는 웬만해선 제 측근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다. 왕세자의 총애를 두고 벌이는 물밑 작업과 암투가 곧 저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여기는 터였다.
나디사는 마차가 도착해서 섰음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벌써 열흘 가까이 훈련에 참석하지 못했다. 뒤늦게 도착해 아트리스에게서 정리한 노트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보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다.
란에게 순순히 굴복하여 제 사정을 털어놓으면 그는 봐주겠지.
하지만 나디사는 혀를 깨무는 일이 있을지언정 그러고 싶지 않았다.
똑똑, 마부는 마차 문에 노크했다. 여러 번 노크해도 내릴 생각이 없어 뵌다.
“나디사 경.”
잠이 든 모양이라 난감했다. 부대 경비를 불러야 하나 싶을 찰나 마중 나온 이가 있었다.
“노크 소리 너무 크다.”
“네?”
마부는 품위 없는 말투를 듣고 당혹스러워했다.
“노크 소리, 너무 크다고.”
“아, 네.”
그러나 그의 군복을 보면 신원은 확실했다. 토 달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은발의 남자는 그를 대신하여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문에 기대고 있던 나디사가 쏟아지듯 딸려 나왔다. 은발의 남자는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 귀여워.”
남자는 안아 든 그녀를 가뿐하게 돌려 등에 업는다. 지켜보던 마부는 남자가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술에 취했으니 부대 안까지 데려다 달라는 윗분들의 부탁이 있었지만. 데리러 온 사람이 있으니 괜찮겠지.
마부는 채찍을 내리치며 부대 앞을 떠나갔다.
마차가 사라진 자리에는 남자가 부르는 슬픈 곡조의 허밍만이 남아 있었다.
* * *
등에서 꼬물거리는 여자가 느껴져 히아신의 발은 춤추듯 스텝을 밟았다.
그녀의 침실로 숨어들어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접촉, 그것도 입술 간 접촉이 있어야 살만했다.
“음, 으음, 음.”
부드러운 허밍을 이어 가던 히아신은 그녀를 재우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했다.
나디사는 그 행동에 반응하듯 안아 든 그의 목을 더욱 꽉 조였다.
“하하.”
섰다. 분명 1초 전까지만 해도 자식을 대하듯 애틋하지 않았던가.
그의 몸이 한 마리의 들개로 변했다. 눕힌 그녀의 다리 사이를 개처럼 핥고 싶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병 같으니라고. 제게 신을 만들어 준 이 병 같은 운명은 변덕이 아주 심했다.
어떨 때는 그녀를 향한 끝없는 경외심을 만들었다가, 어떨 때는 이처럼 그녀를 여자로 만들어 깔아뭉개고 싶게 하고. 또 어떤 날은 자식을 보듬는 부모처럼 한없이 자애로운 보살핌을 요구한다.
이 병 같은 운명은 오로지 신만을 생각하지, 그 변덕스러운 마음에 휘둘리는 신자는 정신병을 얻든 말든 개의치 않으니 말이다.
해벗 종족은 전생에 아마 신을 살해하는 일에 가담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주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기에 너무 신이 나 보이는 히아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탑 주변을 배회했다.
“오늘 입은 드레스도 너무 예뻤어. 장미 같더라. 빨간색의 드레스에 감싸진 네가 피를 흘리는 것 같아서 오늘 입은 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 그 표정도.”
슬픈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하마터면 아래쪽으로 손이 갈 뻔했다.
그는 밖에서 수음하는 취미는 없었다. 바지 아랫단을 손으로 은근히 누르며 버티는 수밖에.
자그마한 코에서 나오는 숨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팠다.
히아신은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 쓰며 나디사를 앞으로 옮기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를 조심조심 한 팔로 움직여 얼굴을 마주 보고 안도록 했다.
제가 누구의 품에 안기었는지도 모를 만큼 곤히 자는 나디사의 입술이 눈앞에 보이자마자 짜릿한 느낌이 전신을 뒤덮었다.
“입술 꿍얼거리는 것 봐. 뭐 넣어 줄까?”
산책 삼아 찬 바람을 쐐주던 히아신은 결국 훑어 맛만 보자는 합리화에 넘어갔다.
쪽, 포도주 향 나는 입술이 못나게 눌렸다. 그는 사랑을 담아 그녀의 뺨을 앙 깨물었다.
“히아신.”
쪽,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스산한 바람이 싣고서 사방에 고자질했다.
파란 카디건을 걸치고 마중 나온 이는 아트리스 메놈. 그의 방해꾼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형형한 눈빛을 한 아트리스를 보며 히아신은 빙글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정중한 방해라니.
그래도 나디사의 자는 얼굴은 보여 줄 수 없었다. 히아신은 그녀의 얼굴을 제 어깨에 눌러 숨겼다.
“당장 내려놓아.”
“이 찬 바닥에? 우리 공주님을? 너무해.”
“장난하는 것 아니니까 당장.”
하지만 히아신은 그를 도발하듯 나디사의 머리통에 입을 맞췄다.
이 밤의 패배자인 아트리스는 목을 조를 기세로 달려들었다.
히아신은 놀라는 척하며 나디사를 안은 팔을 뒤로 숨겼다.
아트리스는 나디사가 깰까 싶어 크게 동작하지 않는다. 다가와서도 노려보는 눈만 죽일 듯하면 뭐 하나.
히아신은 예의 차리는 그에게도 신도가 될 기회를 주었다. 손으로 싸매고 있던 나디사의 뒤통수를 내보였다.
“너도 해 볼래?”
“뭐?”
“그러려고 헤벌쭉해서 달려온 거 아니야?”
“히아신!”
“자꾸 나한테 소리 지르면 얘 떨어트릴 거야.”
아트리스는 감격이 격해져 주먹을 빠득 쥐었다. 히아신의 눈이 농담이 아니었다.
“너한테 안겨 줄 바엔, 내가 나디사를 어떻게 하겠어? 말로 하는 건 너무 끔찍해서 못 하겠다.”
아트리스는 끔찍이 화가 나서 무릎이 떨린다는 감정이 어떤 건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분노할수록 히아신에게는 좋은 일일 뿐이었다.
“나 나디사랑 데이트도 두 번 해 봤다. 내가 제일 많아.”
“…….”
“잘 자. 나 우리 공주님 재우러 가야 해. ”
히아신은 히죽 웃으며 그를 지나쳐 갔다.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에 몸이 비틀어졌는데도 아트리스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히아신은 바보같이 뺏기고도 순한 남자를 보며 키득거렸다.
자기였으면 나디사가 잠에서 깨든 말든 무조건 데리고 왔을 텐데.
그래서 그들이 안 되는 거다.
저처럼 평범한 남자는 신도가 될 수 없었다.
히아신은 오늘도 유일한 신자인 것에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