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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58화 (58/210)

58화

“자,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으니까 춤이나 한번 출까?”

나디사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하나둘, 왕세자마저 짝을 찾아 손을 잡는다.

음악은 시작됐다. 그녀의 옆에 선 이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얼굴의 파트너를 갖게 된 나디사 또한 춤을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그는 표정과 달리 아주 친절하게 나디사를 리드했다.

음악이 시작되고 막무가내로 그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게 됐지만, 초반까지는 그도 여느 파트너처럼 춤에 집중했다.

왕세자는 어떠한 명이 있어서 그녀를 부른 게 아니었다.

왕세자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찜한 이들을 모아 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연단다.

춤을 추는 동안 그들은 입을 쉬지 않았다. 차기 왕의 눈에 들었다는 생각에 들뜬 이들이 이 파티의 분위기를 올리고 있었다.

실제로 이곳은 왕세자의 측근들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 무리가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거기에 왕세자가 새로 눈에 든 자들을 소개하기도 했고.

드레스 코드는 하얀색이었나 보다.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화려한 샹들리에와 수준급의 음악이 만나 행복한 밤을 장식했지만 나디사는 웃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아까 외우기 위해 기를 쓰던 대형만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 없이 훈련을 마쳤을 동료들을 떠올리자 더더욱 이 파티가 싫어졌다.

“얼굴 펴.”

음악이 시작하고 나서도 말이 없던 신관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미고 왔다.

그의 한쪽 귀에 달린 자수정 귀걸이와 단추 하나하나 금색인 하얀색의 턱시도는 조금 거짓말 보태서 왕세자의 것과 견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유 없는 악의로 무장한 그는 두 번째 신관인 록의 관심이 제게 쏠리는 걸 질투하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까진 모르니 더 답답한 눈치고.

하지만 순순히 물어보면 모를까. 그처럼 무례하고 싸가지 없는 이에게 친절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이름은 알아?”

“아니요.”

“란이야. 나 오늘 너 온다고 해서 왔어.”

그나마 신관으로 지낼 때는 얌전하게 입고 다녀 진짜 신관처럼 보였는데. 이리 사복을 입으니 정말 어디 귀족가의 양아치 같았다.

“새로운 왕세자의 사람이 들어온다고 해서 누군가 했더니 너라고 그러더라. 재밌어, 정말. 날개가 뭐 여섯 개인가 네 개인가. 높은 신관에 이어 왕세자까지. 능력이 좋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심해. 왕세자의 관심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니 너무 자만하지 말고. 응?”

나디사는 음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그의 손을 놓았다.

음악이 한 번 끝나자 왕세자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나디사는 타이밍을 봐서 란을 피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짓궂은 소년처럼 보이는 그는 그녀를 따라서 걸어왔다.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인사를 받을 때는 세상 자애로운 신관인 그가 자신과 둘만 남으면 건들거리는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마로닌 양이 이 정글 같은 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왕세자의 총애를 두고 물 밑에서 칼싸움이 일어나는 이 전쟁터 속에서 말이야. 아, 군인이니까 잘 버티려나?”

“버틸 생각 없습니다.”

샴페인이 담긴 잔을 집은 란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 나는 속세적인 것에 관심 없는 진정한 군인이다?”

“몇 시쯤 끝납니까. 이 파티.”

“왕세자가 집에 갈 때까지지. 가고 싶으면 말해. 내가 왕세자한테 어떤 건방진 군인의 도망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절대 제 편이 될 생각이 없는 란은 비아냥을 숨기지 않았다.

근래 신전에서 흰 빵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리사 수도 늘려 주고. 신전의 입김이 엄청난 것이었다.

나디사는 커튼 앞에 서서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앞을 봤다.

가끔 왕세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무어라고 떠들면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역할이었다.

진심으로 재미가 없어, 하품이 나오려고 했다. 나디사는 졸린 눈으로 물었다.

“왜 저를 미워하십니까.”

“내가 너를 미워하는 이유를 드디어 궁금해하는구나. 나는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란은 그녀를 보며 눈을 차갑게 내리떴다. 나디사는 그를 보고 있지 않음에도 그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 신관님과 무슨 사이인지,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내게 말해.”

“저도 아는 건 없습니다.”

“그러면 록이 네게 반하기라고 했다는 거야? 정말?”

나디사는 꼭 짝사랑하는 남자애처럼 질투하고 있는 그를 보며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눈을 조용히 굴린 나디사는 머뭇거리며 질문했다.

“혹시…….”

“혹시 이야기할 마음 들었다면 지금이야. 인내심 강한 수비교의 신께서 너를 굽어살피는 줄이나 알아.”

“연인이신가요? 두 사람.”

잔을 기울이며 마시고 있던 란은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마시던 술을 뱉어 냈다.

얼굴이 새빨개져 콜록거리는 그의 주위로 아까부터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세상에, 란 님.”

“어서 물을 가져와.”

그의 신도들인 듯한데. 란은 사레가 걸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손으로 그들의 도움을 거부했다.

정곡을 찔려서 저러나. 나디사는 그가 하인이 가져온 물을 급하게 마시는 것을 보고 또 사레가 걸릴까 걱정이 됐다.

“란 님.”

“나중, 나중에……. 지금 상담 중이라서.”

물기 가득한 눈으로 신자를 바라보자, 그는 나디사와 란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사람을 쫓아내는 솜씨가 수준급인 란은 어느 정도 진정되자마자 나디사를 돌아보며 낮게 씨불였다.

“진짜 돌았어? 나랑 아버지가 뭐? 연인?”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욕하는 그가 우스워 보였다.

난생처음 받는 오해인 듯 하나 나디사는 그가 하는 행동이 꼭 그처럼 보였기에 살짝 억울했다.

“그런 줄 알았어요. 신관님이 제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아끼는 데에 이유를 자꾸 찾으시길래요.”

“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 네가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 이상 신의 자비를 베풀 수가 없다?”

“저에게 혼자 있을 자유를 베푸시는 건 어떨까요.”

“하.”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는 란에게 제 사정을 다 설명시킬 필요는 없었다.

불타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은 이내 다가오고 있는 이에게로 옮겨졌다.

“란 님. 나디사.”

왕세자는 제 사람들을 몰고 다가와 란의 앞에 섰다. 란과 나디사의 조합을 예상치 못한 듯 왕세자는 눈을 빛냈다.

“오랜만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기뻤는데. 아니, 두 사람. 그나저나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란은 뻔뻔스럽게도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왕세자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은 그의 가증스러운 인사가 완벽하다며 감탄을 잊지 않았다. 나디사는 속으로 짜증을 삼켰다.

“나디사 경과 두 번째 신관님의 소개로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리 뵙고 보니 참 특별한 분이라서 더더욱 관심이 갔고요.”

“특별한 분?”

“왕세자님께서 사람 보시는 눈이 좋아서 놀랐습니다. 이처럼 보석 같은 재능을 가지신 분이라니요.”

왕세자는 제 안목을 칭찬받자 어깨가 하늘까지 올라갔다.

금발의 구름에 둘러싸여 머리가 어지러웠던 나디사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그들의 시선은 나디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꾸깃하게 쥐었다.

“소수 종족인데도 이리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걸 보니, 역시 플란 종족이네요.”

“왕세자님이 이끄시는 나라는 이처럼 평등하고 조화로우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하,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나디사는 웃음을 잃어 갔다. 그때 란이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도 종종 나디사 경을 보기 위해 파티에 오고 싶네요. 대화가 참 즐거워서요.”

“나디사 경은 앞으로 자주 올 테니, 우리 란 님도 자주 뵙겠군요.”

또 그 웃음. 자기들끼리 유쾌하게 주고받는 시선들. 예전부터 느꼈던 왕세자가 싫었던 이유를 알겠다.

자신과 왕세자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오로지 왕세자의 명을 받는 군인처럼 그의 뜻에 의해 움직일 뿐이었다.

왕세자의 예쁜 장식장처럼 서 있는 다른 소수 종족들도 멍하니 이 파티에 서 있었다.

란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게 무언지 정확히 파악하는 중이었다.

란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 자리에서 그 웃음 뒤에 있는 비열함을 읽은 건 그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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