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새벽에 나와 짐을 로마의 등에 실었다. 새벽이슬이 맺히기도 전에 한 출발할 작정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마벤은 아침잠이 많았다. 보지 않고 떠난다고 섭섭해하겠지.
샤포드로 가는 하늘 길을 알지 못해서 지도를 보고 떠나려는 차였다.
공용 식당에 시네라가 지도를 두고 다니는 걸 기억한 나디사는 성탑에 다시 들어갔다.
가는 길에 혹시라도 누군가를 마주칠까 봐 발끝으로 계단을 올라온 차였다. 그 누군가는 히아신이었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보다 먼저 식당을 사용하는 이가 있었다.
달콤한 우유 향이 가득한 식당에는 젖은 갈색 머리의 아트리스가 있었다.
어제 그리사가 얘기해 주길 아트리스 또한 휴가를 성탑에서 보내기로 했단다.
아트리스는 들어오는 나디사의 얼굴을 보며 마시던 컵을 들어 올렸다.
“마실래?”
“뭔데.”
“따듯한 우유. 설탕 넣어서.”
“부탁해.”
식당에 온 건 간단한 아침과 로마의 간식도 챙길 겸 온 이유도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아도 주전자에 따뜻하게 덥힌 우유와 말랑한 흰 빵을 식탁 위에 차렸다.
선반 위에 있는 귤 잼과 딸기 잼까지 꺼내 놓은 그가 여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나디사는 걸어가 빈 가방을 내려놓으며 아직까지 낫지 않은 그의 왼손을 바라봤다.
“뼈가 붙는 데는 원래 시간이 오래 걸려.”
나디사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가 나직이 말했다.
따듯한 우유에 설탕 세 스푼을 넣은 그가 그녀의 앞에 컵을 놓았다. 그리고 본인은 자리에 앉아 마시던 컵을 들었다.
흰 빵에 잼을 발라서 한 입 깨문 나디사는 놀라움에 눈이 커졌다.
“빵 진짜 맛있다. 요리사가 웬일로 좋은 빵을 가져왔네.”
발톱 부대에 배정된 요리사는 왕궁에서 일하던 수습 요리사로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지만, 국물 요리 몇 가지는 사람이 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식재료 담당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인지 가끔 신선하지 않은 식품들이 몇 개 있었는데, 빵이 그중 하나였다.
아트리스는 말없이 우유를 마셨다. 원체 말이 없는 그의 성격을 아는 그녀는 조용히 빵을 먹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 있어?”
“그 빵.”
“응.”
혹시 상했다고 하려나. 그래도 맛있으니 됐다고 생각하며 한 입 더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아트리스는 깔끔하게 비운 컵을 내려놓았다.
“신전에서 온 거야. 어저께 다른 것들과 같이.”
“신전에서.”
“너는 저녁을 그리사와 나가서 먹어서 모르겠지만. 어제 저녁은 제법 호화스러웠어.”
아트리스는 손깍지를 끼며 취조하듯 물었다.
“신전에서 네가 두 쌍의 날개를 발현한 것에 축하한다고 보낸 거지만. 사실 신전은 라드군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들이지. 개인적인 감정으로 보냈다는 소리야.”
빵을 느리게 씹던 나디사는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두 번째 신관이 너한테 왜 이런다고 생각해.”
나디사도 정확한 내막을 몰랐다.
친모와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그에게 이야기하기엔 조금 그랬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제 저녁은.”
“응?”
“어제 저녁은 괜찮았나?”
아트리스는 피식 웃으며 일어나 그릇장 서랍을 열었다.
지도 한 장을 꺼내 온 그가 그것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고마워.”
“이것 때문에 왔을 테니까. 볼 줄은 안다고 믿을게.”
“조금 걱정되긴 해. 나는 건 자신 있는데.”
“하나라도 자신 있으니 다행이지.”
아트리스는 빵 두 개를 종이봉투에 넣고, 라드들을 위해 만든 건조된 육포까지 챙겨 넣었다.
왜 식당에 들렀는지 귀신같이 아는 그가 신기했다.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할 생각이면 그만해.”
“혹시 속마음도 읽어?”
“내게 그런 능력이 있으면 세상 살기 더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없어.”
아트리스는 뜨거운 물을 한 잔 따르며 그녀를 살펴봤다.
“그래서 저녁은.”
물음의 연장선이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꼭 듣겠다는 뜻이었다.
“어제 그리사랑 먹은 저녁 말이지? 거기 음식도 맛있었어. 나중에 마벤이랑 가도 좋을 듯해.”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까지 조용히 듣던 그가 마벤의 이름이 나오자 차가운 눈을 했다.
“나디사.”
“응.”
“나는 마벤을 동료로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역시 어색했나 보다. 마벤이 이어지게 도와 달라는 말을 늘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방해만 되지 않았나. 미안하다고 말하며 얼버무리려는 차에 아트리스가 말을 가로챘다.
“내가 데이트하고 싶은 건 너니까.”
“그래. 어? 뭐…….”
“그리사와 저녁 식사는 괜찮았다고. 알았어.”
아트리스는 컵을 식탁에 올려 두고 일어서서 식당 문 쪽으로 나갔다.
나디사는 빵을 먹지도 못하고 그를 따라서 눈길이 좇아갔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아트리스의 발이 식당 문밖으로 넘어가다가, 뒤돌아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잘 다녀와. 그리고…….”
“…….”
“그 식당은 내가 보기엔 형편없어.”
“아…….”
아트리스는 식당 문을 열고 나서며 잘 다녀오라고 그랬다.
잘 다녀와, 평범한 말임에도 사람 기분을 묘하게 한다.
데이트, 데이트, 데이트. 요즘 역병처럼 돌고 있는 그 단어가 나디사는 싫어지려고 했다.
* * *
지도를 따라서 쭉 날아왔으나 아래로 보이는 지역은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지름길을 택하다 보니 먼젓번 마차를 타고 온 길과 다른 듯했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 훈훈한 기운이 적어지고 있었다.
샤포드 근방 같았다. 빙산이 있어 늘 추위와 함께하고, 여름에도 많이 무덥지 않은 샤포드는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사는 곳 자체가 빙산 근처였으니.
하얀 용이 잠들었다고 알려진 빙산은 주위를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
샤포드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역이 됐고, 그렇기에 그녀의 고향이 됐다.
커다란 빙산을 발견하자마자 로마의 날개가 느려지고 있었다. 주인의 조급한 마음과 다르게 로마는 늑장을 부렸다.
“도착하면 따듯한 불을 피워 줄게.”
로마는 대답하듯이 목을 떨며 울었다. 따듯한 불을 생각하니 힘이 나는가 보다. 날갯짓이 강해졌다.
샤포드 빙산 근처에 사는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워낙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착륙할 만큼의 빈 땅은 충분히 있었다.
입김이 신기한 로마는 일부러 콧김을 뿜으며 장난치고 있었다.
마구간은 따로 없으나 그녀의 옆집은 오랫동안 비워진 폐가였다. 나디사는 그 폐가 앞으로 착륙하며 기분 좋은 바람을 맞았다.
이 선선하고 매서운 공기가 그리웠었다.
세탁 일을 하면 손이 부르터서, 항상 이 차가운 바람이 반갑지 않았었다.
마로닌 부인은 그런 날이면 빙산에서 얼음을 떠와 끓인 후 그녀의 손에 찜질을 해 주었다.
로마를 데리고 폐가로 들어가 자리를 깔아 주었다.
그래도 예전에 사람이 살던 곳이라서 그런지 지붕과 벽난로가 아직 쓸만했다.
밖으로 나가 집 앞에 쌓아 둔 장작 몇 개를 가져왔다. 가져온 부싯돌로 불을 켜고, 벽난로에 장작을 계속해서 넣었다.
어느 정도 훈훈해졌다고 느꼈을 때 로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엎드려 누운 로마는 눈을 깜빡이며 졸고 있었다.
새벽에 시작한 여행이 저녁까지 걸렸으니. 로마는 힘들만도 했다.
나디사는 폐가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와 제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따듯한 불빛이 창문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마로닌 부부의 저녁 식사가 이제 막 시작되었나 보다.
칼로 무언가를 써는 소리와 아삭한 채소가 도마 위에서 굴러가는 소리. 문 앞에 서서 그 소리를 듣던 나디사는 문고리를 돌리지 못했다.
과연 들어가도 되는 게 맞을까. 자신을 싫어하거나 이미 잊진 않았을까. 글줄 없이 봉급 봉투를 보내는 자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렇게 생각했을까.
나디사는 한걸음 물러섰다. 기쁨과 그리움으로 달려왔지만, 막상 집 앞에 서니 두려움이 들었다.
어미와 똑같은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며 싫어하면 어쩌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시큰거릴 때 문고리가 알아서 돌아갔다. 열린 문으로 나오던 로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문 앞에 사람이 있을 줄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로단의 부드러운 시선은 하얀 군복을 지나 얼굴에 닿았다.
“나디사?”
칼 써는 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굳어 버린 로단을 본 나디사가 용기를 잃고 주춤거리는 찰나. 폭삭 안겨 온 몸에 의해 나디사는 주저앉을 뻔했다.
마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마로닌 부인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디사! 이 몹쓸 것! 어떻게, 어떻게 편지 한 통을 안 쓰고!”
며칠 뒤 도착할 편지가 부디 두 사람의 마음을 달래 주기를. 나디사는 마로닌 부인을 마주 끌어안으며 눈물을 삼켰다.
“다녀왔어요.”
다행이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서. 로단까지 합세하여 나디사를 끌어안았다.
빙산의 추위도 이기지 못할 따듯함이 이 집에 있었다.
내내 가슴 속에 불던 차가운 바람이 이제야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