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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52화 (52/210)

52화

그리사와 취기가 적당히 올라 기분 좋게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지막 식당에서 본 장면이 조금 걸렸지만, 어쨌든 그리사와는 감정적으로 오해를 풀었으며, 친모에 관한 정보도 들었으니 마음이 가벼워진 상태였다.

“내일 간다고요.”

“응.”

“하……. 재미없겠네요. 나하고 아트리스, 마벤은 성탑에 있을 예정인 듯하던데.”

“왜 재미가 없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리사는 평상시와는 달리 약간 불량스러워진 면모가 있었다. 솔직해지기도 하고.

“마벤은 아트리스에게 눈독 들이는 중이잖아요. 아트리스는…….”

말을 하다가 만 그리사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시네라는 집이 근방이라서 다녀온다고 하는 모양이에요. 가족이 많이 그리웠나 봐요.”

“모두 그럴 거야.”

“난 아닌데요.”

“거짓말하지 마.”

동생이나 형들이 끔찍하다고 했다. 입으로만 하는 불평이었다. 동생 이야기하며 짓는 표정을 이미 봐 버렸다.

말은 안 했지만 형, 동생이 있는 그가 질투 나게 부러웠다.

자정을 좀 넘겨서 부대 앞을 지키는 경비와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시간의 외출을 끝내고 돌아오니 이미 성탑의 모든 불은 꺼져 있었다.

내일 마벤에게 말을 하고 떠날까, 싶었지만 새벽 일찍 나서는 게 좋겠다.

마벤은 분명 붙잡을 테고, 그녀는 마벤의 말주변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저기, 그리사.”

“네.”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웠다. 나디사는 남에게서 얻어 낸 친모 이야기를 혼자 먹어 보고, 소화 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유일한 그녀의 핏줄로서 그 정도 욕심은 내도 되지 않을까.

“먼저 들어가.”

“잠깐만. 지금 나 데려다준 거예요?”

“그렇게 되나?”

“어디 가게요.”

“잠깐 마구간에. 로마 상태 좀 보려고.”

그리사는 앞장서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진짜 잠깐 있다 올 거라서.”

“그냥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해요.”

“고마워.”

“잘 자요.”

“너도.”

그리사는 흔쾌히 웃으며 성탑의 문을 열었다.

말 나온 김에 마구간에 들리려던 나디사는 갑자기 부르는 목소리에 발을 세웠다.

“나디사.”

“응.”

“미안해요.”

오늘 분위기는 좋았다. 그리사에겐 상대를 즐겁게 하는 말솜씨가 있었으며, 데이트에서 인기 있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 분위기를 이끄는 솜씨도 훌륭했다.

“처음에요. 당신한테 심하게 말한 거.”

“아……. 난 또. 괜찮아, 잊었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진짜 잘 자요.”

그리사는 플란의 고향인 수나타에서 쭉 살아왔으니 타 지역에서 살다 온 그녀를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플란 종족은 라드와 잘 어울리는 체질 덕분에 수비타 왕국과 봉합될 때 잡음이 컸다고 한다. 칼, 피, 배신자도 나오고 희생자도 나오는 그런 잡음들.

플란 종족의 역사를 자세히 알지 못했던 나디사로서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실력으로 심장까지 간 티사 레나이에 대해 그들이 열광한다는 것도 몰랐었다.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성격을 갖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지금껏 한 번도 갖지 못한 의문이 나디사에게 찾아왔다.

티사 레나이의 과거보다 티사 레나이가 궁금했다. 그 차이는 극명했다.

마구간 문을 열자 잠을 자고 있던 라드들이 작은 귀를 쫑긋거리며 문 쪽을 확인했다.

제 주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드러누워 자는 라드들 사이에서 로마만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고 있었어?”

내민 손에 콧잔등을 비비적거린 로마의 꼬리가 붕붕 양옆으로 옮겨 다녔다.

반가워서 하는 행동이 강아지 같았다. 나디사는 로마의 매끈한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내일 부모님 만나러 가는데, 너를 보고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로마를 보며 생각했다. 만약 티사의 라드가 살아 있다면,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일까.

라드는 평생 한 주인만을 섬겼다. 한 번 연결된 주인이 죽거나 사라지면 본인도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아니면 날아가 혼자 산속 같은 곳에서 고독하게 살거나. 죽거나 떠나다니. 로마의 마지막은 그보단 따듯하고 안온하길 바랄 뿐이었다.

나디사는 로마의 머리를 충분히 쓰다듬고서 몸을 일으켰다.

로마는 아쉬운 듯이 울었지만 눈이 졸린 것을 보니 곧 잠들겠다.

나디사는 조용히 걸어 나와 마구간 문을 걸어 잠갔다. 마구간을 나와 마주한 바람이 시원하여 더 걷고 싶었다.

잠시 산책할까 싶었던 나디사는 나무 밑 그림자를 보고 미소를 거두었다.

사복 차림의 히아신이 나무 앞에 서 있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히죽 웃은 히아신이 그녀를 보며 입 모양으로 ‘안녕.’했다.

경합 이후로 식사 때만 볼 수 있었다. 방에는 잠만 자러 들어온다고 하지. 같이 사는 동기인데도 그 비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히아신.”

술 냄새는 그녀한테서 났다. 히아신 아스는 얄미울 정도로 잘 먹고, 잘 사시는 분이라 향기만 났다.

“요즘 어디 그렇게 다녀.”

오늘 그리사와 있는데 그의 생각이 나서 혼났다. 그 입맞춤도.

“며칠 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어.”

“나를?”

“응.”

“아니던데?”

그늘에서 나온 손이 나디사의 머리를 꾹 눌렀다.

히아신의 걸음은 그녀와 구두 코가 맞닿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이 마르고 단 향이 초여름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헷갈렸다.

이제야 잠에 못 든 듯 충혈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다가온 그의 숨결에서 알았다. 그의 것이었다.

“다른 남자랑 데이트 다니니까 얼굴 더 좋아졌다. 이제는 나랑도 데이트해야지.”

“그게 무슨…….”

뒤통수가 잡혔다. 앞으로 얼굴이 당겨지자마자 자연스레 그의 목깃을 틀어쥐었다. 입술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 정신없이 빨렸다.

삼키고, 놓고, 다시 삼키고. 정도를 모르고 가지고 노는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음, 좋아…….”

그러나 이 남자는 더 좋아하면서 느끼는 중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나디사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옮겨진 곳은 나무 밑. 본격적으로 그녀를 나무에 대고서 입술을 탐했다.

깨물고, 신음하고, 핥고, 물고. 나디사는 이게 꿈인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히아신은 함박 미소를 지으며 재정비하듯 잠시 입술을 뗐다.

“너, 입술.”

그 짧은 사이에 엉망이 된 그의 입술은 피가 비쳤다.

“더 깨물어 줘.”

“……그만해.”

“나랑 데이트 안 해 줘?”

“무슨,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랑도 데이트해줘.”

피 묻은 입술로 하는 데이트 신청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딴 애송이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해 줄게.”

식당 창문에 머리를 콩 찧은 그가 생각이 났다.

그게 실재라니 기가 막혔다. 나디사는 힘을 실어 그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히아신. 데이트를 요청하면 언제든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이건 나한테 너무 무례한 행동이고.”

타이르는 말을 듣고도 히아신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기가 막힌 건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말이다.

제 입술을 혀로 쓸던 그가 킬킬 웃으며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

“내가 지금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지 알아? 아, 물론 관심 없겠지. 원래 이 병에 걸리면 다들 그러니까. 크게 보자면 네 잘못은 아니야.”

“병?”

“책에서 어떤 낭만적인 말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내 입장에선 이건 병이야! 이것 봐. 병? 한마디 하고 있는데 심장이 뛰잖아.”

나디사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너 혹시. 이상한 약 같은 거 마시는 건 아니지?”

마약류의 액체가 뒷거래되는 세상이었다. 그의 반응은 그런 걸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아신은 제 입술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린 뒤,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내가 신에게 평생 감사하며 신관이 되겠어.”

“하……. 나 잘래. 오늘은 이야기할 상태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랑 데이트할 거야?”

나디사는 그와 하는 데이트가 싫지 않았지만, 무언가에 취한 사람처럼 구는 그는 싫었다.

나디사는 입술에 남은 그의 맛을 지우기 위해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나중에 쉬는 날 보자. 나 내일 일찍 집에 가 보려고 해. 안녕, 잘 자.”

히아신은 그녀의 말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했다.

나디사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성탑 앞으로 뛰어갔다. 낡은 성탑 문을 잡고 열며, 아무런 기척 없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무 앞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삐딱한 자세로 서서, 그녀가 쳐다보자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잘 자.”

자신이 한 말을 똑같이 내뱉는다. 나디사는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그 좁아지는 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히아신이 보였다.

이런, 지금 빨리 잠에 들지 않으면 그가 꿈에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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