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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51화 (51/210)

51화

그리사는 데이트랍시고 여름 재킷을 꺼내 입었다.

그녀도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사복을 다려 입어 봤지만 영 촌스러운 시골 소녀 같은 복장이었다.

물결무늬가 많이 들어간 갈색의 치마는 안 입는 게 나을 듯싶었다.

화사한 색 위주로 유행하는 이 근방에선 잘 찾을 수 없는 무늬와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사는 개의치 않고 미리 알아 둔 식당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발톱 부대 근처에 있는 도시는 본거지 근방 도시보다 덜 세련되고, 덜 복잡했지만, 샤포드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이만한 도시도 충분히 발전된 느낌을 주었다.

직원이 안내해 주는 식당에는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히아신과. 자정의 시계탑 아래서 첫 키스를 했었다.

“나디사.”

생각에 빠져 그리사의 첫 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미안, 뭐라고 그랬지?”

“어떠냐고요, 여기.”

찬물을 마신 그리사는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 자리가 만족스러운 것처럼 표정이 풀어졌다.

가벼운 노란 셔츠에, 회색 면바지 차림은 소년 이미지의 그와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그리사를 볼 때마다 유난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동족이 자신과 마로닌 부부 말고 또 있다는 사실에 기뻤었다.

이래서 소수 종족끼리 뭉쳐서 사는구나 싶었다. 큰 도시에는 인구의 대다수가 사툰이라서 금발의 금안이 아닌 이를 만나면 금방 친해진다고들 들었다.

소수 종족만 모여 사는 샤포드에서 자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던 말이지만, 이제는 그 유대감이 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알아서, 요령껏 시키겠다던 그리사의 선택은 탁월했다.

랭키 웨던의 성에서 머물면서, 나디사는 자신이 생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생선이 들어간 식단은 피했는데 마침 잘 구워진 양고기가 메인으로 나왔다.

그리사의 잔에는 맑은 샴페인이, 그녀의 잔에는 육류와 잘 어울리는 포도주가 따라졌다.

잔을 부딪치고 나서 한 모금 마신 포도주는 축제 날 마셨던 것보다 달콤했다.

“입에 맞아요?”

“좋아.”

“그날.”

그리사는 제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무뚝뚝한 느낌이 있었다. 그 아트리스조차 솔직해야 할 순간에는 솔직했다.

“나 바람맞힌 날이요.”

“미안해, 그건.”

“됐어요. 어차피 시네라도 함께라서 김샜거든요.”

그리사는 제 앞에 놓인 음식 중, 가장 말랑하게 생긴 젤리 같은 것을 포크로 건드렸다. 입맛이 없어 보였다.

나디사는 가라앉은 그의 감정을 살피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잖아.”

“당신은.”

그리사는 샴페인을 연거푸 마셨다. 말릴 수도 없이 잔에 가득히 따랐다.

술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무얼 먹는 법 없이 마시기만 하더니만. 그리사는 노력하지 않아도 웃을 수 있을 만큼 취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라드를 잘 다룰 수가 있죠?”

그리사는 이제 포크마저 내려놓았다. 샴페인으로 입을 행군 그리사는 취기 오른 얼굴로 말문을 텄다.

“차라리 당신이 다른 종족이었다면 훨씬 나을 수 있었을지도. 솔직히 말할게요.”

“응.”

“당신이 질투 나요.”

그리사는 팔꿈치로 거추장스러운 식기를 조금 밀었다.

“나도 당신과 같은 힘을 갖고 싶어요.”

어떻게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나디사는 절제하려고 했으나 이 상황에선 술이 필요했다.

잔에 담긴 포도주를 끝까지 마신 나디사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나디사를 보며 그리사는 싱긋 웃었다. 그의 뺨이 대책 없이 붉었다.

두 사람은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술만 홀짝거렸다.

나디사는 한 사람이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잔을 놓았다.

“나를 낳아 준 친모가.”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사 또한 약간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것도 술의 힘이려나.

“유명한 라드군 조종수였대. 그렇게 들었어.”

“……낳아 준 친모면.”

“길러 주신 분은 따로 있어.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제 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사를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능력은 친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샤포드 촌뜨기에게 졌다고 억울해하지 말라는 것일까.

무엇이 됐든, 속이 후련하다는 게 정답이었다. 같은 플란 종족이라서, 아니면 술 때문이어서. 의심하고 닫아 두었던 마음의 빗장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친모와 인연이 있다고 알고 있는 세 사람, 록, 라넌 샤스, 랭키 웨던, 모두 사툰이었다. 그리사는 약간 술이 깬 얼굴로 접시 위의 마른 풀을 콕 찔렀다.

“플란 종족이었어요?”

“응.”

“너무 날 믿는 거 아니에요?”

그의 발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확했다. 나디사는 식당 내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사는 왠지 내 동생 같아. 그래서 믿음이 가는 건가.”

“웃기지 마요, 나디사. 나를 당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으로 만든다면, 진짜 친동생들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알게 해 줄 테니까.”

동생 취급한 게 기분이 상했는지 그리사는 냉담한 눈빛으로 팔짱을 꼈다.

“플란 종족 중에 유명한 라드군 조종수는 몇 없어요. 티사 레나이라든가.”

입가심으로 나온 과일을 집어 먹고 있던 나디사는 돌연 표정이 굳었다.

별생각 없이 말을 하고 있던 그리사는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를 읽었다.

“설마.”

“……너도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야?”

“정말 티사 레나이가 친모라고요?”

그리사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디사를 바라봤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는 이내 일리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닮았네요. 왜 그전까지는 몰랐을까.”

“그 여자의 얼굴을 어떻게 알아.”

“플란 종족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죠. 어떤 사람은 초상화도 있던데. 영웅 같은 여자 아닙니까. 저도 티사 레나이처럼 되고 싶어서 라드군에 지원했는걸요.”

초상화가 있다고? 나디사는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목이 탔다. 포도주로 목을 적시며 그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보다 소수 종족이 차별받던 시절에 티사 레나이처럼 승승장구하며 심장까지 올라간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가끔 퍼포먼스 식으로 라드군이 왕실 연회에서 날아다닐 때,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녀를 구경했다죠.”

그늘에 가려진 차가운 눈동자. 네 살배기인 자신의 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던 그녀, 그리고 망토.

자신은 모르는 그녀를 만나 본 사람들. 티사 레나이에 대한 좋은 얘기들, 좋은 추억들.

그리고 오늘은 데이트를 나와서 그녀를 동경하여 라드군에 지원했다는 그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럼 죽은 후에도 그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녀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믿는 이가 플란 종족엔 거의 없어요. 지금은 잊힌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불명예스러운 죽은 곧 자살을 뜻했다. 심심치 않게 듣던 말인데도 오늘만큼은 조금 슬펐다.

“장난이었어요, 아까는.”

“뭐가.”

“나를 어떻게 믿냐고 그랬던 거. 말을 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사의 말에 나디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하나 이야기해 줄까요?”

“응.”

“나는 여섯 형제 중 셋째라서 엄청 애매하거든요. 어느 날 약혼녀를 정해 주면서 결혼하라고 하기에 가출했어요.”

나디사는 그가 답례로 해 준 이야기가 꽤 재밌었다. 동생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 줄 아냐는 말은 경험담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디사와 그리사는 그 후로 조금 더 편해져, 남은 술과 음식을 모두 해치울 때까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는 거의 그리사가 주도했다.

이래 봬도 플란 종족에서 인기가 꽤 많아, 여자들이 자기를 두고 데이트 경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식당에 손님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은 시간이 찾아왔다.

직원은 즐거운 분위기를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한 뒤 조심스레 말했다.

“식당 문을 닫아도 될까요?”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리사는 천천히 나오라며 계산을 마치고 나갔다. 돈을 보탠다고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하겠다.

나디사는 일어나 치맛주름을 펴고 소지품과 지갑을 챙겼다.

쿵, 유리창 쪽에서 소리가 났다. 지갑을 주머니에 넣다 말고 돌아봤다.

어둑한 밤이 찾아와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 은발의 남자가 식당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식당이 2층이라는 것과 창문 밖에 있는 남자가 히아신이라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음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유리창에 기대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디사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나디사. 가요.”

“아, 어…….”

그리고 다시 창문을 보니 그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헛것을 본 건가.

포도주가 자신과 안 맞는 것 같다. 나디사는 허벅지를 몰래 꼬집으며 식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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