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멱살을 잡을 기세였던 마벤도, 그리사도, 나머지 두 사람도. 놀라움으로 커진 눈들은 이내 따스한 빛을 담았다.
휴가. 다 같이 보내는 휴가.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들 머릿속에 들어앉았다.
결국 마벤이 이긴 셈이었다.
하지만 마벤의 꿈은 세 시간 만에 무산이 됐다.
집사를 대동한 휴가, 개인 별장, 바다가 굽이치는 언덕에서 맞는 아침. 꿈은 가상했다.
휴가는 고작 이틀을 받았다. 열흘을 생각했으나 최근 임무가 많이 배정되어 조정했다는 말만이 전해졌다.
이틀이 넘게 마차로 이동해야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라드를 타면 빨리 갔다올 수 있었지만, 고향 집에 라드를 둘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불가했다.
그로 인한 마벤의 불평을 한 시간가량 듣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잘 준비를 하니 9시가 넘어 있었다.
휴가를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 중이었다.
마벤은 이왕 이렇게 된 것 가까운 근교라도 나가자고 했지만, 나디사는 짧게라도 좋으니 샤포드에 다녀오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군에서 지급된 펜은 질이 좋아 촉이 마르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누런 편지지에 첫 문장을 썼다. 가슴이 시큰거렸다.
[잘 지내셨나요?
이번에 휴가를 얻어 곧 내려가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이 편지는 아마 제가 휴가를 다 끝내고 나서 도착하겠지요.
무작정 떠나와서, 빈손으로 돌아가기가 창피하여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오늘이 오기 전까지 꽤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요. 그 일들을 모두 나열했다간 속상해하실 것 같아서요.
편지를 읽으면 금방이라도 돌아가고 싶을 것 같아 하루하루 읽는 걸 미루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열어 보지를 못하겠더군요.
자랑할 일이 생겼어요. 내년이면 더 높은 부대로 진급할지도 몰라요. 왕세자님과 만나, 그분에게 제 밑에서 일하라는 말도 들었구요. 모든 게 순조로워서 한편으로는 겁도 나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저에게 꽤나 잘 맞는다는 거예요. 같은 동료들도 처음엔 삐그덕거렸지만, 이제는 편하고 재미있어요. 언젠가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내 드린 봉급으로 맛있는 식사를 하며 지내시기를. 조금씩 모아서 이사도 가셨으면 해요.
두 분의 딸, 나디사가.]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내용을 검토하던 나디사는 마지막 문장만 수정하였다.
당신의 딸, 나디사가. 에서 나디사가, 로.
나디사는 다 쓴 편지를 봉하고서 심부름꾼 아이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으로 방문 밖을 나선 차였다. 나디사는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 반가워 웃었다.
내려오던 이는 그리사였다. 그는 이번 휴가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 작은 성에서 대기한다고 했다.
날짜도 애매하고 날씨도 애매하고. 요약하면 어디를 갔다 오기 귀찮다는 것이었다.
그리사는 굳은 표정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이쯤 되니 착각이 아니었다.
그리사가 의도적으로 저를 쳐다보지 않는 걸 느꼈다.
식당으로 내려가려는 그리사의 발이 그녀의 앞을 지났다. 나디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리사.”
나디사는 그와 계단 두 칸을 사이에 두고 섰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즉시 답이 돌아왔지만 잠긴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우울했다.
“아니면 나한테 화나는 일 있어?”
그리사는 주머니에 손 하나를 찔러 넣고 뒤돌아보았다. 무척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한 얼굴과 달리 그는 수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휴가 때 계획 있어요?”
“나?”
마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향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마벤의 부푼 기대를 채워 주지 못해 미안하다만.
“나랑 데이트할래요.”
“……어?”
다친 오른팔 때문에 쭉 우울한 줄 알았다. 금방 나을 거라는 답변을 준비했는데, 이건, 황당했다.
나디사는 시간을 끄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입술을 뗐다.
“미안, 나는 집에 다녀올 생각이라서.”
“집이 가깝나 보죠?”
“멀어. 그래서 라드를 타고 가서 얼굴만 잠깐 보고 오려고.”
“그러면 오늘 저녁은 시간 있겠네요.”
나디사는 들고 있는 편지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더는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면, 알겠어.”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준비하고 나와요.”
계단을 내려가는 그리사의 등은 무심했다. 저렇게 심드렁한 태도로 데이트라니.
그런데 이상했다. 데이트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행방불명도 아니고, 식사는 꼬박꼬박 먹으러 내려 오면서. 그 히아신 아스 말이다.
나디사는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사복은 그 옷이 그 옷이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해야 할 것은 많은데 무기력, 우울, 두통, 복통, 가슴통까지 와서 못하겠다. 하고 싶은 건 딱 하나.
이 낡고 작은 성탑에 사는 공주님을 납치하여서 삼 일 밤낮을 뒹굴고 싶었다.
오, 세상에. 생각만으로도 끔찍이 좋아서 히아신은 피고 있는 담배가 무슨 설탕 같았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앓는 소리를 흘렸다. 바람이 꼭 그 여자의 손길 같아서 아랫도리가 저 혼자 기대하고 있었다.
꼭대기 층에 멋대로 난입하여 담배를 태우는 것도 그 여자를 잊기 위함이었지만 되려 생각만, 그놈의 생각만 늘지 않았던가.
“음, 망했어, 망했어.”
이름만 떠올라도 미소가 올라오고, 지금 하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한갓진 섬에, 그림 같은 저택 같은 것이나 알아보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아무래도 망한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갸륵하고 좋은 감정만이 드는 게 아니라, 원체 그따위 운명에 거부감이 드는 제 마음이 남아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여자를 죽이자.
역대 해벗 종족 중에서 최초로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 뿌듯해야 하는 걸까.
그 여자를 죽이고 나도 죽이자.
그럴 수가. 히아신은 제 삶을 사랑했다. 최종 목표인 행복을 위해 영혼 팔고, 운명 팔고 살던 그가 자살을 계획할 줄이야.
그러면 옆에 묶어 두고 사랑만 주는 건?
보다시피 지금 드는 생각으로 보아 그 여자를 정상적으로 사랑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디 하나 망가뜨리고 수발, 혐오, 욕설을 얻는 게 아니고서야. 물론 그건 해벗 종족의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방법이었다. 결과는 말은 안 해도 안다고 믿는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속으로는 수십 번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웃고만 있는 게 맛이 갈락 말락 하나 보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녀가 납시었다. 돌벽에 기댄 히아신은 담배를 문 입술을 삐쭉거렸다.
나디사가 지저분한 심부름꾼 소년에게 금화와 편지를 맡겼다.
저 편지, 훔쳐야지. 그리고 그 편지를 훔쳤다는 걸 그녀에게 알리고, 잔뜩 화가 난 그녀가 증오의 말을 뱉으면, 그땐…….
아, 벌써 그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해벗 종족이 일찍 멸족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상대에게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랐다.
증오, 사랑, 우정, 부모에게 바치는 효심까지 모두 제 것이기를 바랐다.
알콩달콩한 사랑만으로는 이 머저리들의 병이 낫지 않았다.
“아, 저건 또 뭐야.”
그리사 데이와 인사를 한 그녀가 그쪽으로 달려간다.
히아신의 눈에 불이 켜졌다. 번들거리는 안광으로 두 사람을 추적하던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
어두운 구름이 제시간에 맞춰 방문했다.
히아신은 그리사 데이의 이름을 저주하며 뒤돌아보았다.
-히아신.
“안녕.”
-진척은 있어?
작은 유령 모습으로 나타난 형제를 보며 히아신은 비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귀여워라.”
-장난칠 시간 없다. 지금 수비타 왕국에서 거의 보물에 접근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너는 뭘 하고 있었지? 요즘 들어 회의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는 너를 모두가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 원래 참여 안 했는데?”
크흠, 헛기침을 한 작은 유령은 아무리 눈을 부라려 봤자 무섭지 않았다.
히아신은 습관처럼 제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몇 시인데 공주님이 외출하시나 싶었다.
-히아신!
“응?”
관심 없어 보이는 그의 반응이 유령은 자취를 감추며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만일 저들이 먼저 보물에 접근하면 너를 가만두지 않겠어.
“응. 또 보자.”
아아악, 짜증 나는 듯이 비명을 지르는 유령이 사라지고 히아신은 하늘을 바라봤다.
여전히 회중시계의 바늘은 멈추어 있었다. 달라진 것은 그였다. 그리고…….
저 데이트가 신경 쓰여 아무것도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