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새벽부터 훈련을 이어 갔다. 오늘만큼은 일찍 잠들어 체력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미 무릎 부대는 회의에 들어갔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말로 보아, 오늘 훈련이 있었던 몇 명을 다른 2군 후보로 교체한다는 내용일 것이다.
정예가 아닌 2군이어도 자신 있다는 소리였다.
새벽부터 고된 훈련이 있었던 발톱 부대는 교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나디사는 히아신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까딱거리고 있는 그의 발끝을 보다가, 그의 몸이 앞으로 조금 쏠리는 때에 손목을 덥석 잡았다.
움찔, 히아신이 몸을 떨었다. 나디사는 잡고 있던 손을 미끄러트려, 그와 손가락을 엮은 뒤 속삭였다.
“네가 이번에 나서면, 나도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아.”
히아신의 까닥거리던 발이 멈추었다.
나디사는 혹시 몰라 그의 손가락을 잡은 손을 망토로 가리고 있었다.
이윽고 두 부대를 지켜보던 라넌이 무릎이 아닌, 발톱 쪽으로 걸어왔다.
“아트리스 메놈.”
“네.”
라넌은 이 상황이 달가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 찝찝한 듯이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너희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왕세자님께서 꼭 참관하고 싶다고 하신다. 원래 일정은 내일이었는데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야.”
발톱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엿듣고 있던 무릎 부대의 수장이 나와 가슴을 펴며 말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하하하하, 웃음이 쏟아져 나오는 무릎 부대를 보며 왕세자는 즐거운 듯이 박수를 쳤다. 그들만의 축제였다.
하지만 라넌은 동조하지 않고 싸늘하게 무릎의 수장을 바라봤다.
“누가 너에게 물었나?”
커져 가던 무릎의 목소리가 개미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무릎의 수장은 성과 없이 쪽만 팔리고 제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라넌은 흙투성이인 발톱 부대의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난 공정한 경합을 원한다. 하지만 내일로 미루어지게 된다면 경합에 왕세자님이 없다. 그 차이는 아주 커.”
아트리스는 지친 제 동료들을 바라봤다.
억울하고, 분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눈빛에 미소가 나왔다.
스치듯 돌아다니던 그의 시선은 우연히도 발견한 나디사의 손끝에 머물렀다.
망토 아래서 붙어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보자마자 준비해 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포기할 건가?”
다시 라넌에게 돌아온 아트리스의 시선은 아까의 흔들림을 지우고 단단해져 있었다.
“아닙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묘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선 라넌의 푸른 망토가 왕세자의 앞에 가기 전까지 발톱 부대는 말이 없었다.
아트리스는 두려운 눈빛을 숨기고 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뒷짐 지고 선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준비된 자들의 눈빛이었다.
“해 보자.”
“어차피 내일 하든 오늘 하든 똑같아.”
매사 징징거리던 마벤의 목소리는 이미 옛날에 잊었다. 그녀는 양옆에 있는 이의 등을 팍 쳤다.
“야. 실수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본인이나 잘해요. 가장 불안한 건, 마벤 그쪽이거든요.”
“이게.”
고양이와 개처럼 싸워 대는 마벤의 과장된 몸짓은 두려움을 숨기려고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아트리스는 한 사람씩 눈여겨보다가 천천히 나디사의 앞으로 갔다.
의식을 잃고 떨어지던 그녀의 창백한 안색은 간곳없었다. 뺨 언저리가 붉게 올라와 있었다.
“미안하다.”
“뭐가.”
나디사는 사과를 하고 있는 아트리스를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봤다.
그를 위로하듯 올라가는 입꼬리, 부드러운 눈매. 기대 않던 나디사의 미소가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아트리스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도, 자기 자신도.
“할 수 있어.”
“……그래.”
아트리스는 이유 없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그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간신히 다리를 뒤로 옮긴 그가 고개를 들었을 차였다.
나디사의 미소와 정반대되는 싸늘한 시선이 있었다. 히아신과 짧게 눈빛을 나눈 아트리스는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
히아신 아스. 무릎의 수장에게 걸어가면서도 뒤가 당겨 왔다. 저 앞에 있는 경쟁 상대보다 뒤에 있는 그가 더 신경이 쓰였다.
아트리스는 망토 아래 엮여 있던 누군가의 손을 떠올렸다.
방금 전 그녀의 따스함이 만들어 준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 * *
경합 전, 정비할 시간이 갖추어졌다.
라넌은 이 일을 꽤 크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왕세자까지 참석하게 하여 빼도 박도 못하는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었다.
왕세자는 시간 약속 개념이 적은 사람이었다. 공정하지 않은 경쟁을 가장 싫어하는 라넌 본인의 성격은 또 어떻고.
두 사람의 상생이 좋지 않음을 몰랐나 보다.
“시합은 경주 주자들이 땅에 순서대로 서 있고,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비상하여 자기 지점까지 도착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라넌은 연설하면서도 울컥 치미는 감정을 여러 번 삼켰다. 왕세자가 쿠키를 먹으며 내는 소리가 꽤 거슬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이 경합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미리 정해 둔 주자가 아니라, 본인들의 체력을 고려하여 새 대타를 내세운 무릎의 얌체 짓도 할 말이 많다.
하지만 내심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 너라면 어떻게 대응할까. 그리고 너를 닮은 저 여자는.
누구보다 눈부시게 날았던 티사를 생각하며 라넌의 눈은 깊어졌다. 아름다웠던 만큼 그녀의 증오심도 깊어지게 만드는 사람.
랭키 웨던에게 사람을 보내 뒷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 나디사를 키운 부부가 티사와 절친한 고향 친우란다.
그 늙은이가 하고 싶은 말, 그리고 그녀의 감. 티사 레나이와 나디사 마로닌이 관련이 있을 거라는 것.
저 여자는 어떻게 대처할까.
하얀 장갑을 끼며 제 동료들과 웃고 있었다. 그 모습까지 영락없이 티사와 닮아 있었다.
“라넌.”
오물거리는 입술이 그녀의 상념을 깨트렸다.
라넌은 감정을 지운 표정으로 왕세자에게 다가갔다.
“네, 왕세자님.”
“언제 시작하지? 내가 좀 바빠서.”
“바로 시작하죠.”
왕세자의 의자를 준비하는 데만 해도 10분. 햇볕 가림막, 시종과 간식을 준비하느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왕세자에게 대놓고 말할 배짱은 없었다.
황금 망토를 두른 왕실 병사를 눈으로 훑고 라넌은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단상에 오르자 왁자지껄 떠들던 발톱 부대에도 침묵이 찾아왔다.
“다행히 날이 좋군. 시작해 볼까.”
라넌의 눈은 이미 마지막 주자 자리에 가 있는 나디사에게로 가 있었다.
그녀 역시 라넌의 눈을 피하는 법 없었다.
오늘, 어쩌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넌은 낯선 기대감을 간직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커다란 깃발이 위로 올라갔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첫 주자는 마벤이었다. 한 자리서 가만 있지 못하는 그녀의 옆에 수장인 아트리스가 서 있었다.
긴장을 달래 주는 따듯한 차를 그녀에게 건넸지만 마벤은 거절했다.
“그거 먹었다간 역류할 것 같아.”
“그래.”
아트리스는 쉽게 수긍하며 병에 든 찻물을 바닥에 부어 버렸다.
마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다.
“아, 씨, 왜 이렇게 긴장되지.”
“당연해. 안 한다면 네가 마벤 로사가 아니라 무릎의 첩자라고 의심했을 테니까.”
오늘따라 말이 많은 아트리스를 보며 마벤은 긴장을 덜어 냈다.
이 딱딱한 표정의 남자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게 마음이 들었다.
첫 주자라 부담이 큰 만큼 그도 신경이 쓰이나 보다.
“준비됐나?”
“네.”
“네!”
감시관은 두 부대 모두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로즈는 마벤의 신호에 따라 몸을 낮추었다. 로즈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걸어가던 마벤은, 문득,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벤이 나아가지 않고 멈추자 아트리스는 입술이 말랐다.
갑자기 돌아오는 마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어 몸을 들썩인 순간이었다.
쪽,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뺨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빠르게 다가온 만큼 빠르게 떠난 마벤이 로즈의 등에 올라탔다. 미안한 얼굴로 그에게 손 키스를 날렸다.
“긴장 사라지려면 이만한 게 없어서. 미안.”
아트리스는 입술이 닿았다가 사라진 자리를 손등으로 눌러 닦았다.
도둑 키스를 하고 도망간 마벤의 옆으로 감시관이 섰다.
심판으로 고용된 감시관은 작은 깃발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미소가 사라진 마벤은 목줄을 손에 감았다. 허리를 숙이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잘하자, 로즈.”
왕세자의 박수 소리만이 가득한 훈련장. 신호를 받은 감시관은 미세하게 끄덕거리곤, 깃발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날아가! 오스턴!”
무릎 부대의 우레 같은 함성과 함께 경합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