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진전이 있다고 믿고 싶지만,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무릎의 라드들은 날개 한 번을 움직일 때 바람을 훨씬 많이 만들어 내었다.
불리한 판세를 뒤집으려면 잠은 사치였다.
이틀을 허비했다. 하지만 그 이틀 동안 발톱 부대에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
훈련소에서 먹고 자느라 꾀죄죄해진 몰골로 훈련에 임했다.
“윽.”
아트리스는 시계를 보면서 기록을 쟀다.
가장 약진인 시네라가 유독 고생이었다. 그는 손이 부르틀 정도로 지금 이 훈련에 진심이었으나 기록은 진심과 상관없이 나왔다.
“흐, 아…….”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착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라드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다시피 했다.
반복된 훈련으로 캐롯이 몸을 낮추어 주인이 떨어지는 높이를 최소화했다.
흙먼지에 둘러싸인 시네라의 가슴이 부풀고 내려앉았다.
헐떡거리는 그에게 물을 떠다 준 그리사는 오늘의 화롯불 담당이었다.
그들에게 생긴 큰 변화는 이것이었다. 이틀 전부터 장작이나 검불을 쓰는 모닥불이 아니라 화로를 썼다.
화롯가에 벽돌을 쌓아 불을 오래 지킬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해 줬다.
신관들의 기도원에서 쓰는 고급 침낭은 물론, 식사를 제시간에 맞추어 이쪽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무릎 부대는 그에 대해 항의를 하고 온 모양이었으나 두 번째 신관이 보냈다는 말에 더는 항의도 이어 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무릎은 비겁한 수작질이라며 모의 시합을 하지 않았다.
훈련 양상이 바뀌었다. 발톱 부대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기록보다 더 빠르게 나는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지만 다들 팔팔해 보여 다행이었다. 라드들도 충분한 먹이를 제공받고 있으니 말이다.
아트리스는 흙투성이가 된 군복 윗도리를 벗었다. 가벼운 속의 하나만 걸친 그가 물병을 열어 머리 위에 부었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가는 시기였다. 간을 보며 오는 더위는 훈련의 최대 적이었다.
아트리스는 정신을 차리고자 물을 더 가져왔다. 보는 마벤만 안쓰러워 안달복달이었다.
“들어가서 제대로 씻고 와. 가는 김에 팔도 치료하고.”
“큰 부상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말 참 안 듣는다, 너.”
한편 나디사는 앉아서 호두를 깨 먹으며 체력을 비축했다.
그녀는 경합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선정됐다.
무릎 부대는 정예만을 뽑아서 6명의 선수를 구성하였는데, 특출난 실력 없이 모두 비슷비슷한 상위권이었다.
다만 그들의 평균이 이쪽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게 문제였다.
6명이 모두 비슷한 속도, 혹은 상대를 압도하는 속도를 내야 했다.
앞 순서의 라드들은 먹이량을 두 배로 늘렸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였다.
내일 하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사는 신전에서 보내온 책들을 탐독하는 중이었다. 아트리스는 그 책을 자기 전에 읽는다고 그랬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시합에 진심이었다. 수긍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시합에 나섰다.
이것마저 진다면 회복은 어려울 거라는 걸 모두 아는 터다.
나디사는 마지막 주자라는 게 심히 부담스러웠다. 역전의 가능성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거니까.
그 부담감이 로마에게까지 전해졌나 보다. 그 좋아하던 고기를 로마는 반 이상 남기기 시작했다.
식사를 차려 놓고 나디사는 꾸벅꾸벅 조느라 목이 숙어졌다. 그녀의 이마가 아슬아슬 식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디사의 이마와 식탁 사이에 손 베개가 생겼다. 이마를 부드럽게 감싼 손바닥은 깃털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식탁 위에 올려 뒀다. 혹시나 딱딱한 식탁이 자국을 남길까 싶어 가만히 대 주고 있던 손이었다.
“아…….”
그 깃털 베개는 그녀가 눈을 뜬 순간 빠져나갔다.
“아…….”
나디사는 식탁에서 머리를 떼고 일어났다.
그사이 훈련을 마치고 씻고 온 동료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조금 더 자지 그래요.”
“아니야. 지금 자면, 저녁에 못 잘 것 같아.”
“새벽부터 훈련하니까 그렇지. 하, 진짜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걸 질 수도 없고.”
마지막으로 아트리스는 신전에서 받은 <비행의 비밀> 책을 가져와 읽으며 각지게 썰린 채소를 집어 먹었다.
라드의 비행이 어제보다 가벼웠으면 좋겠다.
채소 위주 식단으로 몸무게를 감량하고 있었다. 나디사는 익힌 버섯을 채소에 곁들여 먹다가 무심코 옆을 봤다.
화롯불이 비치는 녹색의 눈은 훔쳐보던 것을 들켰음에도 태연했다.
염치없고 뻔뻔했다. 환희로 번지는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빛을 잃어 갔다.
“히아신. 할 말이라도 있어?”
히아신은 포크를 쥐기만 했지 무얼 먹질 않는다.
웃고 있는 얼굴인데도 그의 눈에 서린 감정이 낯설었다.
“나디사. 뭐 더 먹을래?”
마벤은 막 삶아진 채소 그릇을 들고 물었다.
“아, 나 채소를 더 주겠어?”
갑자기였다. 나디사의 접시 위에 삶은 채소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히아신이 제 몫의 대부분을 쏟은 것이다.
“어……. 고마워.”
“고마워하라고 한 건 아닌데.”
“너는 안 먹어?”
“채소 싫어.”
오랜만에 나눈 사람다운 대화였다.
히아신이 준 채소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디사는 그걸 포크로 찍어 냈다.
입으로 가져가려는 도중에 실패했다. 채신머리없는 입술이 그녀의 포크에 꽂힌 걸 훔쳐 갔다.
나디사는 채소를 훔쳐 간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 하는…….”
마주 앉은 마벤은 기품 있는 손짓으로 히아신을 가리켰다.
“히아신, 너 혹시.”
“혹시 채소 안 좋아한다는 말 거짓말이지? 라고 하려고. 틀렸어. 난 정말 싫어해.”
“나디사 좋아하지.”
시합을 겨우 하루 남겼다. 눈 떠서부터 자기 전까지 독 오른 뱀처럼 비장하기만 하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그들은 픽,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곱씹는 것보단 이게 낫기 때문이었다.
평소 특이한 장난을 즐겨 하던 그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머리를 기울여 나디사의 어깨에 기댔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으, 뭐야. 진짜야?”
“히아신 아스.”
책에 눈을 두고 있던 아트리스가 그만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똑바로 앉아.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니까.”
“척추 다쳐서 안 세워져.”
“장난하지 마. 모레가 시합이야.”
“모레까진 나을게.”
“히아신.”
마벤은 남자들의 기 싸움을 부추기는 것처럼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왜. 보기 좋은데? 둘이서 막 데이트도 하고 그랬잖아. 시계탑 울릴 때 낭만적으로…….”
아트리스는 조잘거리는 마벤을 한 번 노려본 뒤 식탁에서 일어났다.
독서 삼매경이라 몇 입 먹지도 않았다. 마벤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맨날 나만 가지고 난리지?”
나디사는 어깨를 털어 그를 떨구려고 했다.
“장난은 이쯤 해.”
“첫째, 이건 장난이 아니야.”
“히아신.”
아트리스가 가고 그리사가 왔다. 시합을 앞두고 예민해진 그리사의 말은 매웠다.
“적당히 해요. 오합지졸에 이어 다른 소문까지 추가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사도 일어섰다.
착한 시네라는 두 사람이 놓고 떠난 접시를 맡았다. 그걸 들고 둘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식탁엔 셋만이 남았다. 부추긴 자, 실행한 자, 당한 자.
“나 때문에 일 커진 것 같으니까 가서 수습하고 올게. 너희도 수습하고 있고.”
마벤마저 자리를 뜨자 버섯을 잘게 썰고 있던 나디사의 한숨이 깊어졌다.
어깨에 붙은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5분 뒤에 일어나,”
10분을 말하는 목소리 위로 떠오르는 알코올의 냄새를 기억했다.
‘10분 전이네.’
아니, 정확히는 알코올이 묻어 둔 기억을.
이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입술을 맞대고 숨을 나누었다.
난간을 짚던 손은 그의 목으로 가고, 혀는 들어와선 안 될 곳으로 들어와 숨통을 막았다.
짝이 맞추어진 기억의 다리를 건넜다. 그 끝에 있던 건 키스였다.
나디사는 포크를 떨어트렸다. 고개가 굳어 돌아가지 않았다.
“나디사.”
그의 말에 대답도 못 하는 지경인 것이다.
심장이 그녀를 두고 하늘로 비상했다. 떨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나 누구 미워해 본 적이 없는데. 그거 해 보려고 그래.”
“……왜 미워해야 하는데.”
“미워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다가 나중에 나 죽으면 창피해져. 아, 내가 맹세하고 욕한 게 조금 있어서.”
“어렵네.”
“그런데 너무 향기롭고 좋다. 조금만, 나 재워 줘.”
누구를 미워하느라 정신이 아팠었나. 그 누군가가 설마 키스한 걸 잊어버린 어떤 여자는 아니겠지.
나디사는 식사를 멈추고 조금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어깨를 내려 주었다.
안쓰러운 채소 도둑을 위한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