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41화 (41/210)
  • 41화

    록은 본거지 훈련소와 연결된 작은 기도실로 그녀를 데려왔다.

    란의 말과는 달리 라드군도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수비타 왕국의 사람들을 위해 지은 기도실이니 당연 와도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결국 그 란이라는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였다.

    사탕 뺏긴 소년처럼 질투에 불타던 그의 눈이 떠올랐다.

    나디사는 수비교의 상징인 푸른색 기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비타 왕국의 국기를 걸어 놓은 그 기도실은 네모난 상자 같았다.

    “이리로.”

    그와 단둘만 남게 되자 불편이 찾아왔다.

    본디 군인과 신관은 친해지기 어려웠다. 한쪽은 죽음을, 한쪽은 생명을 가르치니 말이다.

    금발의 신관들이 싫을 것도 없지만 좋을 것도 없었다.

    “나디사.”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손바닥을 폈다.

    “손을.”

    무언가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닫힌 기도실 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록은 다정히 말했다.

    “치료를 위한 것일 뿐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맹견 같은 란의 말이 일정 부분 맞는 것도 있었다.

    그는 직위에 맞지 않는 아량과 존중을 보였다. 첫 만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치료해 주려는 겁니다.”

    나디사는 그에게 다친 손목을 내보였다. 따듯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감쌌다.

    “잠시만.”

    티 없이 하얀 이마가 손등에 닿았다.

    경배하는 자세로 그는 길고 긴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였다.

    그의 기도가 불러낸 빛이 나디사를 축복했다. 황금색의 물결이 그녀의 부상을 핥아 내었다.

    신앙심이 없는 그녀조차 그의 모습은 이 세상 누구보다 고귀하게 보였다.

    신의 은총이라고 칭해지는 황금의 빛이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됐습니다.”

    푸른 기도실은 빛이 남긴 열기로 따듯해졌다.

    말끔하게 부기가 가라앉은 손목을 보며 나디사는 고개를 수그려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라드군은 손목이 자주 다치니, 항상 조심하시길.”

    그는 종종 이래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감사합니다. 의무실 안 가 봐도 되겠어요.”

    그녀는 올라간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하대해 주십쇼.”

    “아, 맞다……. 그랬죠, 참.”

    그녀를 한 심술 맞은 맹견에게서 구해 주고, 치료까지 해 주었으니 이쪽이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록은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오래 뜸을 들였다.

    훈련 중에 나온 것이라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었다. 나디사는 마무리 인사를 하고 기도실을 떠나고자 했다.

    친모에 관한 것을 묻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오늘은 그와 안면을 튼 것으로 만족했다.

    “잠깐.”

    나디사는 출구 쪽으로 틀었던 몸을 원상 복구시켰다.

    “네?”

    그의 사연 넘치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아, 나는, 그러니까.”

    “네?”

    “당신의 힘이 되고 싶어요, 아니, 되고 싶다.”

    마로닌 부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너무 잘해 주고, 모든 걸 주려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그 말에 부합하는 이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과거 사연은 친모와 연결된 것일 터였다.

    한낱 라드군, 그것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군인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이 얼굴 덕이다.

    친모와 잘 지내서 그런 것이든,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든. 그녀가 모르는 과거였으므로 그의 감정을 신뢰하지 않았다.

    “저에게 힘이 되고 싶으시다고요?”

    그는 나디사의 표정을 보고 말을 바꾸었다.

    “당신들의 힘이.”

    “왜입니까.”

    “당연히, 내가 축복했으니까. 처음이고, 축복을 내린 것도.”

    “그러한 이유라면 감사합니다. 그럼.”

    이쯤이면 조금 어색할지라도 좋게 좋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떠나려는 나디사의 앞을 노골적으로 가로막았다.

    “이만 복귀해야 됩니다. 비켜 주시겠어요?”

    나디사는 갈수록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라넌이 시험을 걸었다고요. 아니, 걸었다 들었어.”

    그의 지위를 생각해 보자면 못 막아낼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세운 벽 앞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나디사. 나를 불편해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네 편이 돼 주는 이를 내치진 말아 줘.”

    “신관님이 왜……. 내 편이죠?”

    “그러고 싶어졌으니까.”

    록은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좁은 기도실 벽에 붙어서 말했다.

    “라드의 힘은 무궁무진해. 라드의 크기와 속도는 절대 상관이 없어. 그녀도…….”

    말실수를 깨달은 록은 입술을 깨물곤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 힘을 찾는 훈련에 집중하는 게 좋을 듯싶어. 관련된 책도 그대들 편으로 보내지. 엿새면 빠듯하지만…….”

    “괜찮습니다.”

    돕고 싶다는 그 마음만 받겠다.

    그의 도움은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그의 영향력은 그렇지 않았다.

    이건 개입이 심했다. 라드군의 문제였다. 신관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가 보겠습니다.”

    “저기, 혹시 훈련이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잠시 근처에 있는 내 별실에 들려도 좋아. 아래 신관들에게는 이야기를 해 둘 테니.”

    나디사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기도실을 나섰다.

    손목은 매끈하게 나았지만, 끔찍하게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기도실을 나와 복도를 거닐던 나디사는 떼로 몰려오고 있는 신관 무리를 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신앙심이 깊은 분이로군. 이름이?”

    오늘따라 왜 이리 이 작은 기도실에 사람이 몰리는지.

    나디사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에 황금 띠를 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무지한 그녀라도 그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첫 번째 신관. 이 나라의 최고 신관이었다.

    “나디사 마로닌입니다.”

    첫 번째 신관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곤 다시 갈 길을 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도 조용히 나디사의 앞을 지나쳤다.

    신관 무리가 다 지나고 나서야 나디사는 걸음을 옮겼다.

    다음엔 의무실이 어딘지 지도라도 그려 와야겠다.

    나디사는 네모난 기도실이 주는 답답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햇살이 드는 복도를 달렸다.

    * * *

    따사로운 햇살. 시원하게 부는 바람. 자유로운 몸. 어디든 갈 수 있는 두 다리.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바로 얼마 전이었다.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의미 있던 나날들 말이다.

    히아신은 훈련소 뒤편 뜰에 누워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길 바라며. 꽃의 향기, 바람의 시원함, 인생 계획 같은 것들을.

    하지만 불량한 신자인 히아신은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었다. 꽃 한 송이의 향기도 허락받지 못한 몸이었다.

    “하하하하!”

    아마 그는 해벗 종족 최초로 신을 거부하다가 미쳐서 죽은 놈이 될 거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디사에게로 뛰어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외치고 싶었다. 감히 허락하신다면 그 발을 핥고 싶다고.

    이럴 순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복종할 순 없었다.

    그 여자와 단둘이서 걸어서는 안 됐다. 아니, 발톱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 여자한테 운명을 죽여 달라고 의뢰하는 게 아니었다.

    하늘이 괘씸죄로 그 여자를 고른 느낌이었다.

    “아.”

    사랑의 탈을 쓰고 오는 운명을 막을 수 있으려나.

    같은 공간에 있으면 이 충동은 더욱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시계 침 도는 소리만 들어도 개처럼 엎드리고 싶었다. 회까닥 돌기 일보 직전이었다.

    분명 조짐이 있었다. 그 여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동료를 위한 척하던 거기서부터인가. 아니면 연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위해 카펫이라도 깔아 주고 싶었던 그때인가.

    무색의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통했다. 히아신은 낮잠에서 깬 개처럼 일어나 달려갔다.

    훈련소에 나디사 마로닌이 나타났다. 그의 신을 추앙하는 떨거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최선일까.

    신의 자비를 받아 세상을 인식했다. 꽃의 향기도, 바람도, 그녀도.

    히아신이 그림자에서 기어가 햇살에 닿은 순간이었다. 때를 아는 양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아신]

    그의 미소는 신이 거두어 갔다. 발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온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그리고 그때는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신은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죄를 사하여 주는 만인의 신이 아니었다. 그의 세상에만 군림하는, 아름다운 나디사 마로닌이었다.

    “오랜만이야, 아버지.”

    어찌 됐든 사람이기에 죽는다는 사실. 그 사실만이 마지막 해벗 종족인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