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나디사는 한 바퀴 몸을 굴렸다.
옆에 있는 마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몸을 굴리고, 굴리다가 이마를 쾅 맞댔다.
“악!”
“아…….”
이마를 잡고 다시 반대편으로 굴러갔다. 마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트롤리를 끄는 하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마벤은 따듯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닦은 뒤 협탁 위에 물잔을 들었다.
“아가씨.”
“음.”
“20분 뒤 출발이십니다.”
“풉!”
마벤의 입에서 장렬한 분수 쇼가 일어났다. 뱉은 물은 침구가 빨아들였다.
“나디사! 일어나!”
나디사는 출발이 20분 남았다는 말을 듣고 잠에서 깬 상태였다.
그녀에게도 물수건과 물 한 잔이 제공됐다.
두 사람은 기함할 속도로 개켜진 군복을 입었다. 머리는 빗지도 못했다.
“젠장할!”
“아가씨…….”
하지만 지금 그런 나무람은 통하지 않았다. 잔머리 뜬 여자 둘이서 허둥지둥 침실 밖으로 나갔다.
두 아가씨는 15분 만에 준비를 끝내고 나갔다.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웃음은 부드럽고 따듯했다.
“아가씨가 저렇게 변하시다니.”
“훨씬 보기 좋으세요.”
“그만.”
집사인 세비는 감히 주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하인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까지 감출 순 없었다.
“침실은 너희 둘이 치우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오도록.”
아가씨의 일행이 떠나며 다시 조용한 일상이 찾아왔다. 집사 세비는 주인 없는 방의 문을 닫았다.
* * *
몸통의 수장인 헤번이 비행을 지휘했다.
나디사는 끔찍한 숙취에 시달렸다. 초인적인 힘으로 구토하는 것만은 참아 내었다.
숙취보다 더한 건 수치였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연결만 잘 시키면 그 기억의 다리를 타고 무언가에 도달할 수 있을 듯한데.
그와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도 그의 멸족에 관하여서. 그때까지만 해도 기억과 얼굴은 멀쩡했었다.
‘기억력 좋아?’
푸른 하늘 위로 그의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순조롭게 비행 중이던 나디사는 뒤돌아 맨 뒷줄에 있는 히아신을 바라봤다. 그는 세상 무표정한 얼굴로 날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있을까.
“나디사.”
그때 헤번의 바로 뒷자리인 아트리스의 부름이 있었다.
“나디사.”
“아, 응.”
“비행에 집중해.”
“그럴게. 미안.”
숙취가 깨부수려는 머리보다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
숨을 느리게 뱉으며 앞서서 날고 있는 헤번의 등을 따라갔다.
“너 어제 심하게 취했어.”
아트리스가 속도를 늦춰 그녀의 옆으로 날아왔다.
“아…….”
마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들어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는 마벤의 파트너였으니 어젯밤의 못 볼 꼴을 다 보았다는 소리였다. 수치심으로 물든 나디사의 고개가 떨어졌다.
“다음부터는 정신 놓고 마시지 마.”
“미안.”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자고 꺼낸 말이 아니니까 풀 죽을 필요 없어. 비행이 곤란하면 말을 하라는 소리야.”
“알겠어.”
나디사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히아신과 소통해 볼 셈이었다.
“뭐를 봐.”
“아니…….”
그런데 히아신의 눈빛이, 손이, 입술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진득한 분노가 피눈물 같았다.
그녀를 따라서 뒤를 본 아트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히아신.”
“…….”
“히아신 아스.”
깊이 사로잡혀 있던 히아신은 서서히 어두운 눈빛에서 벗어났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고운 건 아니다만.
“무슨 문제 있어?”
대답도 하지 않고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젓는다. 히아신과 나디사의 눈길이 우연찮게 섞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닿자마자 불에 덴 것처럼 놀라 아래로 떨어졌다.
윙크하며 웃는 게 일상이었던 그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대형 사고였다. 나디사는 정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에 혀를 악물었다.
“어!”
갑자기 뱉어진 시네라의 외마디에 나디사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 방향이 틀린데요.”
시네라는 길잡이 역할에 재능을 보였다.
체력이 약하고 비행 실력도 평범하지만, 단 한 가지, 지도를 읽는 능력은 일 등이었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아트리스가 묻자 헤번이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너희는 복귀 명령을 여러 번 거부했다. 그에 관해 라넌 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 우리는 본거지로 돌아간다.”
“그건 저희 잘못이 아닙니다. 복귀 명령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라넌 님 앞에 가서 말해, 아트리스 메놈.”
헤번은 따로 지시도 없이 아래로 하강했다. 예고 없는 선두를 쫓아서 내려갔다.
배려 없는 비행은 숙취로 시달리는 나디사에게 큰 고통을 선물했다.
손이 떨려 왔다. 잡은 목줄을 절대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라드의 등에 붙어 바람을 느꼈다.
땅에 완전히 닿지 않고 낮게 비행하여 헤번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차례차례 본거지로 입장했다.
발톱의 라드들은 긴장 상태였다. 악을 쓰는 라드의 공포심이 사람의 등뼈로 전달됐다.
-아아아악
본거지인 성으로 들어가자 수십 마리의 라드들이 지붕, 난간, 혹은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료의 입장을 큰 소리로 환영했다.
발톱 부대의 라드들보다 몸집이 큰 그들은 확실히 먹이는 것부터 남다른지 발육 상태가 좋았다.
매번 자기들끼리 뭉쳐 있었던 여섯의 라드들은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자마자 긴장 상태에 돌입한 것이었다.
날고 있는 라드의 몸이 뻣뻣해질수록 비행은 난도가 올라갔다.
마벤은 허리를 잡으며 제 로즈를 콩 쥐어박았다.
“주인도 안 쫄았는데 네가 왜 그래.”
“조용.”
헤번의 말에 마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냉정한 수장으로 돌아온 헤번은 사방이 탁 트인 한 건물 안에 착지했다.
“저 뒤로 한 사람씩 착지하도록.”
헤번의 라드는 도착과 동시에 기력을 다한 것처럼 주저앉았다.
“헤번.”
“라넌 경.”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라넌 샤스는 헤번의 복귀를 반갑게 맞이했다.
“수고했어, 헤번.”
“아닙니다.”
“네 라드를 치료실로 데려가고, 너도 며칠 쉬다가 와.”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쉬었습니다.”
헤번은 단정한 인사와 함께 퇴장했다.
건물 외부 공간에 일렬로 착륙한 발톱은 이곳이 라넌의 야외 집무실임을 깨달았다.
“어서 와.”
부대는 차렷 자세로 서서 정중하게 인사를 마쳤다.
“이번 임무는 어땠나.”
심장의 수장인 라넌이 형식적인 안부를 건넸다.
맨 왼쪽에 서 있던 아트리스는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좋았습니다.”
“따로 훈련을 받고 노디도 받았다던데.”
이미 모든 걸 지면으로 보고 받았으면서도 라넌은 다시 확인받길 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 서류를 깔고 앉았다. 이어서 시가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뭐 하는 부대지?”
싸늘한 눈이 나디사 쪽을 향했다. 창백하게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라넌은 느릿하게 연기를 내뱉었다.
“무릎의 바로 아래 부대다. 무릎이 없을 때는 너희에게 일을 맡겨야 하지. 사소한 임무긴 하지만, 그래도 임무를 거의 마쳤으면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특히 너. 아트리스 메놈. 수장으로서 복귀 일이 언제인지 체크하는 건 네 소임이지. 날짜를 고지받지 않았다고 해서 복귀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는 게 지금 이 상황에 맞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나?”
라넌의 차분한 꾸짖음에 아트리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랭키 웨던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라드군이 퇴역한 노인네 하나 어쩌지 못한 거냐는 비난만 들을 뿐.
“노디 사용도 위에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쓰고. 가관이군. 너희에게 내린 임무는 보호와 간호였을 텐데.”
“죄송합니다.”
“말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너희 때문에 애꿎은 무릎 부대는 휴가 없이 중노동 중이거든.”
라넌은 테이블에 시가를 비벼 끈 뒤 차근차근 징계를 내렸다.
“이달의 봉급을 줄이는 것은 각오한 것이었을 테고. 노디도 반납하도록 해. 그 이후의 벌은 감시관을 통해 전하겠다.”
노디를 내놓으라는 것은 발톱을 심부름꾼으로 쓰겠다는 거였다.
라넌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그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불복종까지?”
“저희는 노디 사용이 다른 부대보다 월등히 늦어, 그럼 정식으로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못 받아.”
라넌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발톱 부대 전원이 시선을 올렸다.
비웃음이 가득한 라넌의 얼굴이 신나 보였다.
“노디는 자격이 주어진 군인에게 지급되는 거다. 그게 너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떤 자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생각한 기준. 그걸 넘는 게 자격이다.”
라넌은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 듯이 서류 몇 가지를 챙겨 떠나려고 했다.
그때 나디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서류를 집던 라넌의 손이 멈칫했다.
“수장님의 자격을 넘겠습니다. 그 기회를 저희에게 주십쇼.”
아트리스도 다문 입술을 열며 한 발자국 나왔다.
“자격이 되는지 저희를 시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뒤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수장님의 뜻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