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 완벽한 날을 그가 망치고 있었다. 아니, 그녀던가.
어쨌든 마벤은 그의 무관심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설레하는 본인이 한심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황당함이 가신 아트리스는 그나마 쥐고 있던 술잔도 내려놓았다.
그래, 그들은 술을 마셨다. 하도 대화가 오가지 않아 술만 먹다 보니 두 사람 모두 진탕 마신 후였다.
마벤은 그로 인해 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있잖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하…….”
매우 성가시다는 표정의 아트리스는 그녀의 감정을 튕겨 냈다.
목을 조이고 있던 타이를 냉정하게 잡아당겨 풀었다.
“마벤 로사.”
“뭐. 이제 와서 사과라도 하게? 이 나쁜 자식아.”
“너하고 난 어울리지 않아.”
마벤의 눈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식어 갔다.
그날, 그 밤. 숲에서 땀이 젖도록 그녀를 업고 다니던 남자는 이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저를 업어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했다. 무사히 라드의 등에 태워 주고 웃어 주기까지 했었다.
너 잘났다고 하고 비웃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무력감과 슬픔은 왜 자신만 겪는 것일까.
아트리스는 마음을 털어놓으니 한결 편해진 모양이었다. 마벤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다.
“왜 내가 싫은데? 아니, 잠깐. 나 고백도 하기 전이었잖아. 지금 미리 찬 거야? 나를?”
“너는 이런 곳에 자주 왔겠지. 둘만 있는 식탁, 이런 곳을 예약하도록 도와주는 집안, 화려한 드레스.”
“뜬금없이 무슨…….”
“내 감정 이전에 우리는 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너는 이 자리에 앉아 야경을 감상하는 네 삶이 익숙하겠지만, 난 저 아래 야경에 속하는 게 편한 사람이니까.”
“…….”
“네가 전에 데이트하던 남자들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고 네가 흥미 있어 하는 주제를 꺼내겠지. 나는 달라. 군으로 복귀하면 어떻게 훈련을 진행해야 하는지, 그 주제에 대해서만 너와 이야기할 수 있어.”
참 이해 가기 쉬운 말들이었다. 가슴이 거부한 그의 말이 머릿속으로 가고 있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마벤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래서.”
술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마벤은 자존심을 살려 보려 했다.
“너는 내 수준에 못 맞추니까 알아서 포기해라? 이거야?”
“다른 듯 비슷하군. 네 좋을 대로 해석해.”
“하, 나 진짜…….”
“먼저 일어날게.”
그는 망설임 없이 일어나 재킷 단추를 잠갔다. 갈 테면 가라지. 마벤은 잔을 들다가, 마음이 바뀌어 내려놓았다.
“너 내가 아니어도, 이 자리에 있는 게 나디사였어도 그렇게 무례했을 거니?”
재킷 단추를 완벽히 잠근 아트리스가 동작을 멈췄다.
뒤이어 들려오는 그의 한숨 소리는 미미한 짜증이 섞였다.
“그 이름이 왜 나오지?”
“궁금해서. 너는 항상 나보단 나디사에게 친절했잖아.”
“네가 알 것 없는 일이야.”
알 것 없는 일.
마벤은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술이 과도하게 들어간 그녀의 스텝이 꼬였다.
“마벤!”
달려온 아트리스는 떨어지는 머리를 안아 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식탁 모서리에 박을 뻔했다.
“축하해, 아트리스 메놈. 네가 미워졌어.”
“정신이나 차려.”
“나쁜 자식.”
계산을 미리 끝내 두어서 다행이었다.
마벤은 아트리스에게 반쯤 안겨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자존심은 하락하고 입꼬리는 상승했다.
이 남자는 왜 이다지도 착해서 미움도 못 하게 하는가. 무정한 남자의 품에 안겨 축제 거리로 들어왔다.
마벤은 감정에 취해 뱉은 말을 떠올려 봤다. 나디사였으면 달랐냐는 말을.
아트리스의 시선은 종종, 아주 많이 나디사에게 가 있었다.
마벤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아트리스가 가장 먼저 찾는 것도 그녀였다.
“나도 힘들어.”
“똑바로 걸어. 진짜, 하…….”
“나 라드군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간 거 아니야.”
드디어 자신을 바라봐 준다. 미치겠다. 저 짜증 내는 얼굴도 귀여워 보였다.
갖기 어려워 보이니, 더 탐이 난다.
“오빠고 언니고, 전부 날고 기는데. 나는 아무런 재능도 없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결국 아빠가 돈 많이 써서 라드군에 꽂아 줬지. 그러니까 그 발톱으로 갔지. 이 천하의 로사 가문의 막내딸이. 아빠도 그건 예상 못 했을걸?”
“……그런 것치고 넌 잘 적응하고 있어. 뒷돈으로 들어왔다는 생각도 안 들을 만큼.”
“웬일이야? 네 입에서 칭찬도 나오고.”
아트리스는 징글징글한 사람 파도를 빠져나와 시계탑 전망으로 걸어갔다.
우선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잠시 호숫가 전경이 보이는 다리 난간에 그녀를 세워 뒀다.
“아트리스, 나, 속 안 좋아.”
“거기다 토하든가.”
그는 달랑거리는 타이를 마저 풀었다.
마벤은 난간에 기대 바람을 맞았다. 술은 진즉에 깬 참이었다.
명망 있는 로사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나 갖고 싶은 걸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없다. 동기로도, 친구로도, 남자로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 * *
술기운이 잔뜩 올라와 웃고 떠들었다. 공짜 술병을 비우고 나서 딱 한 잔을 더 마셨다.
히아신 자신도 취한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나디사보단 사정이 나았다.
“저거 봐.”
“뭐를?”
“저거.”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건 하드락의 자랑인 호수였다.
히아신은 그녀의 머리에 뺨을 기댔다. 나디사는 또 어떻고. 편해서 좋다며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연인의 자세였다.
“호수 보고 싶어?”
“응.”
“출발하시죠, 공주님.”
“하하하.”
이런 허접한 농담에도 자지러질 듯 웃어 줬다.
그녀는 나비처럼 사뿐사뿐 다리 위를 뛰어갔다.
“히아신. 그거 알아?”
“몰라.”
“태어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본 적은 처음이야.”
밤이 깊었다. 안달 난 몸을 밀착시킨 연인들이 곳곳에 있었다.
히아신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몰래몰래 방향을 바꾸어 걸었다.
다리 위에는 자정을 기다리는 연인들로 가득했다.
여기선 우뚝 솟은 시계탑의 정면이 보였다. 그 시계탑이 자정을 가리키는 순간 키스하려고 그런다.
유치하지만, 원래 축제가 유치하려고 모이는 거 아닌가. 다리 위에 빈 곳을 찾아 섰다.
히아신은 시계탑이 있음에도 제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그 회중시계는 그만이 읽을 수 있었다.
“10분 전이네.”
나디사는 여기서 충분히 바람을 쐬게 하고 들어가야겠다. 마침 그도 더 걷는 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나디사.”
“응?”
“뭐 하시나 궁금해서.”
“구경.”
차가워진 나디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쥐었다. 예민한 나디사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손을 떨고, 눈길을 떨구고, 잘하면 마음까지 떨구겠다.
장난으로 시작한 손장난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나디사는 또 웃었다.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몰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좀 나쁜가.
“나디사.”
“응.”
“기억력 좋아?”
“음……. 글쎄.”
“나쁜 편?”
말을 거는 와중에도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가누기 힘든 몸으로 다가왔다. 힘 들어간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쳐야 하는데 그치지 못했다. 아래가 뜨거웠다. 손은 밑으로 내려가 그녀의 팔꿈치를 어루만졌다.
숨을 나눌 거리를 찾아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좋지 못했다.
둥, 둥, 둥,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의 소리가 울리자 그 시끄럽던 축제가 기도 시간이 됐다.
다리 위 연인들은 입술로 입술을 막았다.
나디사는 쪽, 소리와 함께 시작된 입맞춤에 얼어 있었다. 달큼한 술의 향기를 입으로 넘겨 주었다.
살짝만 빨아도 그 말캉함이 느껴지는 혀였다.
사심을 담아 입천장을 쓸었다. 서툰 그녀의 혀를 데려오며 턱을 쥐었다.
숨은 그의 입 안에 갇혀 맥을 못 추는 중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음과 동시에 종소리가 그쳤다.
하지만 입맞춤은 종소리와 무관했다. 어느덧 두 사람 눈을 감고서 입맞춤에 몰입했다.
서로의 입술, 혀를 가져도 가지지 못한 것 같았다. 아쉽고, 서럽고, 이 키스가 그렇다.
숨소리가 잦아드는 나디사를 배려하여 입술을 뗐다. 타액이 묻은 그녀의 입술을 닦아준 순간이었다.
히아신은 초침 소리를 들었다.
째깍, 째깍. 거대한 시계탑의 초침이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길거리 위의 사람들은 관절 인형처럼 멈추었다. 그의 눈은 서서히 커졌다.
짤깍거리던 초침은 멈추어 시간을 가리켰다.
3시 3분.
3월 3일인 그의 생일에 맞추어진 회중시계.
너의 세상은 죽는 그날까지 3시 3분에 멈추어 있을 거라는 예고장 같았다.
3시 3분에 태어나 3시 3분에 운명을 만나고, 그리고…….
“히아신?”
한때 운명을 잘 피해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한때도 있었다.
하여 모든 걸 뺏긴 히아신의 시선은 주인에게로 갔다.
“와.”
그에게도 종교가 생겼다.
신자는 저 하나뿐인 종교였다.
운명으로 말미암아 유일신이 된 분이었다.
해벗 종족은 높은 신체 능력, 적응력, 뛰어난 두뇌를 갖고도 멸족을 당했다. 아니, 멸족을 했다.
그 뛰어난 건 모두 신의 차지였기 때문이었다.
자식조차 하찮아지는 사랑이 생겼다. 취한 나디사의 몸을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신을 안을 영광을 주다니, 감사하여 눈물이 다 난다.
“……히아신 아스?”
복귀하던 마벤과 아트리스였다.
“망했네.”
시계탑은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실은 그에게만 야박한 시간이었다. 저들은 그가 영원히 구속된 신자로 살길 바랐다.
이 시대의 마지막 머저리인 해벗 종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