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시네라랑 걷는데.”
“응.”
“우리 둘을 연인으로 보더라고.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어.”
“뭐?”
나디사의 비명 같은 외침에 식당의 이목이 쏠렸다. 대신 사과하듯 웃는 히아신 때문에 금방 흩어지긴 했다만.
나디사는 어처구니없는 시선을 떼 내지 못했다.
식당은 나디사의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내줬다.
게다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를 옹호하고 싶지 않지만, 거짓말이 불러온 생일 혜택이 엄청났다.
공짜 술에, 공짜 케이크에, 공짜 쿠키까지. 식탁에 넘쳐나는 음식과 케이크를 보며 나디사는 술을 홀짝였다.
태어나 술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히아신은 기왕 공짜로 받은 것, 안 마셔도 되니 따라만 두라고 했다.
한번 시험 삼아 마셔 본 것이 두 잔, 석 잔이 되었다.
“더 따라 드릴게요, 공주님.”
“놀리지 마.”
드레스를 고정해 둔 허리끈에서부터 열이 올랐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다.
히아신은 술이 셌다. 제가 들고 있던 잔을 부딪쳐 오며 자체적으로 건배를 했다.
“생일 같은 축제를 위하여.”
“……위하여.”
지고 싶지 않아 술잔을 입에 댔다. 입으로 넘어오는 달콤한 포도주의 맛에 미소를 지었다.
“음, 이거, 이름이 머야?”
“하하, 모르겠는데. 물어볼까?”
“응. 나중에 우리 집에 보내게.”
꽤 취한 나디사는 발음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말소리가 오가는 식당의 소음이 차츰 멀어졌다. 누구도 깨트리지 못할 고요 속으로 떠나는 기분이다.
“취해서 솔직해지는 사람은 많지만 귀여운 사람은 드문데. 디디, 넌 그 두 가지를 다 해내는구나.”
히아신은 손가락으로 그녀가 먹고 있는 머리칼을 살짝 빼 주었다.
“뭐라고?”
“술 더 먹어도 된다는 뜻이야.”
“응, 더 줘. 그리고 이름도, 꼭.”
“누구 명령인데 거부하겠어. 염려 마.”
호숫가를 비추는 창문으로 밤거리의 빛이 스몄다. 식탁에 엎드린 나디사는 황홀하게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좋다. 조용해서.”
오늘의 나디사는 아름다웠다. 허벅지를 드러내는 옷이 너무 잘 어울려 문제였다.
살랑이는 치맛자락 아래로 뻗은 하얀 다리는 히아신 아스를 개자식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무얼 하진 않았다. 다만 머릿속이 무얼 시키려 들었다.
히아신은 조금 더워져 의자에 기대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히아신.”
엎드려 있던 나디사가 돌연 얼굴을 살짝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하던 히아신은 급하게 미소를 지어냈다.
“왜 말 안 했어?”
“내가? 어떤 걸?”
“멸족당한 거.”
예상 밖의 대화.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대화. 히아신은 이만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술에 약한 여인의 입술은 끝장을 보려 했다.
“그럼 내가 말을 돌리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
“……동료니까.”
상체를 일으킨 나디사는 잔에 남은 술을 마셨다.
실수로 흘린 술이 떨어져 가슴골 사이로 들어가는 걸, 히아신 역시 실수로 목격하고 말았다.
앞이 젖은 연보라색 드레스는 끔찍하게도 그의 취향이었다.
“아, 어쩌면 좋나. 이걸 엿같다고 해야 하나,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하나.”
“환영.”
말의 뜻도 모르면서. 나디사는 대강 듣기 좋은 것을 골랐다.
그녀는 꼬이는 발음으로 지나가던 직원에게 냅킨을 요구했다.
그 직원의 사심 담긴 시선을 본 히아신은 엿같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음, 나 취했나.”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 귀여웠다. 자제하려고 눈을 아무리 깜빡여 봤자 술기운은 도망가지 않는다.
히아신은 다가오는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러운 사심이 묻은 냅킨은 그가 받았다.
“아……. 뭐지.”
좋은 기분을 망친 저 남자를 망치고 싶다.
뒷말을 삼킨 히아신은 잔에 남은 술을 천천히, 모두 비워 냈다.
여기서 더 단추를 풀었다간 볼품없어짐에도 히아신의 손은 바로 움직였다.
“해벗 종족은, 처음 들어 봐.”
축제 첫날이 가장 화끈하고 시끄러운 법이었다. 오늘은 그 첫날이었고.
뜨거운 연인들의 시선이 노란 조명에 열기를 더했다. 창가에 있는 두 사람만이 정적을 거닐고 있었다.
히아신은 축제 거리를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이런 날 담배 냄새를 풍기는 건 남자로서 실격이니 말이다.
생각이 난 김에 입에만 물고 있으려는 차였다.
재밌는 거래가 생각났다. 반은 장난이었고, 반은 진심이었던 거래.
“나디사.”
“응.”
“내가 죽여 달라던 아마도 여자일 사람. 기억해?”
“아, 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나디사의 집중력은 떨어져 갔다. 그래도 어떻게든 듣기 위해 고개를 바짝 세워 본다.
덕분에 히아신은 담배를 문 입술로 웃을 수 있었다.
“해벗 종족은 너희 플란 만큼 아주 특별한 종족이야. 내가 그 종족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응……. 어떻게 특별한데?”
“외부로 인한 게 아닌, 내부의 문제 때문에 멸족한 건 이쪽이 처음이지. 놀랍지 않아?”
밖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눈동자에 스쳤다.
“해벗 종족은 나보다 낭만적이고 열정적이라서. 여자를 돌 보듯 하던 남자도 제 운명의 짝이 나타나면 갑자기 저질로 변해.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취한 나디사는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집중하여 듣다가 조용해졌다.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 이유도, 조건도 없이 종교가 생기는 거야. 심지어 신이 눈앞에 나타나 말까지 걸어 주는 거지. 그 신의 말이면 뭐든 하는 머저리로 변해서, 정작 제 인생은 뒷전이 되는 거야. 아, 말로만 떠들어도 이렇게 끔찍할 수가.”
나디사의 잠이 달아났다. 이번 생에 이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는 없을 듯했다.
진심으로 그걸 역하다고 생각하는 히아신이 있었다.
본인의 종족을 표현하길, 머저리들의 집단 종교 활동이란다.
“그럼, 내가 죽이는 사람이. 네 신이 되는 거야? 그래도 돼? 신이라며.”
“나는 불순한 신자라서 신이 죽는 걸 방관하려고 해.”
“머저리로 변한다며?”
“그러니 내가 죽이지 말라고 빌고 애원해도 너는 뭐를 해야 한다?”
나디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그때는 돈을 구하는 것에 급급하여서, 죽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게 될 히아신의 신을, 무려 이름도 거창한 해벗 종족의 운명을 죽일 수 있을까.
그걸 죽이면 네가 무사할 수 있을까.
“네가 못 견뎌 하면.”
“완전히 멸족한 해벗 종족이 되는 거지. 아, 확실히 자살한 해벗 종족은 열이면 열 그 이유긴 했어. 덕분에 수도 엄청난 속도로 줄었지. 수비타 왕국에서도 놀랐을 거야. 웬 얼간이들이 손도 대기 전에 죽어 버리니.”
“그 정도로 강력한데……. 자살할 정도로 말이야.”
나디사는 남은 술을 모두 잔에 따랐다.
마시고, 또 마시고, 알딸딸한 기분을 만들고서 그를 바라봤다. 그가 두 개로 보였다.
“못하면…….”
“못하면 안 되지. 나 이자도 안 받고 갚으라는 말도 안 하고 있어.”
짠, 술이 바닥 난 관계로 빈 잔끼리 부딪쳤다.
“신이 강림하지 않길 바라며.”
“……바라며.”
“좋아, 이래야지.”
나디사는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어느 날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운명을 만나는 해벗 종족.
상대를 신으로 모시며, 상대가 버릴 시엔 자살도 서슴지 않아 스스로 멸족의 길을 걸은 종족.
히아신은 역한 게 아니라 무서운 거다. 조건도 이유도 없는 사랑이라는 건 무서웠다.
상대가 유부녀일 수도, 자신을 끝없이 혐오하는 사람일 수도, 도저히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일 수도 있을 터다.
종교에 비유한 본인의 뿌리를 부정하며 살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디사는 차가운 창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곧바로 따라온 히아신도 차가운 창에 머리를 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 밤을 보냈다. 히아신은 미소 지었다. 나디사는 웃지 않았다.
그냥, 웃고 말기엔 그가 너무 슬펐다.
* * *
주인과 친분이 있어야지만 예약이 진행되는 식당이었다.
풍경, 분위기, 손님들 수준까지, 정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아트리스.”
“응.”
“맛있어?”
“맛있어.”
마벤은 감흥 없는 아트리스를 보며 찬물을 요청해 따라 마셨다.
식탁을 두드리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모든 감정을 표현했다.
꼭대기 층에 앉아 축제의 야경을 감상하는 기회였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로사 가문의 막내딸인 그녀조차 몇 배의 돈을 얹어 주고서 얻어 낸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우울증에 걸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달콤한 고백은커녕 음식도 반을 남겼다.
후식으로 나온 디저트를 분풀이 삼아 잘게 쪼갠 마벤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뭐가 불만인데?”
“뭐?”
아트리스는 제 연한 갈색의 머리를 넘기며 그녀를 바라봤다.
드디어 저 빌어먹을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온 것이었다.
“뭐가 불만이어서 어디서 한 대 얻어맞고 온 것 같은 얼굴을 하냐고.”
맛이 어떠냐고 할 때도 쳐다보지 않더니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야지만 돌아본다.
그녀가 보낸 어떤 축제 날보다 오늘이 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