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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36화 (36/210)

36화

나디사가 자란 샤포드는 겨울이 끝날 무렵에 야간 시장을 열었다.

그게 축제는 아니었다. 각지의 상인들이 앞다투어 물건을 팔아 재끼는 전쟁이었다.

그래도 그 기간을 놓치진 않았다. 돈 한 푼 없으면서 괜히 특별 할인 상점에 들러 보곤 했었다.

앞치마 두른 세탁소 여인의 소소한 일탈이었다.

거기엔 하드락의 축제처럼 아롱거리는 불빛, 매혹적인 향수, 아름다운 연인이 없었다.

무르익은 봄날의 축제는 호숫가 시가지를 중심으로 열렸다. 이곳에선 특별히 남녀 한 쌍으로 입장을 받았다.

축제 관리인으로부터 남자 셋에 여자 하나는 곤란하다고, 될 수 있으면 찢어지라는 말을 들었다.

나디사 일행은 결국 제비뽑기로 둘씩 갈라졌다.

나디사는 그리사와 짝이 됐다. 10분을 기다려 입장한 후에 호숫가 전경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부터 뒤따라오던 두 사람은 인파에 휩쓸려 보이지 않았다.

하드락의 명물인 호수 수면에는 하얀 꽃잎이 동동 떠다녔다.

양꽃나무 수백 그루도 호수 테두리를 따라 서 있었다. 물이 맑아 가끔가다가 작은 돌 사이를 누비는 물고기도 보였다.

“나디사.”

그리사는 물고기 먹이를 파는 상인이 다가오자 물었다.

“사 볼래요?”

“먹이를?”

“역시 쓸데없죠?”

“응.”

호숫가 근처에서 먹거리나 상품을 파는 건 금지됐다.

덕분에 호숫가의 아름다운 전경을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식당은 이미 만석이었다. 노란 불빛이 은은한 창문 안은 연인들로 가득했다.

그리사는 건너편도 구경해 보자며 하얀 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너편은 선물 가게가 많았다. 바깥에서 물건을 팔 수 없다는 법을 무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상가 앞에 작은 매대를 만들어 두고 상품을 시착할 수 있게 해 두었다.

가게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말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연하게 봄을 누리는 사람들. 누군가의 동화, 누군가의 일상, 누군가의 지루함.

맞지 않는 구두가 발을 조여 옴에 따라 나디사는 입 안쪽을 지그시 물었다. 여기가 동화인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히아신은 드레스를 잘 골랐다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리 중간에 선 그리사는 신랄한 평가를 했다. 사람마다 의견은 다를 수 있다만. 이 옷이 꽤 마음에 들었던 나디사는 머쓱해졌다.

“그래.”

“하드락의 봄이 아무리 따듯해도 그 옷차림은 감기를 부를 뿐이죠.”

그리사는 검정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표정은 무표정하고 행동은 따사롭다.

나디사는 잠깐 이게 친절이란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사는 재킷을 받기 전까지 손을 내리지 않을 기세였다.

다리 위를 지나는 수많은 연인이 그들을 힐끔거리며 웃었다.

“고마워.”

천천히 나디사는 받아 낸 그의 재킷에 팔을 넣었다. 품이 커서 드레스는 전부 가려졌지만 이쪽이 마음은 더 편했다.

“식당부터 갈까요.”

“저기, 그리사.”

“네.”

나디사는 이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계산서를 앞에 두고 망신을 당하는 것보단 지금이 나을 것 같았다.

“나 돈이 없어.”

“네?”

금화가 든 주머니를 이 옷에 도저히 둘 곳이 없었다. 마벤에게 어디에 지갑을 두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나가면 알아서 해결될 거라고 말한 참이었다.

그리사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디사를 바라봤다.

나디사 또한 민망하여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차였다.

“이런 축제에 오면 자연히 남자가 내게 되어 있어요. 내가 아까 여자들의 날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몰랐어.”

“데이트도 한 번 안 해 봤나 봐요.”

“응.”

식당가 쪽으로 구두코를 돌리던 그리사는 다리를 삐끗했다.

물어본 건 자기면서 도리어 큰소리였다.

“뭐예요, 도대체.”

“뭐가.”

“나 얼마나 미안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됐어요.”

그리사는 열 받은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어느 연인들보다 빠른 속도로 다리를 건너 식당가에 진입했다.

“여기 어때요? 줄도 길지 않고.”

상의 끝에 이번 데이트는 경험자인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내걸린 메뉴판을 살펴본 그리사는 주저 없이 한 식당을 골랐다.

“응, 난 괜찮아.”

길 잃은 시네라를 만난 건 20여 분 정도 대기했을 즈음이었다.

사람에 치이고 다니던 당근 머리를 그리사가 불러세웠다. 히아신은 없었다.

“다행이다. 너, 너희를 찾아서.”

“히아신은요.”

“중간에 갑자기…….”

“여긴 자리가 두 사람밖에 앉을 수가 없어서 식당을 옮기거나 한 사람이 빠져야 되겠어요.”

“아, 정말? 어, 어쩌지.”

“만약 빠진다면 뒤늦게 끼어든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사는 우아한 어조로 꺼지라고 말했다.

나름의 억울한 사연을 가진 시네라는 히아신을 자의로 놓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네라는 여기서 쉬어. 어차피 줄도 기니까 내가 찾아서 올게.”

“하…….”

식당 입장을 코앞에 두고 난처해졌다.

그리사는 목울대까지 올라온 짜증을 삼켰다. 한 발자국 걸어 나와 자리를 뒷사람에게 양보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만 정말 그렇게 말해서 짜증이 나네요.”

기분이 가라앉은 그리사는 느릿느릿 타이를 풀었다.

시네라는 눈치 보며 걸음이 느린 본인 탓을 했다.

“시네라. 어디서부터 안 보였다고요? 그 인간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던 그리사였다. 인파의 홍수 속으로 들어가는데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시네라가 히아신을 목격한 지점에서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다.

찾든 찾지 못하든, 호수 뒤편에 있는 시계 앞에서 정확히 30분 뒤에 만나기로 했다.

* * *

축제의 규모와 면적을 너무 만만하게 본 탓이었다. 나디사가 길을 잃는 데엔 고작 5분이 걸렸다.

남자 재킷을 입고 애처롭게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몇 번의 추파도 있었다.

“파트너가 없으시면…….”

“있어요.”

두세 번 겪다가 보면 거절도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히아신을 찾지 못하면, 적어도 아트리스나 마벤, 아니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라도 찾고 싶었다.

일직선으로 걸어온 죄밖에 없었다. 모자 쓴 신사들에게 밀쳐져 강제로 언덕길을 내려왔다.

그사이 시계탑으로 가는 길을 놓쳤다. 이리저리 떠밀려 골목길을 통과한 것이었다.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나디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사의 향이 짙게 묻은 재킷을 여미며 빈 벤치에 앉았다.

혹시 몰라 시네라가 챙겨 준 소책자가 유용하게 쓰였다. 책자 마지막 페이지에 길치들을 위한 호숫가 지도가 있었다.

“저기요.”

“네?”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의 눈에 하얀 셔츠가 보였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 셔츠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셔츠의 주인이 은발이기 때문이었다.

“그 책자 좀 볼 수 있을까요?”

“보고 여기 두세요.”

그녀는 말을 건 남자에게 소책자를 빌려주고서 일어났다.

하얀 셔츠의 주인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빛이 들지 않는 골목길 귀퉁이에 서 있었다.

“히아신.”

건물 그늘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까만 후드를 뒤집어썼다.

허리 곡선과 신장으로 보았을 때 여자로 추정됐다. 저도 남자라고 축제 날을 시네라와 보내기 싫었던 건가.

나디사는 골목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응?”

“아…….”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 분명 남자는 히아신으로 보였다. 은발에, 흰색 셔츠.

하지만 남자는 모자를 쓴 금발의 신사였다.

“안녕, 아가씨. 나한테 볼일 있어?”

“아, 아뇨.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이대로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뵈는 남자는 그녀 앞에 다리를 걸었다.

“파트너는 없어 보이는데.”

“있어요.”

“거짓말하면 못써, 아가씨. 마침 나도 없는 쪽이어서.”

까딱하다간 일을 칠 듯싶었다. 뒷걸음으로 골목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 콱 닿는 사람이 있었다. 익숙한 체격,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오감을 자극했다.

“여기 있다니까. 좀 믿어 주라. 이렇게 예쁜 여자가 파트너 없을 리가 없잖아.”

기대있던 몸을 떼고 뒤돌아보았다. 윙크를 날린 히아신이 소유권을 주장하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자를 쓴 신사는 똥 밟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서 가버렸다.

파트너가 나타나니 포기하는 게 다행이랄까.

“히아신, 찾아다녔어.”

“나도.”

히아신은 자연스레 인파 속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순식간에 서로 오가던 말소리가 묻혔다.

“시네라는 왜 두고 다닌 거야?”

“잘 안 들려, 어, 표정 풀어. 진짜로. 저기 가자.”

히아신은 작정한 것처럼 한 상점 앞으로 갔다. 다양한 향수가 진열되어있는 선물 가게였다.

그는 시향하라고 둔 초록색 병 하나를 집었다. 그때까지 손 하나는 그녀의 어깨에 두른 상태였다.

“이제 들리지. 왜 시네라는 두고 갔어.”

“무서워서.”

누가 들으면 시네라가 유령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뚜껑을 열어 향을 맡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을 당한 건가 싶어서 조금 심각해지려는 차였다.

시향을 끝낸 히아신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걸 돈 받고 파네?”

하지만 말과 달리 히아신은 예의 있게 웃으며 향수병을 내려놓았다.

“뭐가 무서웠는데.”

“아, 맞다, 그 얘기 중이었지.”

히아신은 또 말을 하다가 말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와다다 뛰었다.

“히아신!”

“내 운을 믿어 봐, 디디. 알았지?”

“뭐?”

달려간 그는 식당 메뉴판을 살펴보는 연인 앞으로 끼어들었다. 식당 직원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그가 선수 치듯 물었다.

“자리 있나요? 오늘 애인 생일인데.”

“네? 아, 네……. 한 자리.”

“고마워요.”

메뉴판만 보고 들어가려던 연인은 졸지에 뒤로 밀려났다. 히아신은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때 창가 자리의 연인이 자리를 떴다. 안내를 돕던 직원은 생일이라는 말에 그 자리를 권했다.

얼렁뚱땅 식당 창가 자리를 점령한 게 믿기지 않았다.

직원이 따라 주는 물을 상큼한 미소로 받은 히아신은 승자의 여유를 즐겼다.

“나 생일 아닌데.”

“생일 같은, 특별한 날. 그게 생일이지.”

“무섭다는 게 뭔데.”

집요한 나디사의 질문에 히아신은 대답할 마음이 드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나디사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상체를 약간 숙였다.

식탁 위에서 만난 그의 입술은 은밀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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