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난 걔가 첫 만남부터 싫었어.”
마벤은 파티션 뒤에서 스타킹을 신으며 투덜거렸다. 마벤이 말한 ‘걔’가 누구를 칭하는지는 뻔했다.
마벤은 아트리스에게 관심이 있다며 지난밤 스스로가 고백해 왔다. 당당함과 불안이 적절하게 더해진 목소리였다.
‘아트리스에게 관심이 생겼어.’
‘그래?’
‘너도?’
마벤이 묻고팠던 건 그것일 거다. 혹시 아트리스를 두고 싸우게 되는 거 아니냐고.
그 어처구니없는 짐작에 나디사는 웃음 지었다.
‘아니.’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나디사는 첫 만남부터 아트리스와 앙숙처럼 싸우던 그녀를 기억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별로 안 좋아했잖아.’
마벤과 그녀는 거의 끝과 끝에 누워 있었다. 할 말이 별처럼 많은 마벤은 몸을 굴려 단숨에 옆으로 왔다.
‘입술이…….’
‘…….’
‘너무 키스하고 싶게 생겼어.’
그냥 들어 주기엔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나디사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돌아눕는 그녀의 등을 마벤은 콕콕 찔러 댔다.
‘야. 나디사. 야.’
‘잘래.’
‘들어 봐! 누구한테도 말 못 하겠단 말이야. 아니, 나를 업어 주는 등이 너무 넓은 거야. 그리고 걔가 딱 돌아보는데 입술이…….’
그렇게 밤새 마벤의 흠뻑 빠진 마음을 일부터 백까지 들은 나디사는 다음 날 눈이 퀭해져 있었다.
마벤은 이번 축제에 거는 기대가 컸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 줄 거라며 드레스만 다섯 벌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하필 축제를 얘기하는 자리에서 히아신이 찬물을 끼얹었으니.
마벤이 싫어하는 ‘걔’는 보나 마나 히아신일 거다.
“멸족당했다는 그 얘기를 그렇게 가볍게 꺼내는 것부터 말이야. 아빠는 실수했다고 생각해서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구.”
따듯하게 우려낸 차로 잠을 물리친 나디사는 어제저녁의 히아신을 생각했다.
멸망을 입에 담는 입술과 평화로운 눈의 부조화 같은 것을.
“꼭 축제를 망치기로 작정한 것처럼! 미리 알려 줬으면, 아빠가 그런 질문하지 않게 할 건데.”
“말하기 싫었겠지.”
“그럼 어제는 왜 말한 건데?”
아무리 매사 유쾌한 그라도 그런 주제에서까지 유쾌한 건 아닐 거다. 그러는 척할 뿐이지.
어저께 너무한 것은 대답하라고 압박을 넣은 헤번 경이었다.
“그나저나 마벤. 옷은 그걸로 결정했어?”
“너무 꾸몄나?”
“잘 어울려.”
노란색의 화사한 드레스는 무릎을 덮는 적당한 길이였다.
부푼 어깨 소매와 레이스 장식으로 된 반팔은 이 따듯한 봄날에 더할 나위 없었다. 치마 끝에 수놓아진 노란 국화가 마벤의 금발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너는?”
“나?”
“세상에, 그럼 군복을 입고 간다고?”
“아, 나는 됐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벤은 말을 쉬는 중간중간 그녀 쪽으로 드레스를 하나씩 집어 던졌다.
봄꽃 색깔의 드레스에 덮인 나디사는 웃으며 그걸 치웠다.
“어울리지 않을 거야. 이런 거 입어 본 적 한 번도 없어.”
“옷이 어울리지 않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입어 본 적 없어서 어울리지 않는 법은 없지.”
마벤은 달려와 의욕 없는 나디사의 손목을 잡아서 끌었다.
“여기가 내 집이라는 걸 잊지 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너는, 오늘, 못 나가.”
마벤은 농담이 아니라며 그녀를 파티션 뒤로 데려갔다. 갈아입을 드레스도 건네고서 말이다.
마벤의 말을 얼마쯤 가볍게 생각했던 나디사는 설마 세 시간째 감금당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게 여자의 기쁨이라는 마벤의 말을 정정해 주고 싶었다.
이건 여자의 감옥이었다.
* * *
남자들의 준비는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군인인 그들은 가지고 온 정장이 없어 로사 가문의 것을 대여해 입었다.
그마저도 그리사와 아트리스, 시네라는 주는 대로 입었지만 히아신은 들어가 몇 번이고 옷을 재주문했다.
손님으로 와서 그만한 배짱이 있는 게 감탄스러웠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온 히아신은 단출한 하얀 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었을 뿐이었다.
타이는커녕 목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않고 나온 그를 보며 기가 막혀 하는 건 당연했다.
“들어가 옷 갈아입기만 수십 번 하다가 나왔나?”
아트리스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트리스는 웬만해선 히아신을 무시하는 쪽이었다. 히아신 쪽이 반응이 세면 셀수록 흥분하여 날뛰는 성격이라 그렇다.
지금도 봐라. 그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이 재킷을 어깨에 대강 걸치고 있었다.
“영 옷들이 별로지 않아? 있는 집이라서 기대했는데.”
이 집안 사용인이 돌처럼 널린 곳에서 입을 잘못 놀리고 있었다. 아트리스가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세상에, 아가씨.”
지나가던 하녀가 저택의 현관 쪽을 바라보며 감탄을 마지않았다.
30분째 두 숙녀를 기다린 남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를 따랐다.
노란 꽃 한 송이가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군복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던 마벤의 외모는 날개 돋친 듯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는 뒤에 따라오는 이의 수줍은 얼굴이 뜻밖인지라.
무릎 위로 올라오는 과감한 드레스는 요즘 유행하는 종류였다. 연보라색의 치마에 허리선은 하얀 끈으로 가볍게 묶어 두었다. 그와 맞춤으로 만든 하얀 리본 끈을 머리에 맨 나디사는 걸음이 경직되어 있었다.
마벤은 새끼 오리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디사의 등을 밀었다.
“빨리 가 봐, 공주님.”
마벤의 농담 같은 말에 나디사는 더더욱 굳어 갔다.
마벤은 머뭇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자, 신사분들.”
마른침을 삼킨 남자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전까지 볼 수 없었었던 묘한 긴장감이 정원에 넘실거렸다.
“누가 에스코트해 줄래?”
마벤은 나디사의 손목을 흔들며 흥정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디사는 쓴 미소를 지으며 이 철부지를 말렸다.
“그만해.”
“그럼 우리 여섯 명이서 떼로 몰려다니자고? 세상에. 우리가 무슨 집단 폭력배들이니?”
마벤은 헛기침하며 아트리스 쪽으로 슬쩍 발을 옮겼다.
“나랑 같이 갈래?”
“……내가?”
“너는 수장이니까 여기 지리를 제일 잘 아는 내가 맡는 게 맞잖아? 안 그래?”
에스코트해 줄 사람을 구한다면서 수장을 들먹인 이유는 다들 알 것이다.
하지만 아트리스의 솔직한 시선의 끝자락은 연보라색 치마 끝에 붙어 있었다.
감이 빠른 마벤은 반강제로 그와 팔짱을 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우리 간다?”
“마벤!”
잡은 팔을 마차로 잡아끈다. 축젯날 여자의 손을 뿌리칠 만큼 매너 없는 놈이 아니라는 계산까지 마쳤을 거다.
멀뚱히 서서 납치극을 보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마차를 기다려야 했다.
집사가 불러 준 새 마차는 신속히 저택 앞으로 오고 있었다.
나디사는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맨 팔뚝을 쓸었다. 지금이 초여름이 생각나는 봄날이라지만 이건 노출이 심하다 싶었다.
“나디사!”
달빛에 짓눌린 듯 숙여 가던 나디사의 고개가 올라왔다. 재킷을 어깨에 걸친 히아신이 엄지를 들었다.
“잘 어울린다. 최고.”
“……고마워.”
“음, 마벤 로사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안목은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너도 잘 어울려, 그 옷.”
“네가 고른 거면 방금 로사 양에게 한 칭찬은 취소하고.”
“아니야. 마벤이 골라 준 것 맞아.”
히아신은 그럼 됐다는 듯이 눈썹을 찡긋거렸다.
나디사는 자신 없이 내리깔리는 눈을 탓하고 있었다. 아마도 옷을 여러 번 갈아입느라 눈이 피로한가 보다.
“저희는 어쩔까요.”
“나는, 둘보다는 여럿이 좋은데.”
그리사는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 내부에서 연애라니. 들이대는 마벤이 대단한 건지, 그 와중에 꼬신 수장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요. 둘 다 인가.”
“아, 아트리사 꼬셨어?”
“의식한 건 아니겠지만요.”
마벤의 짝사랑은 발톱 내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한 마벤의 얼굴이 떠올라 나디사는 작게 웃고 말았다.
“그러면 저쪽은 데이트. 우리는 호위 기사로 할까?”
장난스러운 히아신의 말에 웬일로 두 남자가 수긍했다.
“축제는 원래 여자들의 날이니까요. 맞춰 줘야죠.”
“옷, 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나디사.”
주위에서 간지러운 말을 쏟아 내는 통에 나디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마운데, 우리 이제 그만 가면 안 될까. 창피해서.”
하지만 호위 기사 놀이하며 그녀를 창피하게 만드는 것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그만큼 그녀의 발그레한 뺨이 연보라색의 드레스와 어울렸다.
그건 영영 남자들끼리의 은밀한 비밀로 남겨 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