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랭키 웨던은 그들을 배웅하지 않았다. 비상시에 쓰게 식량과 여분의 물을 챙겨 가라고 했을 뿐이었다. 이별하는 방식도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성에서 그들을 배웅한 건 로피뿐이었다. 마지막까지 기쁨을 주는 로피와 청색의 바다를 오래 기억할 듯싶었다.
출발한 지 반나절 만에 작은 성을 떠나 서부의 중심가로 날아왔다.
하늘 길은 웬일로 비나 폭풍 없이 맑았다. 수비타 왕국에서도 따듯한 편인 서부는 봄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과일나무와 들꽃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어때?”
서부로 들어와서도 몇 시간을 더 날아가자 산자락과 시가지 중간에 자리한 로사의 저택이 나타났다. 가문의 위엄을 알리듯 희귀종의 꽃으로 무장한 대문은 돈을 써서 관리받은 태가 났다.
미리 연락을 받은 집사가 제시간에 하녀를 대동하고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봉급이 비싸 웬만한 집에선 두지도 못한다는 집사 학교 출신의 그 사람인 듯했다.
나디사는 집사 학교라는 게 있었는지 몰랐지만, 그 또한 마벤이 자랑하여 알게 된 사실이었다.
봄꽃을 적절히 섞어 조경된 정원을 지나 천사가 오줌 누는 석상과 분수대 길로 접어들었다.
저택 앞에는 마중을 나온 로사 가문의 가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주는 멀리서 봐도 골격이 튼튼하고 풍채가 좋았다. 사툰 종족 특유의 금발을 하고 있는 그는 라드군을 따듯하게 맞아 주었다.
“오, 이럴 수가! 막내딸!”
“아빠!”
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을 때만 해도 도도한 아가씨 같던 마벤은 제 아버지를 보자마자 돌변하여 촐싹거렸다. 달려가 아버지에게 안긴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오, 이런. 헤번 경.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설렜는지! 우리 마벤을 보고 싶어서 밤마다 잠도 설쳤답니다.”
“그러십니까.”
헤번은 편의를 제공해 준 로사 가문의 가주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화기애애한 안부 인사와 함께 악수를 나누었다. 이후 헤번은 장롱처럼 서 있는 다섯 사람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마벤 양과 같은 발톱 부대에 있는 이들입니다.”
“오, 이런, 세상에.”
가주는 악수를 풀고서 석고 계단을 총총 내려왔다. 반갑다며 한 사람, 한 사람씩 끌어안았다. 사교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언제나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 면회도 안 된다고 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빠.”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군요. 앞으로도 종종 이 근처에서 임무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말이죠.”
“아빠!”
마벤은 말이 많은 아버지가 부끄러운 듯 뺨이 붉어져 있었다.
“이제 막 도착했다고요.”
“아, 맞아. 이런, 내 정신 봐봐. 손님들을 너무 세워 뒀군. 세비!”
유능한 집사는 인사하느라 까먹은 시간만큼 빠릿빠릿하게 손님들의 짐을 들어 안쪽으로 안내했다.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가주를 보자 고단한 장거리 여행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마벤과 닮아 더 정이 가기도 했다.
마벤은 나디사와 함께 붙어 이동하며 종알거렸다.
“가끔 주책이란 말이야. 내가 막내딸이라고 너무 챙기려 들고.”
“좋아 보이는데.”
“좋아 보이긴, 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벤의 눈에는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나디사는 그 이후로도 마벤의 자랑에 맞장구쳐 주며 그리움을 삼켰다.
나중에 다 같이 샤포드의 집으로 놀러 가는 날도 올까.
멋대로 집 나갔다가 멋대로 왔다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줄 부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따라 더 보고 싶었다.
* * *
입맛 까다로운 그리사가 점심 식사를 맛있게 했다는 말을 전했다. 안 그래도 높던 마벤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거봐, 내가 뭐랬어. 맛있다고 그랬지?
침구가 좋다는 아트리스의 말에는 거의 날아갈 기세로 호호 웃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부대에서 쓰는 침구는 거지 같다고 했지?
나디사는 초반에 그녀가 침구와 서랍을 가져와 바꾼 것이 이해되는 차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그 성탑의 방은 돼지우리에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아, 맞다. 헤번 경.”
“네, 가주님.”
몸통의 수장인 헤번은 식사 자리에만 같이할 뿐, 좀처럼 발톱 부대의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저택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가주와 함께 담배를 태우는 그를 마주칠 뿐이었다.
그는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대신 고개만 까닥이는 수준으로 아는 체를 했다. 발톱 부대 중 그를 좋아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내일 하드락 최고의 축제가 열리는데. 모레 떠나시니까 한번 들리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머, 하드락 축제가 벌써 내일이에요?”
“그렇단다, 달링.”
저녁 식사를 끝내고 술을 곁들여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일행은 손님의 입장이었고, 더군다나 라드들이 끼니마다 해치우는 고깃값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갔기에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거의 가주 혼자 이어 가는 대화의 끝에서 딸의 윗선인 헤번 경에게 축제를 권한 것이었다.
헤번은 거의 외워 둔 것처럼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제 라드도 아파서 마음이 쓰이구요.”
“아, 저런. 그렇겠군요. 의사가 붙었는데 차도가 있어야 할 텐데요.”
“그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겁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나디사가 본 헤번의 라드는 상태가 매우 나빴다. 헤번이 이 일정 내내 표정이 어두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겠지.
“그럼 우리 막내 공주님 동기들은 어떻습니까? 청춘인데요. 가서 즐기시죠. 저희 가문에서 노시는 비용은 일절 들지 않게 할 테니까요.”
“아빠도 참…….”
마벤은 주책맞다고 타박하면서도 가고 싶은 눈치였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아트리스의 발목을 마벤이 톡 건드렸다.
식탁에 고정되어 있던 아트리스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그, 수장이, 얘기해야지? 가도 되는지, 마는지, 크흠.”
“축제?”
축제를 즐기기 좋은 날이지만 좋은 시기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심사숙고하는 아트리스의 눈빛이 나디사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는 이름 모를 노란 과일이 입맛에 맞아 혼자 두꺼운 껍질을 까느라 열심이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내려앉던 그의 눈동자가 확신의 빛을 품었다.
“어차피 모레면 복귀인데. 나가서 놀고 싶은 사람은 놀고 와.”
“전 됐어요. 사람 많은 곳은 불편해요.”
그리사의 초 치는 발언으로 마벤의 눈은 심술이 올랐다.
“그리사 데이. 우리는 한 부대니까 한 몸이나 다름없어. 한 명만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축제가 임무도 아니고. 그럴 생각은 없는데요.”
“하! 진짜. 나디사. 너는 갈 거야?”
노란 과일을 포크에 줄줄이 꿴 나디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뭐가 있긴! 축제가 별거야? 다 비슷비슷하지.”
“난 축제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충격적일 정도로 덤덤한 말에 마벤은 할 말을 잃었다. 축제 반대파였던 그리사조차 표정을 달리했다.
“마벤의 말이 맞아요. 축제는 다 비슷비슷하니까 이참에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뭐야. 그리사 데이. 너 내가 말할 때는 안 간다더니?”
“간다는 말이 아니라…….”
“나디사? 지금 의리 없이 그리사가 빠지려고 하는데?”
마벤의 공격에 그리사는 끄응, 하며 딴청을 피웠다. 앙숙같이 싸우지만 은근히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아트리스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잔을 기울였다.
마벤은 그가 축제에 갈 거라고 확신했다. 갈 생각이 없다면 진즉 선을 그었을 성격이니.
투닥거리는 막내딸을 흐뭇한 눈으로 보던 로사 가문의 가주는 문득 식탁 맨 끝자리에 자리한 이를 훑었다. 포크로 과일을 굴리고 있는 히아신에게로 말이다.
“저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가주의 질문에 외딴섬 같은 히아신에게로 이목이 집중됐다.
이 자리가 지루하다고 얼굴에 써져 있는 히아신이 그나마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히아신입니다.”
“오, 혹시 어느 종족이신지?”
식탁에 정적이 찾아왔다. 수비타 왕국에선 흔한 질문이었음에도 분위기가 살얼음판 저리가라였다. 가주는 조금 당황한 참이었다.
“내가, 무슨 무례한 질문을 한 건가?”
“아니요, 무례하지 않았어요. 가, 주, 님. 여기 사람들이 좀 진지해요, 원래.”
지금껏 히아신이 자신의 출신지나 종족에 대해서 사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그가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듯해서 차마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정작 히아신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괜한 기우였나 싶었다.
“그럼 대답해, 히아신 아스. 가주님의 질문이니.”
헤번은 남의 사정 따윈 관심 없다는 듯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잔을 기울였다.
그 명을 따른 히아신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해벗 종족입니다.”
“해벗?”
“네, 해벗.”
가주는 눈을 굴리며 좌우를 살폈다. 혹시 아는 사람 없냐는 표정이었다.
“소수 종족이 워낙 많아야지. 처음 들어봐서.”
“그럴 수 있죠.”
“하하, 그렇지요?”
“멸족했거든요.”
접시를 나르던 하인의 손이 미끄러졌다. 쨍그랑, 접시 깨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내부에 어색한 공기가 정체되었다.
마른 과일을 씹고 있는 히아신만이 발랄했다.
“거봐, 내가 이래서 말 안 한다니까.”
제가 불러온 분위기를 즐기던 히아신의 시선이 나디사에게 머물렀다.
누구도 수습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그녀는 수많은 감정을 참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 괜한 걸 물어서, 내가, 하하.”
로사 가문의 가주는 선약이 있다며 자리를 파했다.
창문으로 축제 이야기로 들뜬 웃음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실내는 마른 과육을 씹는 소리만이 장황했다.
어둠과 빛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