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라넌 샤스는 꿈을 꿨다.
아주 오래된 꿈이었다. 현실과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꿈속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늙지 않는다. 언제나 청춘에 머물러 있다.
어찌 보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참 오래도록 그 얼굴을 잊지 않았다.
“라넌 님.”
“응.”
그 꿈을 꾼 날이면 어쩔 수 없이 하루는 지옥이 된다.
꿈속에서의 감정과 현실에서의 감정이 첨예하게 달랐다. 꿈속의 행복하고 그리운 감정은 깨어나면 증오와 후회로 바뀐다. 그 감정들은 뒷맛이 좋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쓰는 걸 수도 있었다. 라넌은 짧게 자른 금발을 손으로 빗으며 일어섰다.
“랭키 웨던이라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더군요. 현재 랭키 웨던은 남서부 지역에…….”
“그 사람이 누군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서.”
“내용까지는 확인 못 했습니다. 남서부로 사람을 보내 볼까요?”
수비교의 신관들은 오만한 나머지 저들에게는 미행이나 첩자를 못 붙인다고 믿었다.
이처럼 엊그제 두 번째 신관이 무얼 잡수셨는지까지 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거울 앞에 선 라넌은 헤어크림을 손에 묻히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 떨거지들이 뭐 하고 있는지, 남서부에서. 당장 올라오라고 해. 놀다 오라고 보내 준 것 아니니까.”
그녀의 스승은 성격이 괴팍했다. 그 자신도 사툰 종족이면서 사툰 종족에 엄하고 다른 소수 종족에겐 친절한 편이었다.
친절하다는 기준은 모두에게 다르다고 하면 할 말 없다만. 라넌이 봤을 때 그 노인은 사툰 종족인 본인을 혐오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남자가 죽은 제자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봤으니 어떻게 나올까.
그 전장의 귀재라고 불리던 랭키 웨던은 남서부 작은 마을에서 노후를 보낸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걸 누가 믿겠나.
그녀가 알고 지내온 스승은 그렇게 만만한 작자가 아니었다.
아마 라넌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알아서 물어다 줄지도 모른다.
“자. 시작하자구.”
그녀는 심장으로서 자신의 발톱을 떼어 내고 깎아 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야 더 좋은 발톱이 자라날 테니.
* * *
뜻하지 않은 상황에 나디사는 긴장하고 말았다. 노크하고 들어가면 될 일인데도 말아 쥔 손은 문 근처에서 떨어졌다.
히아신 아스. 오늘 저녁 식사 당번은 그였다.
랭키의 시험에서 큰 부상을 당한 히아신은 한동안 훈련에도 나오지 못했다. 랭키도 내심 미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히아신은 내일부터 연습에 참여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니 그 일이 있던 후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란 소리였다.
히아신은 치료를 위해 아직 작은 성의 침실은 혼자 쓰고 있었다.
오늘 저녁을 함께 먹고 해변가 오두막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결심을 굳힌 나디사는 굶고 있을 동료를 생각해 주먹으로 문을 쿵, 두드렸다.
혹시나 자고 있으면 어쩌지.
열 번 못 하던 놈이 한 번 잘하면 그게 그렇게 인상 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부대를 손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었다.
발로 아트리스를 밀치고 제가 대신 화살을 맞은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다녀도 속은 깊은 사람인 걸까 싶다.
나디사는 대답이 없는 문을 살며시 밀어 보았다.
작은 방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는 히아신이 보였다. 책으로 눈을 덮고 있는 그는 상반신을 벗은 채였다.
히아신이 노출증에 걸린 게 아니라면 아마 치료 목적일 것이다.
어깨에 감긴 하얀 붕대를 보니 새삼 랭키 웨던이 진짜 미친 늙은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히아신.”
나디사는 자고 있는 그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다친 그의 팔을 살며시 흔들며 깨웠다.
“일어나. 식사해야지.”
“음…….”
히아신은 잠투정하듯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눈을 덮은 책이 떨어져 모서리가 바닥에 통통 튀었다.
그 책은 히아신의 것이 아니었다. 또 아트리스가 읽던 책을 훔쳐 와 눈가리개로 쓴 모양이었다.
두꺼운 교리책이 뭐가 그리 좋다고 매번 훔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책을 뺏긴 아트리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악동 같은 히아신과 교리책은 제법 어울렸다.
“히아신. 일어나.”
책을 치우며 드러난 그의 맨얼굴을 말없이 감상했다.
반듯한 눈 모양이 소년 같으면서도 손과 발, 남자다운 얼굴선을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진심으로 피곤한 모양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쉬이 잠에서 깰 것 같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일에 10분을 할애한 시점이었다.
그동안 나디사는 기억 안 해도 될 것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뺨에 눌린 그의 입술이라든가.
당연히 그게 장난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히아신이 치는 장난은 정상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건…….
“아.”
“……왜 그래.”
곤히 자던 히아신이 갑작스레 제 어깨를 잡고서 앓는 소리를 냈다. 구슬 같은 땀이 턱으로 떨어지고 붕대로 싸맨 어깨를 부여잡았다.
치료를 끝내고 돌아간 의사를 다시 불러야 하나. 아니면 찬물이라도 떠 줘야 하나.
랭키에게 가서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할 무렵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
“나디사…….”
“지금 가서 의사 불러올게.”
“나…….”
“걱정 마. 괜찮아질 거야.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고 그랬어.”
“배고파.”
그의 손을 잡고서 자상한 목소리를 내던 나디사는 한순간 기운이 빠졌다.
일부러 연출한 사람처럼 히아신은 웃으며 눈을 사르르 접었다.
“식사 가져와서 나 떠먹여 주면…….”
“나 혼자 갔다 올게. 넌 쉬어.”
걱정되는 마음에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버리듯 놓았다.
넘실거리던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차오르는 건 이유 모를 분노뿐이었다.
자신은 진지한데 그는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숨이 걸린 일임에도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그가 싫어지려고 했다.
화가 난 나디사는 말도 하지 않고서 침실을 나섰다.
계단을 쿵, 쾅, 소리를 내면서 올랐다. 얼마 안 가 매우 급히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디사!”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있는 히아신이 손을 흔들며 쫓아오고 있었다.
나디사는 뒤도 안 보고 식당이 있는 곳까지 무작정 전진하는 중이었다.
“같이 가. 같이 가.”
“나 혼자 갈게.”
“나는 식사가 없어, 그럼? 아니면 정말 떠먹여 주려고?”
잠시 안 본 새 그에 대한 평가 점수가 많이 올랐나 보다. 이제 보니 그는 변한 게 없었다.
동료가 걱정할 것을 알면서 그런 철없는 장난을 치는 이가 어디 있냔 말이다.
그것도 재미로, 오로지 재밌어서.
“놀려서 화났구나.”
“하…….”
“나디사가 화가 났으니까 나는 무얼 해야 될까? 사과?”
“입 다물고 있으면 돼.”
그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히아신은 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입을 막고 뒤따라오고 있는 남자를 모른 척하며 나디사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저희 저녁 가지러 왔어요.”
“아, 여기 있습니다.”
요리사 복장을 한 남자가 커다란 트레이 하나를 내주었다.
오늘 저녁은 빵에 고기를 끼운 것인가 보다. 조리가 간단하면서도 열량이 높아 좋았다.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히아신이 솔선해서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용서하라는 듯이 눈웃음 짓는 그를 지나쳐 나디사는 먼저 식당을 빠져나왔다.
사람한테 화를 내거나 미워해 본 적은 없었다.
친모조차도 단절된 세월이 길어서 그렇지, 그녀 자체에 대한 감정이 넘친다고 할 순 없었다. 이 경우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서 그런 것도 있다.
그래서 히아신의 말과 행동에 감정적으로 구는 자신이 낯설었다.
푸른 바다를 낀 해안으로 가는 길목.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히아신은 콧노래를 불렀다.
잠시도 소리를 내지 않으면 못 참는 사람처럼 구는 그를 두고 나디사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해변가에 식탁을 차리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트레이를 들고서 다가오는 히아신을 보는 이들의 표정이 각기 다양해서 재미가 있었다.
“옷을, 어디다 팔아먹었니?”
“추, 춥겠다.”
식기를 세팅하던 그리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디사에게 물었다.
“식사 메뉴는 뭐예요?”
“빵에 고기 넣은 거.”
“질리네요, 정말.”
“그게 무난한 거라서 그런가 봐.”
“차라리 우리가 직접 만들었을 때가 맛은 더 나았어요.”
그리사는 귀한 집안에서 자란 게 틀림없었다. 여기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이 그 나이대 남자애 같아 귀여웠다.
아트리스는 자리에 앉아 가져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는 틈에 도착한 히아신은 트레이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눈을 찡긋거렸다.
“히아신. 내일부터는 너도 훈련이니까 푹 쉬어. 비켜 줄 테니 안쪽 침대에서 자.”
간단히 침대 자리를 정해 준 아트리스는 먹음직스러운 빵을 들다가 말았다.
말문 막힌 시선이 자리에 앉아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히아신을 향했다.
“왜 답이 없지?”
하나둘씩 자리에 앉아 제 몫의 빵을 집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모두의 시선은 점점 말없이 웃고만 있는 히아신에게 닿았다.
“머리 다친 건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요.”
히아신은 킥킥 웃으며 손가락으로 나디사를, 그리고 제 입을 가리켰다.
“나디사가 입술을 때렸구나!”
“화, 환자인데?”
“나디사, 잘했어.”
조용히 빵을 씹고 있던 나디사는 하지도 않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됐다.
턱을 괴고 앉아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히아신은 난감했고. 하필 맞은 편에 앉아서 저런다.
제 말이 아니면 입술을 벌리지도 않겠다고 하는 유의 장난이었다. 역시 그에게 화를 내면 자신의 손해였다.
빵을 마저 삼킨 나디사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먹어. 말도 해도 돼.”
“왈!”
히아신이 크게 짖자 앉은 사람 중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네라는 목에 빵조각이 걸려 켁켁 기침까지 했다.
“둘이 뭐야. 아으, 막 그러고 놀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식사나 해, 마벤.”
“뭐, 뭐야…….”
아트리스의 냉정한 말에 마벤은 멋쩍어하며 수그러들었다.
나디사는 빵을 먹으면서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히아신 아스를 끝까지 무시했다.
피했음에도 느껴졌다. 그리고 어쩐지 그게 싫지 않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