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디사는 무거워진 막대를 왼편으로 휘둘렀다.
명을 받은 바람이 앞으로 나아가며 뿌리 깊은 나무를 제거했다.
“으, 아!”
“잡아!”
구차하게 칼을 꺼내 들고 있던 좀도둑들은 지렁이처럼 땅바닥에 붙었다.
무색무취의 바람이 아니었다. 백전백승을 거둔 라드군의 바람은 사람의 살갗을 갈았다.
흙과 풀을 쥐고서 버티는 그들의 몸이 깃발처럼 팔랑거렸다. 허리와 손에 들고 있던 칼들은 숲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악귀처럼 달빛을 가린 라드의 그림자는 사람의 공포심을 건드렸다.
“아, 아악!”
서로 얼싸안고 버티던 수하 하나가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통곡에 가려졌다.
수하는 도망치지 못하고 그 나무에 짓눌려 있었다. 바람이 워낙 강하여 옴짝달싹도 못 하는 터다.
숲이 초토화되는 동안 나디사 피를 물처럼 삼켰다. 막대한 힘을 가져다준 막대는 그 값을 매 순간 확실히 치렀다.
등 뒤에 있는 라드와 정신이 동화되고 있었다. 영혼과 영혼이 뒤섞이는 과정에서 몸은 역으로 버티려고 하니 문제다.
골격 구조, 피부, 신장, 뭐 하나 같은 게 없는데도 영혼의 동화가 강해지면 사람을 라드로 바꾸려고 했다.
“멈춰! 이 이상으로 힘을 내면 폭주할 수 있어!”
실제 그녀는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적을 쓸어 버리기 위해 보낸 바람은 아군에게까지 번지고 있었다.
숨결의 영향을 받은 라드들이 흥분하여 날아오르고 있었다.
로마는 숨결을 내뱉고, 또 내뱉다가 배를 내밀며 하늘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폭주한 라드가 피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트렸다. 동화된 나디사의 눈에도 피가 흘렀다.
“나디사!”
“그만둬! 나디사 마로닌!”
랭키 웨던은 뻣뻣한 나뭇가지처럼 뻗은 나디사의 손목을 잡고 아래로 내리눌렀다.
노장의 힘을 다하여 손의 방향을 바꾸자 바람은 땅으로 꺼져 갔다.
다정하면서도 무절제한 바람이 제 곁에서 떠나고 있었다. 나디사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로마가…….”
연결되어 있던 로마 또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새빨간 눈이 차츰 원래의 빛깔을 찾기 시작했다. 동화가 풀린 주인은 맥없이 고꾸라졌다.
“읏.”
쓰러지는 나디사의 무게를 받은 랭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라드를 피해 달음박질했다.
정신 잃은 나디사의 무게를 거뜬히 안고 달렸다.
쿵, 떨어진 라드와 나디사는 그길로 잠들었다. 랭키 웨던은 엎드린 그녀의 몸을 돌려 눕혔다.
영광스러운 달빛은 눈가에 남은 핏자국을 낱낱이 보여 주고 있었다.
“티사.”
나지막이 죽은 제자의 이름을 부른 랭키는 손을 올렸다. 사심 없이 핏자국을 닦아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탁, 그의 손이 잡혔다.
감히 그를 막은 손의 주인은 어깨 쪽에 화살이 꽂혔는데도 그 흔한 신음 한 톨이 없었다.
은발의 남자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서 물었다.
“개는 안 찾아?”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랭키 웨던은 장례식 분위기가 된 숲속을 둘러보았다. 전례 없는 태풍을 만난 듯 쓰러진 나무들과 기절한 사람들. 망가진 숲의 자연과 역시나 망가진 젊은 군인들.
랭키 웨던은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 입술에서 나는 피리 소리에 충성스러운 목소리가 보답해 왔다.
‘왈왈!’
숲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사냥개는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혀를 내밀고 있는 로피를 보며 누군가 탄식했다.
“이렇게 불러올 줄 알았으면…….”
아직까지 시류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군인에게 랭키는 비웃음을 날렸다.
“아직도 모르다니.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할 건가?”
랭키는 발치로 달려온 로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각 잡힌 예전처럼 뒷짐을 지고 서서 젊은 군인들에게 웃어 보였다.
“난 랭키 웨던이네. 라드군 머리 대행까지 했던 내가 이곳에 왔는데 좀도둑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골골대던 노인의 기색을 지운 랭키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군인이었던 과거를 상기했다.
“훈련은 내일 아침부터. 이제는 낚시는 그만두도록 해. 식사 당번은 따로 둘 거다.”
눈치 좋은 놈들이 한둘은 있으니 조금 지나서 멍청한 이들에게 설명해 줄 터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벽 위의 성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이었다는 걸.
첫날부터 조금이라도 징징거리거나 일을 소홀하게 하면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 옛날 제자였던 라넌 샤스가 보낸 이들이어서 치 떨리게 골려 주자 싶었다.
첫 시작은 제자로, 끝내는 남보다 못한 원수로. 대체로 원수들이 그렇듯 라넌과는 시작보다 끝이 더 기억 나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 또한 악동 같은 제자의 농간이었다. 라넌은 바로 그 골려 주는 행위를 바랐던 터였다.
며칠 전 금색 인장에 눌린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뜻밖이었다.
이 작은 성을 은퇴 선물로 삼고 나름의 취미 생활을 이어 가는 저에게 편지를 쓸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서 말이다.
물론 내용은 더욱더 뜻밖이었다.
살면서 한두 번 마주쳤을까. 아니, 어쩌면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 다섯 번 정도일 거다.
그만큼 발신인의 젊은 시절은 랭키 웨던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졌다.
수비타 왕국의 숙녀들이 앓아누울 만큼 잘생긴 신관이었던 건 확실했다. 모르긴 몰라도 순결 서약만 없었더라면 왕국 최고의 바람둥이가 됐을 거였다.
두 번째 신관의 자리까지 오른, 록. 그가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분명 놀라실 겁니다. 그들을 가르치시되 따듯하게 대해 주세요.]
이 나이 먹고 무어가 놀라겠냐고, 오만한 신관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편지에 쓰인 예언대로 기절초풍하듯 놀랐다.
죽은 제자의 이름을 말하는 실수까지 범했으니 말이다.
젊은 군인들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주위에 몰려 앉아 있었다.
동료가 생겼구나, 그 아이처럼.
바람에 휩싸인 그녀를 보았을 때 주책맞게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의 말로가 떠올랐다.
랭키는 그의 유일한 동료인 로피를 데리고 숲을 빠져나갔다.
그는 저 젊은 군인들의 동료가 아니었다. 방해꾼이자 냉철한 사냥꾼이었다.
* * *
근육통, 두통, 다리에 난 쥐까지.
라드의 진면목인 숨결에 손을 대고 폭주한 나디사는 그 대가가 무언지 지난 며칠간 톡톡히 경험하고 왔다.
“우욱.”
정신을 차리고도 삼일. 나디사는 옆구리에 항상 양동이를 끼고 살았다. 메스꺼운 느낌이 들 때마다 속을 비워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으.”
빨랫줄에 걸린 셔츠를 걷어 내던 마벤은 이젠 익숙해진 토악질 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로운 침실이 배정됐다. 해변가 근방에 있는 작고 아담한 오두막 두 채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헛간을 빌려 쓰고 있던 라드의 대우도 전보다 나아졌다.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랭키 웨던은 창고를 열고 라드를 위한 신선한 닭고기를 제공해 주었다.
성에 있는 그 작은 창고 방을 벗어난 기쁨도 잠시.
그처럼 호의를 베푼 랭키 웨던의 눈물 뽑는 훈련이 시작됐다.
막 정신을 차린 나디사도 예외는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끌려온 그녀는 로마와 함께 다시 없을 고초를 겪는 중이었다.
간식까지 살뜰히 챙겨 먹는데도 살이 쭉쭉 빠졌다. 늙은 여우에게 속았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랭키의 수업은 정식 훈련에 참여할 수 없는 발톱에겐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수업 내내 랭키는 냉철한 훈련관의 면모를 보였으나 나디사는 그의 다른 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모와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듯했다.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볼 때마다 표정을 찡그리며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다고 섣불리 다가서서 친모에 대해 캐묻지 않을 것이다. 저쪽에서 먼저 다가와 묻기 전까지는. 불확실한 의심만으로 친모에 대해 아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건 위험했다.
“아흐, 저 늙은이. 스프에 독이라도 타야 하나.”
“그거 먹어도 안 죽을 것 같은데.”
나디사의 자조적인 말을 흘렸다. 그에 동의하듯 웃으며 빨래를 걷던 마벤이 돌연 몸을 숨겼다.
갑자기 팍 주저앉아 건조 중인 이불 뒤에 몸을 가리려고 안달이었다.
“왜…….”
“쉿! 조용히 해!”
나디사의 눈이 앞을 훑었다. 수장이라는 이유로 저녁까지 개인 교습을 지도받는 아트리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혹독한 수업인지 볼 때마다 얼굴빛이 안 좋았다. 그리고 마벤은 이불 뒤에 숨어 그런 아트리스를 훔쳐보고 있었다.
“마벤.”
“조용히 하라니까! 그러다가 이리로 오면 어떻게 하려고!”
행여나 들킬까 봐 초조한 그녀의 얼굴은 풋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
나디사는 오전 내내 구토 증세에 시달린 것을 잊을 만큼 배가 당겨 왔다.
“야, 야, 야. 왜 자꾸 이리로 오지? 나한테 뭐 볼일 있나?”
“글쎄.”
마벤의 염려대로 아트리스가 이쪽으로 오는 길이었다. 볼일이 있는 것처럼 부드러이 고개를 까닥인 그였다.
나디사는 양동이를 벽 쪽에 치워 두고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나디사. 저녁 당번, 괜찮겠어?”
식사는 전부 랭키의 성에 사는 요리사가 조리해 뒀다. 성내 식당은 기존의 쓰던 이들이 써야 한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됐다.
해서 야외 식탁까지 나르는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나 보다.
그간은 아파서 빠졌다지만 나디사는 이 이상 예외로 남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나랑 같이 갈 사람이 누구지.”
“……히아신 아스.”
그 이름을 내뱉는 아트리스, 그 이름을 듣는 나디사. 두 사람의 표정은 극단으로 갈렸다.
아트리스의 눈은 밤바다처럼 가라앉고 나디사의 눈은 더없이 따스한 빛을 품었다.
“그래. 그리고…….”
우당탕당, 빨랫줄이 넘어지며 이불이 모래에 빠졌다.
아트리스는 놀란 듯이 입을 벌리고 그쪽으로 다가섰다.
“마벤?”
황당한 표정의 그는 이불에 포개진 마벤에게 손을 뻗었다.
“거기서 뭐 하는 짓이야. 바보도 아니고.”
“으, 뭐.”
마벤은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이불에 싸인 채로 기어가기를 택했다.
고집스럽게 그 상태로 오두막 문을 열었다. 애벌레처럼 사라지는 마벤을 보며 나디사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
“저것도 수업의 부작용인가.”
이어진 아트리스의 말을 듣고는 배꼽이 빠질 뻔했다.
아무래도 마벤의 짝사랑은 조금 고달플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