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사이 비가 그쳤다.
마벤의 경우는 아트리스에게 업혀 있어서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리사는 다친 무릎 때문에 맨 뒷 열을 지키고 있었다.
랭키 웨던과 같은 속도로 달리던 그리사가 대열에 들지 못하고 낙오됐다.
나디사는 그런 그를 도우려 했다. 가차 없는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운 남자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히아신 아스. 더는 뒤를 보지 못하게 아예 제 몸으로 가려 버린다.
나디사는 그가 그렇게까지 비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뒤로 빠져나간 시네라가 그리사를 챙겨 왔다.
멀리 보이는 라드 여섯 마리의 우렁찬 합창은 환영을 뜻했다.
“아트리스!”
망보기 역할에 충실한 마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새빨간 횃불이 숲을 점령하고 있었다. 숲의 지리를 아는 노련한 추격자였다.
빨갛게 달구어진 불빛이 어두운 숲을 한낮처럼 밝혔다.
“하!”
헐레벌떡 뛰어간 시네라는 엎드린 캐롯의 등에 올라탔다.
목줄을 다급하게 당겨 보지만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캐롯은 조금 뜨다가 말았다.
“시네라! 안 돼!”
수장의 냉철한 일갈에 시네라는 깨끗이 비행을 포기했다.
하늘에 뜬다고 하더라도 이 몸 상태론 또 다른 추락을 부를 뿐이었다.
막다른 곳까지 몰리자 랭키 웨던은 단검 한 자루로 전투 준비를 했다. 그 이빨 빠진 단검이 부대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어쩔 수 없다. 노디를 꺼내.”
다 꺼져 가는 노인의 숨찬 목소리를 듣고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랭키는 서로 눈치 볼 뿐인 군인들에게 소리쳤다.
“뭐 해! 이 굼벵이들아!”
“노, 노디가 뭡니까.”
심장이 졸아든 시네라의 대답에 랭키의 입이 턱까지 떨어졌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는 이내 메고 온 가방을 미친 사람처럼 뒤적거렸다.
“이 빌어먹을 라드군 같으니라고. 보내도 꼭 이런 오합지졸을 보내서…….”
추격에 성공한 횃불 무리의 인원은 열댓 명.
인원수로도 밀리게 생겼다. 게다가 저쪽 옆구리에는 칼이 한 자루씩 차 있는 상태였다.
나디사는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 랭키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군화로 그의 발목을 톡 건드렸다. 눈이 벌게진 랭키가 휙 고개를 들었다.
“저희는 모르는 게 많아서. 노디가 뭡니까.”
그녀를 보자마자 티사라는 두 글자를 외친 랭키 웨던.
죽은 친모의 이름이었다. 친모의 한때에 그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실전 경험이 있는 랭키 웨던밖에 믿을 데가 없었다.
“이봐. 너희, 뭐, 뭐야.”
횃불을 든 좀도둑들은 목이 긴 라드와 제복을 보고 저들끼리 분란이 일어났다. 잡아야 한다, 말아야 한다, 어떡할 거냐, 죽고 싶으냐.
협상의 여지를 본 아트리스는 마벤을 제 라드 위에 앉혀 두었다. 군인다운 걸음걸이로 걸어 나간 그는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문질러 쓸어내렸다. 하루가 무지 길었다.
“라드군이다. 얼룩무늬가 있는 사냥개를 찾고 있다. 아는 바가 있나?”
아트리스는 쥐뿔도 없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어디 소속이요?”
라드의 존재 때문에 좀도둑 무리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부대의 행색이 말이 아닌 데다가 공격 의사가 없어 보이자 의심이 든 눈치였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훔치지. 그중에 개가 있던 것도 같기도 하고.”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눈썹을 까딱이며 수하들에게 귀엣말로 지시를 내렸다.
똘똘 뭉치기 시작하는 횃불은 그 열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좀도둑으로 먹고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나 보다. 순식간에 협상을 저희 쪽으로 유리하게 비틀었다.
“주지 않으면, 우리를 어떻게 할 거지?”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라드들은 있는 힘을 짜내 몸을 부풀리거나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게 과시에 불과하다는 걸 들키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개를 데려간 걸 알면, 바로 공격하면 되잖아. 체포하거나. 왜 그러지 않고 도망쳤지?”
아트리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눈치 빠른 좀도둑들은 점점 의기양양해졌다.
“시간을 줄 테니 체포하지 그래.”
“그래, 이 애송이들아.”
“팔 내어 줄게. 데려가 보라고!”
호응하는 이들의 함성이 우렁찼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보기도 전에 저들이 우위를 점했다.
나디사는 가방에 들어갈 기세인 랭키 웨던의 목뒤를 꼭 잡았다. 손에 힘을 실어 그를 일으켰다.
가방 속에 파묻혀 있던 랭키의 얼굴이 끌려 나왔다. 내리깐 시선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살폈다.
솔직히 말해서 실망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분별력이 없을 줄이야.
자신들에게 막말을 일삼던 랭키 웨던이 꺼낸 것은 초라한 막대기였다. 불쏘시개로 쓰기 좋은 그것을 여태 찾았다는 것이었다.
나디사는 이 꼬락서니를 자신밖에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횃불의 열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와중에 여기로 끌어들인 장본인이 미쳤다는 걸 안다면.
“받아.”
“하…….”
친모와 헷갈린 순간부터 랭키 웨던은 그녀에게 밉보였다. 많이, 아주 많이 밉보였다.
사실상 최후의 방법이었다. 항복하는 척하다가 라드의 체력이 회복되면 후퇴하는 방식을 써야겠다.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트리스에게 다가서려는 차였다.
“아.”
나디사의 손목이 잡혔다.
뒤로 몸이 당겨지는 순간에 누군가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달빛의 시선을 받은 아름다운 은발이 찰랑거렸다.
그녀를 저지한 히아신이 달려가 아트리스를 발로 차 넘어트렸다. 얼마든지 피해 보라는 양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정확히 아트리스가 있는 자리를 노렸다.
발에 차여 넘어지는 바람에 천운으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발에 차이로 날아온 두 번째 화살은 파악이 늦었다.
휘어지며 날아오는 화살과 나무 뒤에 숨은 궁수. 엎드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마벤과 울고 있는 시네라. 다친 무릎을 누르며 달리는 그리사.
마지막으로 화살을 맞고 어깨가 뜬 히아신. 하나하나가 따로 보였다. 조각 난 순간은 이어지지 않고 한꺼번에 눈으로 들어왔다.
소리 없는 장면에 소리가 생긴 건 아트리스로부터 도망치라는 말을 들은 후였다.
전신에 후끈한 열이 올라 젖은 옷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횃불이 머릿속에서 켜졌다. 아트리스가 화살을 맞은 히아신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마벤이 그를 막았다. 다음 화살도 준비되어 있는 눈치였다.
나무 뒤를 보니 화살촉을 끼우는 궁수가 보였다. 쫘아악, 시위 당기는 소리가 다음 희생자를 고르고 있었다.
“이걸!”
그런 나디사의 손에 검은 막대기가 들어왔다.
장식 없이 짧은 막대는 그녀의 손바닥 길이만 했다. 이걸로는 참새 한 마리 못 잡게 생겼다. 랭키 웨던은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힘이 손금을 타고 흘러들었다. 하얀 바람이 호박 넝쿨처럼 작은 막대를 타고 올라온다.
가슴께까지 오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횃불의 열기를 몰아칠 수 있는 바람이 손바닥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히아신, 엎드려!”
아트리스의 말에 나디사의 집중은 다시 그쪽으로 이동했다.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눈길이 갔다. 히아신은 엎드리지 않고 정면으로 화살을 기다렸다.
주인에게 데면데면하던 디디가 날개를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위급 상황이라는 것이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횃불로 가득하던 머릿속이 이번엔 바람으로 가득 찼다.
비웃고 있던 좀도둑들의 입이 서서히 다물렸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의 입김이 타오른 횃불을 후 불어 껐다.
하나둘 불빛이 꺼져 가자 숲의 어둠은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나디사는 불러낸 바람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조차 몰랐다. 부디 횃불을 끄고, 화살을 막아 주었으면 하는 새하얀 집념에 자신을 맡겼다.
“티사!”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자신에게 덧씌워졌다.
“뒤를 봐!”
이 밤의 목격자인 달빛이 라드가 누운 숲을 밝히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씩 차이를 보였지만 결론적으로 뜻은 같았다.
“저, 저게…….”
“씨, 도망쳐!”
하얀 바람의 꼬리가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디사는 천천히 손을 감싸고 있는 바람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녀의 로마. 주인의 마음을 아는 영특한 라드의 눈이 이지를 잃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그 자태는 주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결을 낸 라드가 날개를 폈다. 그전의 사람과 친화적이던 라드는 사라졌다.
자라난 송곳니, 폭풍 같이 날아오른 짐승은 전장에 알맞았다.
막대가 라드의 입에서 하얀 바람을 끄집어냈다.
그게 힘의 원천인 숨결이었다.
나디사는 본능적으로 그 막대를 들었다. 적을 가리키는 용도로.
나디사 마로닌. 그리고 그녀의 뒤에 떠올라 하얀 입김을 실처럼 뽑아내는 로마.
칼날로 위장한 바람은 그 주인의 의지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