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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8화 (28/210)

28화

새파랗게 어린 군인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랭키 웨던은 신속하게 길을 안내했다.

아무리 이걸 임무라고 포장한다고 한들 의욕이 샘솟을 리 없었다. 이 임무의 결말은 아무리 봐도 개죽음 아니면 부상자였다.

식사를 차리거나 성벽을 보수할 때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늙은이가 그들을 사냥개 찾는 뭣 같은 취급을 했다.

다리 다친 마벤을 업은 아트리스의 눈빛에 싸한 빛이 스몄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닳고 닳은 노인을 잘 써먹어 실력을 높일 생각뿐이었다.

고작 그 훈장 하나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자신이 부대를 지옥으로 이끈 듯싶었다.

히아신, 그리사, 나디사, 마벤. 주축이라고 볼 수 있는 멤버 중 과반수가 부상자였다. 하강할 장소를 오판한 대가는 참혹했다.

‘신호도 맞추지 않고 네 말만 믿고 따르게 만든 결과다.’

쓰러진 마벤을 구조하던 그에게 노인이 던진 말이었다.

그 냉정한 눈빛과 기백은 퇴역한 군인의 것이라며 얕볼 수 없었다.

교본으로 받은 책을 외워 훈련한다고 한들 어느 시점에서는 진도가 막혔다.

결국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한 떨거지들은 칼과 창이 아닌 비바람에 스러졌다.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될까.

로피라는 개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남을 도울 생각이 일절 없어 보였다. 그전에 인성이 덜 됐다.

아트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부대의 미래까지 엿보고 온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았다.

“미안.”

그에게 업힌 마벤은 한숨이 저 때문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비로 인해 질퍽해진 흙 위를 걷는 일은 물론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마벤의 탓이 아니었다. 그런 졸렬한 남자가 될 생각도 없고.

“나도 실수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잘 착지하려고 하다 보니까 발이 삔 거야.”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회복에 집중해.”

“거짓말.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마벤은 크게 밉지 않았다. 그래, 마벤은 나름의 방식으로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중일 터다.

이건 그걸 받아 줄 아량과 말주변이 없는 자신의 문제였다.

아트리스는 고개를 틀어 뒤따라오고 있는 동료들을 봤다. 그중 파리해진 낯의 나디사를 유심히 눈여겨봤다.

고개를 숙인 나디사는 잠시 멈춰 군화 끈을 고쳐 묶고 있었다.

그녀를 불러 괜찮냐는 질문을 한 번 더 하려다가 말았다. 대답은 아까와 똑같을 것이다.

괜찮다고, 그러니 수장인 그는 다친 마벤이나 신경 쓰라고.

그런 나디사의 옆에는 히아신 아스가 발정 난 거머리처럼 붙어 있었다.

나디사가 치료해 준 것이 분명한 팔을 흔들며 일방적으로 떠드는 중이었다.

무딘 저 여자는 대응하지 않는 중이지만, 그게 늘 보던 장면이지만, 교활한 마음은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했다.

“히아신.”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로피의 행방이 절실한 부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잠시 이리로.”

히아신 아스는 수장이라는 자리를 존중할 마음이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 이거다.

멍청한 쾌락주의자 주제에. 그리 히아신을 비하하고 나면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텁텁해졌다. 저 남자의 존재가 그에게 그랬다.

“물어볼 것이 있어.”

비록 실속 없는 지위일지라도 수장은 그였다.

그게 아니꼬웠다면 수장 자리를 그리 쉽게 포기해선 안 됐다.

“히아신 아스.”

히아신은 김새는 표정으로 나디사를 떠나왔다.

그렇다고 넙죽 오진 않았다. 진흙을 사방으로 튀기는 그 거친 걸음에 짜증이 비어져 나왔다.

“교대해 달라고?”

“싫어!”

마벤을 업으라는 줄 알았나 보다. 마벤은 즉각 질리는 표정으로 거부했다.

그러자 오로지 사람을 괴롭힐 때만 선명해지는 히아신의 눈이 생기를 찾았다.

“왜. 아트리스가 좋아서?”

“뭐, 뭐? 뭐라는 거야!”

“그러면 내가 싫을 이유가 없는 거네? 나한테 업혀도 되겠네? 이리 와.”

마벤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어벙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번 판은 마벤이 졌다.

저 생각이 구린 놈은 애초에 업을 생각도 없었을 거다.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디사 쪽을 바라본 아트리스는 감정을 반 토막 내고 잘랐다.

“그 팔, 나디사가 치료했어?”

“응.”

“나디사는.”

망토로 가리고는 있으나 그녀의 상처를 몰라볼 그가 아니었다.

“나디사가 뭐?”

“팔. 어떠냐고.”

히아신의 오묘한 시선이 절제된 감정을 꿰뚫는 듯했다. 돌연 앞니로 입술을 깨문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디사는 괜찮다고 하는데……. 모르지? 팔이, 좀?”

“그래, 알았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불렀어? 정말?”

히아신은 그 재수 없는 뺨이 옴폭 들어갈 정도로 환히 웃었다.

그때 알았다. 머리가 까매질 정도의 분노는 상황을 가려 오지 않는다는 걸.

“나 여기가 점점 좋아져. 너무 재밌잖아.”

떠나지 않고 먹잇감 노리듯 어슬렁대는 히아신이 거슬렸다. 저리 가 보라고 턱짓하는 때에 히아신의 걸음이 멈추었다.

안내하고 있던 랭키 웨던도 등에 멘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숲이 끝나는 경계선에 저편. 허리를 구부리고 앉는 랭키. 웃음이 잦아든 히아신.

이 임무의 시작이자 끝이 가늘어지는 빗줄기 너머로 보였다.

“저기 있다.”

기척을 숨긴 랭키 웨던의 엄지가 앞을 가리켰다. 한 남자가 염소를 가둔 철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트리스는 섣불리 단검을 꺼내는 랭키의 손을 막았다.

“저희가 합니다.”

“너희가?”

랭키는 농담하지 말라며 혀를 찼다.

“설마 군인이 왔으니 순순하게 하라는 대로 할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라드들은 지쳤습니다. 저희는 전투 경험이 무지하고요. 그래도 개를 훔쳐 가는 좀도둑에게 질 정도는 아닙니다.”

“저들이 좀도둑이라고 생각해?”

단검을 든 랭키는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이처럼 치안이 엉망인 곳에서 나는 홀로 살아남았어. 이 근방에 단순한 좀도둑은 없어.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사람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이들이면 몰라도.”

랭키는 얼어붙은 젊은이들에게 처음으로 배려란 걸 했다.

“어쨌든 로피를 찾는 것을 도와줬으니 망이나 보고 있어. 나는 때를 봐서 잠입할 테니.”

뼈가 보이는 깡마른 손목임에도 그 강단은 여전했다.

하지만 여기서 랭키 웨던이 객기 부리다가 사망이라도 한다면 임무는 실패였다.

랭키 웨던을 혼자 보낼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였다.

적당한 때를 살피는 랭키의 곁으로 가벼운 걸음이 다가왔다. 아트리스의 시선 또한 다가오는 이에게 머물렀다. 초췌한 나디사 마로닌이었다.

“랭키 씨.”

앞을 주시하던 랭키 웨던은 용건은 짧게 하라는 듯이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아트리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잠자코 지켜보았다.

“같이 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저쪽의 수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나디사의 제안도, 아트리스의 기다림도, 연극배우 같은 랭키 웨던의 경악스러운 표정에 가로막혔다.

비구름이 물러가며 흘러나온 달빛이 후드에 가려진 나디사의 얼굴을 비췄다. 랭키 웨던이 손을 떨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티사…….”

적막 속에 떨어진 그 이름은 폭풍전야 같았다. 아트리스는 나디사의 표정에 주목했다.

잔잔하던 그녀의 눈빛이 이름 두 글자에 일그러지고 있었다.

“티사?”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되풀이해서 외친 랭키 웨던은 여기가 어딘지도 잊은 듯했다.

“잠시만요.”

망을 보던 그리사가 몸을 뒤로 뺐다.

“들킨 것 같아요.”

그리사는 왼쪽 무릎에 부상을 당했다. 지친 라드들은 뒤편에 두고 온 상태였다. 재고 따질 것 없이 이쪽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거기!’

정찰하던 이가 손가락으로 숲을 짚었다.

이야기를 전달받은 횃불 무리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 숫자는 예상보다 많았다.

‘저기 뒤쪽 확인해 봐.’

그리사가 뒤로 발을 뺌과 동시에 횃불의 뜨거운 열기가 드리워졌다.

퇴각 준비를 끝낸 까만 군화가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랭키 웨던이 뒤늦게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가방까지 서둘러 챙겨 맨 그는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

이 치안 좋지 않은 곳에 단순한 좀도둑이 있을 줄 아는 거냐고 그랬다.

불현듯 떠오른 랭키의 말엔 조화롭지 않은, 부적절한 몇 군데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상황만 아니었어도 차근차근 그 부적절함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하나.

손가락이 하나만 남았다.

어둠 속에 옹송그린 부대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트리스는 엎드려 마벤을 고쳐 업었다.

“지금이야.”

랭키가 주먹을 쥐자마자 질퍽한 숲길을 달렸다.

기척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린 횃불이 숲의 경계선을 침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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