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디사가 내려가면서 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의 하강 장소는 넓디넓은 들판이거나 라드들이 착지 경험이 있는 공터였다.
그러나 뾰족한 침엽수가 자리한 숲은 갖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원 무사 착지는 힘들어 보였다.
더욱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은 라드의 저조한 몸 상태 때문이었다.
하강의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라드들이 날개 힘을 덜었다.
“아, 악!”
조종이 어려운 시네라가 흐느적거리며 무리를 이탈하였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떠난 뒤 중심을 잡아 보려 했지만 강풍이 캐롯의 날개 끝을 접었다.
“시네라!”
“야! 돌아와!”
회전하며 떨어지는 시네라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머리를 잡아 세우지 않으면 나무에 처박히기 좋았다.
걱정이 실현된 양 침엽수 사이로 사라진 그림자를 그리사가 쫓았다.
“그리사!”
이탈하는 그리사를 발견한 수장의 외침이었다. 지시를 무시한 그리사는 하강하여 숲속으로 빠졌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랭키의 비웃음을 샀다.
“엉망이구만.”
그러는 아트리스 쪽도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아트리스의 무스는 두 사람을 태웠다. 속도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좁은 곳으로의 하강은 무리였나 보다.
달라진 무스의 날갯짓을 알아본 나디사의 눈이 바빠졌다.
걱정은 빠져나갈 구멍을 파 두고 하는 거였다. 아트리스를 따라서 내려가면 두 마리의 라드가 충돌해 치명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라드의 사망, 혹은 사망에 준하는 사고를 일으킬 경우엔 군에서 여지없이 박탈됐다. 따라가선 안 될 터다.
“윽, 로마!”
하강 중에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팔과 다리에 상당한 고통을 안겼다.
로마의 등에 가슴을 대고 누운 나디사는 사력을 다해서 목줄을 왼편으로 당겼다. 그사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들어갈 자리를 발견했다.
로마는 주인의 말을 따라 힘 빠진 날개의 방향을 바꾸었다.
비구름 중심부를 지난 로마가 미리 알아 둔 자리로 쏙 점프하듯 들어갔다.
숲이 가까웠다. 들어가자마자 나뭇가지에 와다다 부딪치며 팔뚝이 긁혔다.
로마는 날개를 치는 장애물을 간신히 피해 땅으로 날아갔다. 팔로 얼굴을 가린 나디사는 감기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땅에 머리를 내리박기 직전. 나디사는 목줄을 잡고서 뒤로 누워 버텼다.
막판에 가서 정신을 차린 로마가 날개를 써서 속도를 늦췄다. 빗물 고인 숲에 묵직한 날갯짓 소리가 퍼졌다.
반쯤 굴러가 착륙한 로마가 체력을 보충하듯 다리를 뻗으며 누웠다.
그 등에서 몸을 일으킨 나디사는 엉망이 된 주위를 두리번댔다. 강풍에 후드가 벗겨져 머리도 셔츠도 쫄딱 젖은 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앞서 내려간 시네라와 그리사가 무사히 착지했는지도 걱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아트리스를 따라 하강을 시도하던 마벤의 모습. 그리고 히아신.
“아.”
다급히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지만 남은 라드는 한 마리도 없었다.
마지막 주자로 날고 있던 그가 어디로 떨어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정신 차리라는 듯 울리는 쿵 소리가 숲의 새들을 쫓아냈다. 꽤 거친 착륙이었다.
서쪽임을 확인한 나디사는 늘어져 있는 로마를 일으켰다. 목줄을 잡고 무작정 뛰었다.
라드의 무게에 눌려 꺾인 나무는 허리가 얇았다. 둥지 잃은 새 떼는 숲속을 누비며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다. 이사하는 새의 이동을 쫓으니 답이 빨랐다.
걸음이 처지는 로마의 목줄을 놓고서 달렸다. 곤란한 듯 나무에 기대앉은 히아신을 찾아내었다.
비정상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그의 왼팔이 수상했다.
“히아신!”
히아신의 디디는 나무 무덤에서 기어 나와 주인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타 다른 라드들이라면 정신이 연결된 주인의 옆자리를 지키기 마련이었다.
꼬리를 말고서 누워 있는 디디는 접은 날개를 잘게 떨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디사가 그의 앞에 무너지듯 무릎을 굽혔다.
“팔 부러졌어.”
히아신은 다쳤단 소리를 아침 메뉴를 말하듯 평온하게 했다.
쓰린 죄책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우왕좌왕하느라 제일 마지막인 그를 잊었다.
수장인 아트리스가 후방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맡겨 두지 않았던가.
이건 신용이 깎이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부상과 추락은 오롯이 자신의 실책이었다.
“이렇게 들어 봐.”
“아.”
“아파?”
대꾸 없이 끄덕거리는 히아신의 어깨를 꾹 쥐었다.
“로마!”
느긋이 따라오던 로마는 주인의 절박한 부름을 받고 날개를 펼쳤다.
“히아신.”
“응?”
“디디는 왜 저래.”
히아신의 디디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히아신은 그게 왜 문제냐는 듯이 피식 웃었다.
“삐쳤나?”
“그게 그렇게 쉽게…….”
환자한테 차마 잔소리할 수는 없었다.
로마가 매단 가죽 가방 안에는 육포를 감쌌던 하얀 천과 응급 약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배포해 준 것을 나디사가 혹시 몰라 따로 챙긴 것이었다.
멍든 그의 왼팔이 눈에 띄게 부었다. 우선 상처 부위에 약을 뿌리고 매는 것이 좋겠다.
단단히 잠긴 약 뚜껑을 어금니로 물어 돌렸다.
생풀 향의 초록 가루는 만병통치약이라고만 설명되어 있었다. 명칭만 거창하지 말 그대로 응급용이었다.
고운 약 가루는 바를수록 점성이 생겼다. 그걸 상처 부위에 고루 펴 바른 뒤 준비한 천으로 옥죄며 감았다.
서툰 손길로 리본까지 묶었다. 나디사는 죽는소리 안 하고 잘 버틴 히아신에게 웃어 보였다.
“일단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표정한 히아신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왔다. 해 봤자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는 건가 싶었다.
기울어져 다가온 입술이 그녀의 뺨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볼을 누르고 빠지면서 쪽 소리를 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건 가벼운 인사가 아니라 입맞춤이었다. 축축한 뺨을 문질러 본 나디사는 멍한 얼굴이 됐다.
덩달아 눈이 풀린 히아신은 다친 팔을 아양 떨 듯이 흔들었다.
“이 정도 상처에 안달복달하는 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히아신은 그 정도 해명이면 되지 않았냐는 듯이 비 막음용 후드를 썼다.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차갑단다.
“한 번 더 할래?”
수치심도 모르고 들이대는 그에게 밀려 나디사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뭐야. 뽀뽀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헤실거리며 웃을 줄이나 아는 눈치 빠진 놈. 제게 내려진 평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히아신은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슬쩍 문질렀다.
“아니면 여기에 해 볼까.”
“히, 아신.”
그의 손을 툭 쳐 낸 나디사가 후다닥 일어섰다.
이번 장난은 도가 지나쳤다. 다리가 후들거려 꼬리를 흔드는 로마의 등을 지지대 삼아 버텼다.
반응이 곧 재미인 히아신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다치지 않고서야 같은 동료를 놀림감으로 삼으려고 하다니.
“나 일으켜 줘, 나디사.”
“일어나. 다리는 멀쩡하면서. 그리고 이런 장난은…….”
“어떤 장난?”
망했다. 저 성격상 재밌다고 달라붙을 게 분명하다.
“나디사.”
경직된 분위기를 헤치고 나타난 건 잃어버린 동료들이었다.
“마벤…….”
흰 천에 묶인 마벤의 오른 다리는 부목을 대 놓았다. 히아신보다 심한 부상이었다.
아트리스는 그런 마벤을 업고 있었다. 업힌 마벤의 얼굴은 홍당무 색이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친 데는.”
나디사는 긴 망토로 훌떡 까진 팔꿈치를 숨기었다. 비린 입맞춤으로 흐려진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괜찮아.”
그러나 옆으로 다가오는 달콤한 기척을 느끼고선 과하게 놀라고 말았다.
흠칫하며 비킨 그녀의 뒤에는 히아신이 있었다.
“나디사?”
후텁지근한 기류를 읽은 아트리스의 시선은 의아함이 가득했다.
“나디사 마로닌.”
“아, 응.”
“……시네라하고 그리사는.”
그리고 짜 맞춘 연극처럼 그리사와 시네라가 생존 신고를 했다.
“여, 여기! 우리 여기 있어! 그리사가 조금, 부, 부상 있지만 괜찮아!”
멀리서 시네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그렇게 외쳤다.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자가 반이고 갈 길은 멀었다. 무심한 빗줄기는 굵어지지, 급한 하강을 하느라 라드의 체력도 바닥이었다.
“머리 엉키겠다.”
수작에 재미 들린 히아신은 나디사의 벗겨진 후드를 대신 씌워 줬다. 나디사는 안 들리는 척 꿋꿋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
“두 사람.”
수상쩍은 정황을 포착한 아트리스가 입을 떼려는 찰나.
이만하면 충분히 끔찍한 악역을 소화한 랭키 웨던이 죽지도 않고 부대를 찾아왔다.
“저 뒤에 있었다.”
이 급하강 사건은 랭키가 아래로 가야 한다고 가리키면서 일어났다. 셋의 부상은 그와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 염치 없는 노인은 그들의 부상은 보지 못한 것처럼 제 할 말만을 했다.
“로피를 데려간 납치범들.”
사냥개를 그리는 노인의 마음처럼 구질구질한 비가 숲에 내렸다.
젊은이들은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