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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5화 (25/210)
  • 25화

    파도가 잔잔한 바다는 밤하늘과 야합한 것처럼 그 경계선이 흐릿했다.

    완연한 봄 날씨에 얇아진 나디사의 파자마는 바람을 머금고 아래가 부풀었다.

    “안녕.”

    성문을 닫는 나디사의 옆으로 젖소처럼 얼룩덜룩한 털 뭉치가 찾아왔다.

    랭키 웨던이 키우는 커다란 사냥개는 까만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덩치만 사냥개였을 뿐 그의 주요 일과는 랭키의 발치에서 낮잠 자기였다.

    작은 새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을 얼마 전에 목격한 바였다. 랭키는 그처럼 순한 사냥개를 제 손주처럼 물고 빨았다.

    “나디사. 여기서 이야기하자. 그런데 너 옷이…….”

    하얀 잠옷 바지에 재킷을 걸친 아트리스는 파자마 차림으로 따라 나온 나디사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덮어.”

    점잖게 사양하고 싶었으나 오들오들 떠는 몸으로 있는 것이 더 민폐다 싶었다.

    받은 재킷을 어깨에 두른 나디사는 그와 같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은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밑은 고요한 죽음과도 같았다. 후들거리는 발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조용히 눈길을 거두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게…….”

    아트리스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나디사를 마주 본 그는 한 물건으로 용건을 요약했다.

    “이것 때문에.”

    그의 손바닥에 놓인 훈장은 금색 박쥐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몰라.”

    “심장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에게만 주는 훈장.”

    “이걸 어디서 얻었어?”

    “청소하다가.”

    아트리스는 훈장을 다시 움켜쥔 뒤 주머니에 넣었다.

    훈장의 쓰임을 모르는 나디사는 더 세밀한 설명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랭키 웨던이 라드군 내에서도 실력자였을지 모른다는 소리야.”

    아트리스의 말을 들으니 그런 식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만. 나디사는 여전히 도돌이표 같은 의문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기 아깝잖아. 그리고 하필 우리 실력을 더 낫게 만들어 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근방에 있어. 흘려보내기 아까운 일이지.”

    잡일과 낚시, 청소로만 보내는 하루가 힘들고 아깝긴 했지만. 그 꼬장꼬장한 랭키 웨던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기르는 개와 오후까지 산책한 뒤 본인이 요청한 식사를 마치면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우리를 도와줄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대로 시간을 썩히긴 아까우니까.”

    이런 용건이었구나. 새삼 자나 깨나 부대를 위하는 그가 수장을 맡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트리스가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 여러 개를 설명한 뒤 대화는 서서히 단절되었다.

    그야 나디사는 응, 그렇군, 정도의 반응밖에 하질 않으니 말이다.

    사실 이쯤이면 야밤의 논의는 충분했다.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들어가는 게 좋았다.

    “그럼 이만 들어갈까.”

    “안 물어보는 건가?”

    물러서려던 발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찬바람에 입가가 굳은 아트리스는 말을 계속했다.

    “너만 부른 이유.”

    “……궁금하긴 했어.”

    나디사의 솔직한 답변에 아트리스는 미소 지으며 뒷말 같은 고백을 했다.

    “마벤과 시네라는 걱정이 너무 많고, 그리사는 보기보다 어려. 그리고 히아신 아스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가던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상체를 틀었다.

    “히아신 아스와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했지.”

    전과 비슷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문형이 아니라 아예 단정을 짓고 있었다.

    거짓말이 서투른 나디사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알던 사이라는 거군.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묻지는 않겠지만, 혹시 연인 사이였던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이번에는 답이 빠르네.”

    아트리스는 그 대답이면 된다는 듯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바람에 맞물린 그의 비누 향기가 코 근처에서 맴돌았다.

    “내가 가장 신용하는 건 너야, 나디사. 적어도 지금까진. 이 계획도 독단으로 시행하기 전에 한 사람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다부진 손이 그녀의 어깨를 약하게 쥐었다.

    “할 말은 끝이야. 들어가자.”

    “잠시만.”

    “왜?”

    “나는 조금 더 있을게.”

    “……마음대로.”

    시린 바람과 재킷이 주는 따듯함이 상반되어서일까.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나디사는 떠나는 그의 자취를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가장 신용할 수 있는 사람, 이라.

    들었을 때는 별 감흥 없었던 말이 기억 속에 저장되자마자 낭만적으로 바뀌었다.

    수장인 아트리스를 신용하는 만큼 그의 말은 달콤함을 더해 갔다.

    세탁소 관리인이 빨래를 잘 치댄다고 칭찬했을 때도, 그 속물적인 인정에도 부끄럽고 설렜었다.

    타인의 인정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문제다. 대체 마음이 배불러지려면 어째야 좋을까.

    “음, 싱거워.”

    그리고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트리스의 목소리보다 낮고 음험한 것이 성 뒤쪽에서 들려왔다.

    뻔뻔함으로 무장한 그림자가 설렁설렁 걸어 나왔다. 예상한 대로의 인물이 나타나자 나디사는 맥이 풀렸다.

    “밤중에 불러내기에 찐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우리 서로 물 먹었다. 그치.”

    “고백은 무슨. 아직 안 잤구나.”

    달랑 내의만 입은 히아신은 바닷바람이 센 절벽 끝까지 주저하지 않고 걸어왔다.

    시원한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그는 미소를 흘렸다.

    엿들은 게 분명함에도 그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

    “히아신.”

    “응.”

    “너는 왜 라드군에 들어온 거야?”

    슬며시 눈을 뜬 그의 미소는 음흉한 빛을 띠었다.

    “갑자기 나한테 관심이 많아졌네? 이건 우리 사이에 일어난 또 다른 신호라고 봐도 될까?”

    “말해 주기 싫음 말고.”

    “말해 주기 싫은데, 네가 라드군에 들어온 이유를 들으려면 나도 말해 줘야 하는 거잖아? 한쪽만 알려 주면 불공평하지.”

    오늘도 그의 머릿속엔 어지러운 생각, 어지러운 말들밖에 없나 보다. 저 정신없는 말을 이해하려면 백 년은 족히 걸릴 거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끝까지 이해한 다음에 끝까지 이해하고 싶지 않아.”

    아무한테도, 심지어 그녀를 기르고 먹이고 입힌 사람에게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히아신 아스라면, 이 무색의 바람 같은 남자라면 가볍게 듣고 가볍게 잊어 줄 듯했다.

    “아……. 심오하네. 이 정도면 거의 말해 주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은근히 약았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될지는 모르겠어. 뭐라고 불러야 될지도.”

    “그러면 나도 전부는 아니고……. 반만 깔까?”

    “말해 주기 싫다며.”

    “그래서 반만.”

    그의 말주변엔 당해낼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비밀을 말하고파 근질거리는 그의 입술을 보니 선택권은 없는듯했다.

    “아버지가.”

    “…….”

    “들어가랬어.”

    히아신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게 없지만 놀라웠다. 이 남자치고 너무도 정상적인 이유여서 더 당황한 것도 있었다.

    막말로 히아신이라면 세계 제패, 더 나아가 반역 모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양아버지.”

    “양아버지?”

    “같이 입양된 애들도 넷이나 있어.”

    친구 딸을 맡아 키운 거나 모르는 아이 넷을 자식으로 입양한 거나 크게 보면 비슷한 사정이었다.

    핏줄, 가문, 종족이 전부인 시대에 그와 자신은 타인의 것을 몇 가지 빌려 썼다.

    다행히 그녀의 타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과연 그의 타인은 어땠을까.

    그때 하얀 손가락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귀 뒤로 보내 주었다.

    부드럽게 스치는 그의 손이 살며시 귀 뒤를 만지고 지나갔으나 워낙 빠르고 미미하여 지적하기도 민망했다.

    “나디사.”

    디디라고 부르지 않는 히아신의 목소리는 상당히 낯설었다.

    바람이 가져다주는 그의 향기를 오래 맡자 가슴 안쪽이 불편했다.

    “서로 가정사까지 얘기한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동료?”

    “흐, 친구.”

    “나는 가정사를 말한 적이 없는데.”

    “방금 그거, 아무리 봐도 가정사였는데.”

    히아신은 그녀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쓱 거두어 냈다. 그리고 망토처럼 제 머리에 가져다 썼다.

    “나 친구는 처음이라서 기대돼. 나디사도 첫 친구지?”

    친구. 히아신과 친구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서로에게 정직해야 할 친구로 두기엔 의뭉스러운 면이 많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자.”

    “우리 친구 아니야?”

    “동료?”

    “가정사까지 이야기했는데?”

    “나랑 왜 친구를 하고 싶어.”

    성까지 쫓아오며 귀찮게 구는 그를 보면서 나디사는 여러 번 웃었다.

    “방금 친구한테 해 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친구 하는 거야.”

    순 자기 멋대로군. 몰래 빠져나와 대화를 엿듣고, 본인 가정사를 흘리더니 이젠 자기 마음대로 친구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계단을 껑충 발로 뛰어 올라가는 히아신이 어떤 의미론 존경스러웠다.

    나디사는 바닷바람이 들이차는 성문을 닫았다.

    늘 그렇듯 그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보고 듣는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 속에 항시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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