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간호, 보호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여 젊은 군인을 불러들인 랭키는 건장한 노인네였다.
그가 만든 이 폭풍 같은 곳에서 젊은이들은 나름의 살아갈 방식을 찾는 중이었다.
어느덧 일주일. 생전 해 본 적 없던 식사 준비, 청소, 성 수리 등의 잡다한 기술이 어느 정도 손에 익어 가고 있었다.
“양념은.”
“미쳐, 내가 요리사야?”
물론, 모두가 적응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생선은 입도 못 대 본 늙은이가 끼니마다 진짜!”
“마벤. 제발 떠들 거면 나가서 해요. 음식에 침 들어가니까.”
“뭐라고, 이 어린 게.”
부대 내에서도 좋은 침구만 고집하던 마벤이 이곳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말하자면 꼬박 삼 일이 걸릴 거다.
“나 안 해.”
마벤이 양념을 만들다가 말고 뛰쳐나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녁 식사 자리를 위하여 각자 맡은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게…….”
오늘의 스튜 담당은 나디사였다. 아는 재료는 다 넣어서 만든 냄비 속 스튜를 한 국자 떠서 맛보았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오묘한 맛이었다. 워낙 맛에 둔감한 그녀는 맛이 있고 없고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끝났어?”
“어……. 아마도?”
“대답에 왜 확신이 없지?”
생선 뼈를 바르고 온 아트리스는 걷어붙인 팔로 국자를 뺏어 갔다.
아뿔싸. 아트리스의 입술이 국자와 맞닿는 순간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
“…….”
나디사는 의식적으로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어두운 바깥을 바라봤다. 상황을 회피하려고 해 봤으나 조용한 옆이 불안했다. 눈을 뜨고 기절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조심조심 훔쳐본 아트리스는 멀쩡한 정신으로 서 있었다.
국자에 입술을 댄 상태로 멈추어 있는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휘어진 입꼬리와 따스한 빛이 살아 있는 눈동자. 예의 있는 그는 국자를 던지지 않고 얌전히 돌려줬다.
“많이, 이상해?”
“글쎄. 딱 네가 끓인 것 같은 맛이 나는데.”
타박할 줄 알았던 아트리스의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그럼 통과인 거냐고 눈으로 물었다.
“재료가 없어서 다시 끓일 수도 없잖아. 먹자.”
아래쪽 서랍을 열고 그릇을 꺼낸 그가 스튜를 퍼 담기 시작했다.
맛 평가가 정확하지 않아 저걸 내가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와 또다시 시선이 얽혔다.
“할 말 있어?”
“어, 아니.”
“나디사.”
“응.”
그릇을 옮길 트레이를 꺼낸 그가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논의할 게 있어. 이따가 새벽쯤에 신호를 주면 잠시 나오도록 해.”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인 양 조심스럽게 전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듯 아트리스는 트레이를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자신과 논의할 일이 있을까. 논의라는 말은 어쨌든 혼자선 해결 못 할 사건을 뜻했다.
“워.”
귀를 빵 뚫는 작은 외침이 있었다. 한창 설거지 중이었는지 뺨과 손에 거품을 묻힌 히아신이었다.
옆에 있었으면서 인기척도 안 내는 무례한 이였다.
처음 설거지를 해 본 사람처럼 거품으로 엉망인 히아신은 손등으로 제 뺨을 슥 닦았다.
“둘이 연애하는 거야?”
“응?”
끓은 스튜를 젓기 위해 국자를 든 차였다. 히아신은 꽤 진지하게 서랍을 짚고서 몸을 붙여 왔다.
“디디, 나 어디 안 가고 여기서 묻고 있잖아. 대답해 줘야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어.”
“원하는 대답은 없어. 연애를 하냐는 질문에 나올 대답은 두 가지뿐이잖아. 아니거나 맞거나.”
“아니지, 당연히.”
이 시답지 않은 질문을 이어 가는 그가 이상했다.
게다가 웃음이 걷히지 않는 입술은 무어가 그리 불만인지 쫑알쫑알 질문이 쉼 없었다.
거품을 묻히고 있는 제 얼굴이나 보라지.
나디사는 어째 그를 두고 며칠간 고민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종종 그와 나눈 무의미한 말들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런 허술한 얼굴로 연애 운운하는 것을 보니 히아신 아스도 평범한 사내애 같았다.
“그러면 왜 둘이 보자는 걸까? 혹시…….”
히아신의 탐정 놀이는 한창 불타오르다 못해 절정기를 맞았다.
“그 남자의 짝사랑?”
“많이 심심해 보인다. 이거나 도와줘.”
“디디. 나 서운해지려고 해. 우리 사이에 연애 상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나는 꽤, 괜찮은, 상담가고.”
잘못 넘겨짚은 그가 너무도 우스워 나디사는 적당히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많이 봐줘서 마지막 스튜를 뜨는 순간까지만.
“요즘 이상한 남자 하나가 자꾸 자기한테 연애 상담하라고 하는데. 피해야 할까?”
“아, 디디.”
그는 거품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마치 쓰러지는 포즈를 취했다.
“나는 궁금한 게 생기면 잠을 못 잔다고. 나를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하나하나 다 말해 줘.”
“잠이 오지 않으면 자지 않는 것도 방법이야.”
“제발. 잠들게 해 줘, 응? 응?”
어찌나 조심성이 없는지 그의 팔이고 셔츠고 축축했다. 엉겨 붙는 그 때문에 자신의 셔츠까지 젖을 지경이었다. 단벌 숙녀나 다름없는 나디사는 이 고약한 남자를 양팔로 막아 냈다.
“마지막 스튜는요?”
그리고 그제야 정적에 싸인 식탁이 두 사람을 겨냥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기 중인 그리사와 식탁에 자리한 이들. 차례대로 아트리스, 마벤, 시네라 순이었다.
그리사는 저녁 식사를 늦춘 주범인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기 와서 그런 대화를 할 생각이 들다니. 당신들도 대단하네요.”
아트리스와 본격적인 말다툼을 벌인 이후로 그리사는 제 속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마벤은 성년도 안 된 게 당돌하기 짝이 없다고 싫어했다만 그건 제 나름의 친해졌단 표시였다.
그리사는 나디사가 채 나르지 못한 스튜 그릇을 들고서 식탁으로 돌아갔다.
그중 음흉한 얼굴의 마벤이 놀리듯 몸을 베베 꼬며 물었다.
“둘이 연애하니?”
이런, 젠장. 질문이 돌고 돌았다. 히아신의 방해 덕분에 해명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몹쓸 장난기에 발동이 걸린 그가.
‘이 질문에 대답은 두 가지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세 번째야.’
라고 대답해 버렸다. 마벤의 놀림은 혹시나 하는 의심이 더해져 수위가 올라갔다.
“비밀 연애?”
히아신의 말을 해석하면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인 개소리라는 것.
히아신의 장난에 놀아난 식탁은 때아닌 웃음과 욕설로 들썩거렸다.
“또 속아요?”
“뭐라는 거야, 이 어린 게!”
“그쪽은 고작 나보다 세 살밖에 안 많거든요.”
나디사는 이처럼 마음이 들뜨는 식사 중에 샤포드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그 넓은 식탁을 둘이서 채울 수 있으려나 싶어서.
기쁨을 온전히 소화할 수 없는 이 밤. 모쪼록 긴 휴가를 바랄 뿐이었다.
* * *
랭키가 손님에게 내어 준 방은 가구 없이 돌바닥만이 있는 협소한 공간이었다.
친히 깔고 자라며 솜으로 된 이불 여섯 채를 빌려준 게 그의 마지막 호의였다.
다 큰 성인만 다섯이라 효율적으로 누울 방법을 연구해야만 했다.
회의를 거쳐 세 명씩 벽에 머리를 대고 누워, 반대쪽에 있는 이들과 발을 맞대고 자는 방식이 채택됐다.
남자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기에 배려가 요구됐다. 다리를 꼬거나 구부렸으며 그 히아신조차 반대편에 있을 여자들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잤다.
이런 환경이 엿 같다고 말하는 마벤은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행운아였다.
나디사는 까다롭지 않은 성미를 지녔음에도 이유 없이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더구나 아트리스가 따로 보자고 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망상의 꽃이 피었다.
설마 부대가 해체된다든가.
목장에 가서 양, 돼지, 염소를 키우라는 임무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부대가 사라지는 것만은 안 된다.
키워 준 마로닌 부부의 반대를 꺾고 들어 온 이상, 그런 하찮은 끝맺음은 곤란했다.
가는 한숨을 내쉬며 뒤척거리던 나디사의 팔다리가 순간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다. 등골에는 소름이 쭉 끼쳤다.
정체 모를 감촉이 종아리에 올라탔다. 성내에서 마주친 삐쩍 마른 쥐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하…….”
이불을 들어 올리는 손이 해풍을 견디는 창문처럼 떨렸다. 범인은 겁을 상실한 쥐 같은 게 아니었다.
반대편 자리인 히아신이 한쪽 무릎을 펴는 바람에 다리끼리 닿은 모양이었다.
여태 밤을 보내는 동안 한 번도 실수한 적 없던 남자가. 수영에, 물고기 사냥에, 설거지에, 식사 준비에. 곯아떨어져 버려 암묵적인 배려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다.
이쪽에서 배려하자 싶어 슬쩍 다리를 옮긴 그 순간이었다. 잠투정처럼 몸을 튼 그의 다리가 벌려 둔 거리를 곧장 따라잡았다.
옮기기 전보다 가까이 붙은 긴 다리는 그녀의 종아리 위에 얹힌 상태였다.
다리를 휘둘러 은근슬쩍 부대끼는 느낌은 분명 의도적이었다.
버릇 나쁜 그의 발끝이 파자마를 젖히고 올라오려 했다.
잠이 달아난 나디사는 누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천사처럼 푹 꺼지는 쿠션을 베고 잠든 히아신이 보였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발끝이 반지르르한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 위쪽까지 넘어오려는 발목을 감싸 쥔 찰나.
“나디사.”
아트리스가 일러 준 약속 시간이 됐다. 오차 없이 제시간에 일어난 그는 재까닥 이불 아래서 빠져나왔다.
그만 일어나라는 턱짓을 한 그가 벽에 걸린 감색 재킷을 챙겼다.
히아신이 발 놀이를 그만두자 아트리스가 깨어난 것. 우연치고 절묘했지만 자는 이를 깨워 따져 물을 것도 아니고.
뒤꿈치를 들고 나간 두 사람이 문을 닫은 그 순간.
아름다운 물풀의 색을 닮은 눈이 반짝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