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 퇴역한 군인 말인가?”
모처럼 정원에서 가진 티타임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갖는 티타임이니만큼 달콤한 과자와 케이크가 즐비한 자리였다.
흔히들 계절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수비타 왕국 명성에 걸맞은 이른 봄꽃이 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를 마시던 란은 싱긋 웃으며 록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하……. 라넌 경도 참 지독한 사람이야.”
“그 발톱 부대 때문에요?”
“그래. 내가 축복해 준.”
착잡한 표정의 록은 보고를 부탁한 신관에게 겨우 미소 비슷한 것을 보였다.
“돌아가도 좋다. 알려 줘서 고맙고.”
“네.”
인사를 하고 떠나는 하급 신관의 눈에는 작은 의문이 일었다.
인원이 여섯뿐인 말단 부대 일을 왜 그처럼 높은 신관이 관심 갖는 것이냐 하는 것일 테지.
낳아 준 부모 없이 신전에서 쭉 자라 온 란에게 록은 대단한 의미였다. 록이 그의 아버지란 말은 헛말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제 아버지의 기행적인 행보가 몹시 싫었다.
“랭키 웨던은 현직에 있을 때도 까다롭고 괴팍한 이였는데. 지금은 나아졌으려나.”
“그러니 자처해서 그 한직으로 간 게 아니겠어요. 듣기로는요.”
“글쎄. 난 라드군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렇게 잘 모르시는 분이 왜 사사건건 관심을 가지시는 건지. 지난번 란이 따로 알아보라고 시킨 보고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신전 밖으로 걸음을 안 하던 그가 라드군 본거지로 가서 내부 정보를 훑었다는 것 아닌가.
신전의 권력으로 누군가를 찍어 내리는 것에 극히 거부감을 가진 이가 록이었다.
그러하니 인망이 두텁고 그 능구렁이 라넌조차 존중을 표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도 곧 옛말이 되게 생겼다. 이 사소한 사건을 부풀려 아버지에게 흠집을 내려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이제 그 부대에 대해서는 그만 알아보세요.”
록은 걱정스러워하는 란을 보며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런 말을 하니.”
“그렇잖아요. 두 번째 신관이라는 지위로 일개 부대에 그만한 관심을 쏟는다면, 다른 이들이 오해할 수 있어요.”
“오해?”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는 표정 때문에 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그는 상급 신관답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대화를 이끌었다.
“그 부대는 조금 독특하다고 들었거든요. 소수 민족 중심이라나……. 여하튼 라드군에서 그렇게 배치한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록이 신경 쓸수록 마치 그 결정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부드러운 말씨로 말을 마친 란은 록의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따랐다.
쪼르르, 찻물이 흐르는 소리만이 록의 응접실을 돌아다녔다.
“란.”
향긋한 차 냄새가 퍼졌지만 고심 중인 록은 조금도 그 향을 즐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알아서 하마. 너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후계 수업에만 집중하렴.”
후계 수업이요? 아버지께서 이러고 다니시는데 왜 그 후계 수업에 집중해야 하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인내심을 발휘한 란은 보상처럼 향긋한 차 냄새를 맡았다.
“오늘 차가 좋아요. 특히 향이요.”
“왕실에서 들어온 선물이야. 감사한 일이지.”
“그렇군요.”
이내 란의 무해한 미소는 찻잔 뒤로 감춰졌다.
언젠가 이 차를 다시 한번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지금 란의 혀는 아무런 맛도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 * *
걸핏하면 노인은 발톱 부대를 돼지에 비유했다. 돼지를 키울 형편도 아니면서 말이다.
‘차라리 돼지를 먹이는 게 낫지. 돼지는 먹인 만큼 보람이 있거든.’
새벽마다 칼같이 성의 종을 울리는 노인. 그는 왕년에 이름 좀 날렸다는, 과거 심장의 핵심 인물이자 수장인 랭키 웨던이었다.
하지만 랭키 웨던의 그 위명은 은퇴 이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유한 왕실조차 잊은 성을 지키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발톱 부대는 닭장 같은 곳에서 일어나 닭보다도 못하게 먹고 닭보다 많이 일했다.
랭키 웨건이 절벽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울 동안 벽을 보수하고, 나무를 해 왔으며, 하루 두 번 그의 식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랭키 웨건은 단 한 마디의 고마움이 없었다.
“아으, 씨!”
마벤은 나르던 장작을 하얀 모래사장에 패대기쳤다.
저녁에 생선이 먹고 싶다는 랭키의 요청에 낚시를 맡은 남자들은 아침부터 바다로 들어갔다.
“저 미친 노인네! 이 임무는 언제 끝나는 거야?”
마찬가지로 장작을 나르던 나디사는 마벤이 버린 잔가지를 발로 모았다.
새것을 주우러 숲에 다녀올 기력이 없으니 재활용할 계획이었다.
맨손 낚시라는 걸 처음 해 본 남자들도 기력 없긴 마찬가지였다. 아침엔 여자들을 배려해 셔츠 아래 입는 하얀 내의를 입고서 수영했다.
그러나 정오의 봄 햇살이 성가셔지자 전부 그 내의는 벗어 돌에 널어 두었다.
노을빛 바다의 깊은 곳까지 잠수하고 나온 아트리스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젖은 갈색 머리를 들어 올린 그는 해변에 서 있는 두 여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헤엄쳐왔다.
“좀 잡았어?”
“아니. 너무 빨라.”
“하, 미치겠네.”
아트리스는 물 밖으로 빠져나와 당연한 듯 모래 위에 누웠다.
푸른 파도가 밀려와 그의 허벅지를 덮었다. 다음 파도는 탄탄한 배 아래까지 닿을락 말락 했다.
그즈음 하나둘 수면 위로 머리가 나왔다.
장작을 내려놓은 나디사는 뻐근한 허리를 펴다가 바위 위로 올라온 히아신을 보았다.
다리를 대롱거리며 손으론 젖은 은발을 털어 말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도와주려는 듯이 혼탁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와는 그때 이후로 조금 어색해진 편이었다. 요 며칠 자신이 한 말을 의식한 것처럼 웃고 다니긴 한다만.
“어떡하죠. 물고기 못 잡아서.”
“라드들, 한테, 잡아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살갗에 묻은 모래를 턴 시네라가 대답했다.
그러나 대화를 들은 아트리스는 비관적인 답을 놓았다.
“걔들도 배고파서 우리한테 주는 대신 자기들이 먹을걸. 아직 우리에게 그 정도 충성심은 없어.”
“역시 그런가…….”
지쳐 있는 세 남자를 보조하듯 서 있던 나디사는 자꾸만 히아신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결단코 그의 잘 단련된 상반신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 바닷바람을 느끼던 그가 고개를 뒤로 눕혔다.
그의 누운 시선에 딱 걸린 나디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색함을 지우는 데엔 미소가 최고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미소를 받은 이는 정색, 무반응이었다. 자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뜬금없이 웃으면서 말이다.
바위 위에 늘어져 있던 히아신은 한 바퀴 몸을 굴려 일어났다.
바닷물 먹은 흰색 바지와 매끈한 상체를 과감하게 보여 줬다.
저벅저벅 부대가 모인 해변가로 오는 그의 걸음이 생소한 바다 냄새를 몰고 왔다.
“히아신 아스. 너도 못 잡았어?”
“그러게? 몰라.”
오늘의 낚시는 대실패였다. 꼼짝없이 랭키 웨던의 욕을 저녁 대신 먹게 생겼다며 절망할 무렵.
딱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모두를 주목하게 했다.
“장난치지 마, 히아신.”
“이게 뭘까.”
설마 진짜 잡았으려고 하는 시선은 놀라움, 그리고 기쁨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짜잔.”
파닥거리는 생선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마술하듯 주머니에서 나오고, 또 나오는 생선은 총 세 마리였다.
양손 가득 은빛 생선을 든 히아신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때?”
“와, 진짜 맛있겠다.”
“하하.”
마벤의 감탄사에 만족한 히아신이 누워 있는 남자들에게 그 생선을 던졌다.
아트리스의 배 위에 떨어진 생선이 파닥거리며 그를 때렸다.
“히아신!”
나머지 생선도 던지자 누워 있던 이들이 바빠졌다.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는 생선을 받아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벤은 표정이 구겨져 생선의 꼬리를 집고 있는 아트리스 덕에 원 없이 웃었다.
“얘 표정 봐 봐!”
“난 잡았으니까 전달은 너희가 하는 거야.”
한 개뿐인 욕탕을 제일 먼저 쓰겠다며 떠나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래도 생선을 세 마리나 잡아 와 발톱의 체면을 세워 주질 않았던가.
“나디사!”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나디사는 뒤로 걷기 중인 히아신과 눈이 마주쳤다.
“왜 불러?”
“디디!”
거리가 있어 들리지 않나 보다. 나디사는 허리를 굽혀 아까 내려놓았던 장작을 챙겼다.
버려진 마벤의 몫까지 주섬주섬 줍고 일어나 보니 그새 석양이 졌다.
이곳에 온 지 어느덧 사흘째.
명령 전달 말고는 히아신과 접점이 없었다. 일이 바빠 대화할 틈도 없었고.
그에게로 가는 걸음은 모래에 폭, 폭, 빠졌다. 군화로 들어온 까슬한 모래알이 사박거렸다.
인내심 있게 기다린 그는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성을 향해 함께 걸었다.
“생선을 잡았네. 대단하다.”
“디디, 나는 말이야.”
말이 겹쳤다. 씨익 웃는 히아신에게 나디사는 말을 양보했다.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나는 말이야. 네 말이 계속 생각나더라고.”
“무슨 말.”
“왜 웃지 않는가. 음, 그건 아주 짜릿한 질문이었어. 내 생각에도 나는 지금 재밌지가 않거든.”
그의 오목하게 팬 가슴골 사이로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저대로 두면 감기 걸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차였다.
“이거 나도 줘.”
그는 나눠 들자더니 장작더미를 전부 가져갔다. 빈손이 된 나디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쫓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
“싫어.”
“줘.”
그녀의 손을 피해 다니는 장난질하던 그가 절벽으로 이어진 계단에 올랐다.
석양의 여운 같은 보랏빛 하늘과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덕분에 알았어, 디디. 나는 내가 만든 예외를 좋아하지, 남이 만든 예외는 정말 싫어한다는 걸.”
간간이 웃음 섞인 파도 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떠났다.
“수영하고 나니까 머리가 시원해져서 다시 돌아오고 있어. 그러니 나를 놀래키지 마, 디디. 너까지 싫어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만든 그늘을 떨치고 일어난 그는 전보다 훨씬 이상해진 상태였다.
이번에는 예외를 싫어하신다고.
지금껏 그가 싫다고 말한 것을 나열하고 세 보다가 이 꽃 피는 봄이 다 가겠다.
좋은 것은 얼마 없으면서 싫은 것만 잔뜩인 남자. 하여간 그는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