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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2화 (22/210)

22화

어젯밤 아트리스가 지도를 세 차례나 확인하고 찾은 루트는 전보다 순조로웠다.

먹구름이 오늘의 유일한 걸림돌이었다. 스쳐 오는 바람에서 짭짜름한 바다 냄새가 났다.

목적지 근방까지 오는 데에 이틀을 소비한 셈이다.

마른 육포만 먹은 배 속에 천둥이 쳤다. 그때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는 나디사의 뒤에서 강풍이 불었다.

추격하듯 따라붙은 히아신이 내는 바람이었다. 어젯밤을 기점으로 달라진 그는 맥없이 고삐를 당기고 있었다.

잠잠히 지켜보던 나디사는 안전을 위해 잠시 대형을 이탈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일별한 아트리스는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금 앞을 봤다.

나디사는 대형에 무리 없는 수준의 속도를 유지하며 히아신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한 히아신의 눈빛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안녕.”

일어나자마자 눈 뜨고 봤음에도 히아신은 처음 본 사람처럼 인사했다.

라드의 목줄을 잡아당겨 조금 더 뒤로 이동한 나디사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어디 아파.”

“배고파.”

어저께 주머니에 있는 비상식량을 다 턴 것이 기억났다. 당장 방법은 없었다.

“참아 봐.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아.”

“음, 디디.”

“디디, 는 헷갈릴 위험이 있으니까 그냥 나디사라고 불러.”

“왜 나한테 잘해 주려고 해?”

먹구름같이 칙칙한 목소리와 달리 눈가에 걸린 웃음은 한결같았다.

“잘해 준 적 없는데.”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설령 잘해 준다고 하더라도 사심이 없는 한 동료 사이에 문제 될 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히아신은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라드를 붙여 왔다.

여유 없이 딱 붙게 된 라드 두 마리는 신경전을 하듯 약간의 몸싸움을 벌였다.

독립심이 강한 라드의 특성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몰아야 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었다.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아트리스가 아는 날에는 또 싸움판이 벌어질 터였다.

가뜩이나 먹구름 낀 하늘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운 시점이었다.

“히아신. 떨어져.”

“나한테 너무 잘해 주는 거 싫어. 너는 나를 무서워해야 하잖아.”

어쩔 수 없이 나디사는 목줄을 왼쪽으로 잡아당겨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히아신은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의미 없는 몸싸움을 시작했다.

쿵, 라드가 밀려 왼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중심이 흔들렸다.

“왜 이래.”

아트리스의 눈치를 보며 나디사는 조용히 그를 질타했다.

“무섭지 않아?”

“내가 왜?”

나디사는 밀어붙이고 있는 그의 라드를 피해서 조금 더 위로 날았다. 완벽한 경로 이탈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너는 알잖아. 내가 이상한 거. 뭔가 다르다는 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앞으로 치고 나가려 했으나 히아신은 기어코 그 위까지 따라왔다.

공격적으로 날고 있는 그 덕분에 바람의 세기가 달라졌다.

몸이 기우뚱할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나디사는 허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히아신. 그만해.”

“나는 네 마음이 궁금할 뿐이야, 디디. 나를 무서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다정한 네가 신기해서.”

그가 늘어놓는 궤변은 나디사의 방향을 다르게 만들었다.

바람을 읽으며 내려와 그를 힘껏 밀었다. 그의 디디가 충돌로 인해 밀려났다가 급히 중심을 잡았다.

“히아신.”

이 충동적인 남자를 제어할 방법은 싸움질이 아닌 대화였다.

“응?”

“왜 안 웃어, 요즘.”

밀려나자마자 못된 계획을 짜던 히아신은 잠깐 동작을 멈추었다.

“네가 안 웃으니까, 이상해서 자꾸 눈길이 가는 거잖아.”

거봐. 또 웃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 없이 헤실거리던 사람이 그러니까 체크하는 것뿐이었다.

그 정도 관심조차 싫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여하튼 이런 공격은 정말이지 어린아이 같은 방식이었다.

“동료니까 관심 가졌을 뿐이야. 그게 불편하면 관심 가지지 않을게.”

이쪽의 대화가 길어지자 소란을 감지한 아트리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들킬까 싶은 나디사는 갑작스럽게 출발하여 원래의 자리로 자연스레 돌아갔다.

하지만 수십 번의 훈련을 지휘한 아트리스의 눈은 정확했다. 멋대로 이탈한 정황을 눈치챈 그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아! 빨리 가야겠다!”

“으아, 아직도 멀었어?”

내리는 비의 무게만큼 라드의 속도도 처지고 있었다. 빗속에서 라드를 능숙하게 다룰 만큼의 실력이 아직 그들에겐 없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아트리스의 시선은 아래를 훑었다.

파도가 치고 있는 절벽, 푸른 지붕이 솟은 작은 성이 보였다.

그림과 일치하는 장소를 발견한 아트리스가 허리를 수그렸다.

“내려가자.”

오늘 저녁은 따듯한 식사와 침대가 있기를. 모두의 염원이 담긴 하강은 차가운 빗줄기가 따르고 있었다.

* * *

빗줄기가 굵어지는 만큼 절벽을 치는 파도의 높이도 차츰 높아졌다.

빗물과 파도에서 튀기는 물에 흠씬 젖은 발톱 부대는 낡은 성을 보며 경악하는 중이었다.

해풍을 견디지 못하고 부식 중인 벽돌 틈으로 이끼 같은 것이 껴 있었다.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은 보이지만 전체적인 외관으로 보건대 그다지 큰 효과는 보지 못한 듯싶었다.

“라드군입니다.”

쇠 문고리로 여러 번 문을 쳤다. 성난 파도 소리에 놀란 마벤이 망토 물기를 짜며 달달 떨었다.

“잘못 찾아온 거 아닐까?”

“사람을 나눠 근방을 더 수색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아트리스는 재차 젖은 지도를 펼쳐 들었다.

이 근방에서 푸른 지붕을 가진, 이만큼 낡은 성은 이곳 하나였다.

확신을 가진 아트리스는 다시 한번 문고리로 쾅쾅 문을 찧었다.

녹물이 마른 문고리가 나무 문짝을 부수기 직전까지 갔을 때였다. 드디어 안쪽에서 굼뜬 기척이 들렸다.

빗물 들어간 군화가 뒤로 물러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성의 주인은 무려 10분 동안 달그락거리며 자물쇠를 풀었다.

“오래도 걸리네…….”

철썩 치고 올라오는 파도 소리에 맞추어 문이 열렸다. 자다 깬 듯한 성의 주인은 퀭한 눈으로 마중을 나왔다.

“누구.”

“라드군입니다.”

“라드군……?”

보호나 간호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왼팔이 불편한 백발의 노인이 성의 주인이었다.

완전히 문을 열어젖힌 노인은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섰다.

노인의 뒤로 보이는 긴 계단에 시선을 준 아트리스가 정중히 요청했다.

“우선 들여보내 주시죠. 먼 길을 와서 다들 지쳐 있습니다.”

“너희들이 누군지 알고.”

불신 가득한 노인의 쉰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한숨을 삼킨 아트리스는 제 배지를 뜯어 노인의 손에 쥐여 줬다.

“발톱 부대입니다. 위에서 명을 받고 왔습니다. 본인이 요청하신 게 아닙니까?”

노인은 제 손에 들어온 배지를 보며 픽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 아직도 이런 부대가 있다니.”

누구 하나 좋은 표정일 리 없을 텐데도 노인은 그 불쾌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들어와. 아무래도 너희들이나 나나 똑같은 신세인 것 같으니.”

썩 석연치 않은 초대였다. 노인은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꼭 닫으라고 당부했다.

혹시라도 문이 썩으면 군에 비용을 청구한단다.

다른 대안이 없기에 모두 습기가 자욱한 성 내부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로 이어지는 일자의 계단은 그 흔한 난간도 없었다. 그마저도 갈라지고 덜컥거려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아, 그 물 자국.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계단 청소부터 해.”

까탈스러운 노인은 자그마한 물방울 자국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다가 복도 끝에 창고로 쓰일 법한 방을 소개했다. 오랫동안 닫혀 있었는지 열릴 때 기괴한 소리가 났다.

“이 방을 쓰도록 해.”

“저희 전부가 말씀입니까.”

“너희 전부가.”

막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마벤이 그 말을 듣고 악쓰듯 소리 질렀다.

“저는 여자거든요! 얘네랑 어떻게 자요?”

“그럼 밖에서 자. 군인에 여자가 어딨고 남자가 어딨어.”

“미친…….”

잠자리를 제공한 노인은 뒷짐을 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문간에 기댄 아트리스는 빗방울이 들어간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더러운 건 둘째치고 방이 비좁아 남녀 할 것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잘 판이었다.

“아.”

계단에 선 노인은 잘못하다간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내일 아침을 먹고 싶으면, 새벽닭이 울기 전에 깨어나야 할 거야. 할 일도 아주 많거든.”

처벅, 처벅, 올라가는 노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마벤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저거 미친 노인네 아니야?”

처음으로 마벤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없었다.

침묵이 곧 동의인, 세찬 파도가 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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