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언덕을 뛰다시피 내려간 나디사는 라드 여섯 마리가 노는 들판에서 그리사 데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배를 깔고 누운 라드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중이었다.
“그리사.”
그리사는 쌀쌀한 초저녁 바람을 맞으며 에이의 안장을 앉기 좋게 고쳤다.
“잠시만, 그리사.”
본체만체하는 그가 훌쩍 날아갈까 싶어 뛰어온 나디사는 말이 빨라졌다.
“기다려. 임무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무표정한 그리사는 거친 손길로 에이의 안장을 손보며 되물었다.
“임무? 그딴 걸 임무라고 부를 수 있나요?”
설득이 먹히지 않는 양 라드의 목줄을 유유히 손에 감았다.
“그건 아트리스가 어쩔 수 없는 문제 같은데. 우리가 밉보인 건 사실이잖아.”
“그게 그 사람의 변명이라면, 나도 더 할 말 없어요.”
“그리사. 지금 떠나면 너는 명령 불복종으로 더한 일을 당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리고 뭐요! 왜 와서 참견이죠?”
애써 감은 목줄을 던진 그리사가 성큼 그녀에게 다가섰다.
얼굴을 마주한 그녀의 차분함을 깨부수고 싶은 듯이 비양조로 나왔다.
“참견하지 마요. 당신도 곱게 보이진 않으니까.”
“…….”
“아니, 차라리 당신이 수장이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나마 우리 중에서 윗사람들 시선을 끄는 건 당신이었으니.”
그는 제 감정이 수습 안 되는 소년의 눈을 했다.
이대로 이탈하게 둘 순 없어 도망치는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화가 잔뜩 난 그는 곧장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레 잡았다.
“내가 봐줄 거라고…….”
“이거.”
평정심이 깨진 소년의 품에 망토를 안겼다.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불길을 그 망토가 꺼 주길 바랐다.
표정이 일그러진 그리사는 쥐고 있던 손목을 실수인 척 놓았다.
이성을 찾아가는 증거로 그의 귀 끝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럴 줄 모르고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 화풀이를 왜 우리한테 하는지 모르겠어. 이 중에서 너보다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이는 없어. 다 똑같아.”
“……내가 지금.”
“무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데리고 그래도 얼추 부대 비슷한 꼴을 만들어 놓은 건 아트리스야. 첫 정식 임무가 네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우리 몫 아닐까.”
그리사는 가슴팍에 놓인 망토를 꽉 쥐었다. 그런 식으로나마 수치심을 잊어 보려는 듯했다.
“우리 종족은 이런 취급을 받을 위치가 아닙니다.”
해가 진 들판은 어둡고 적막했다. 바람에 순응하는 풀 위로 잔잔한 물결이 쳤다.
“당신이 그렇게 비행을 잘하는 이유는 플란 종족이라서고. 사실 발톱이 아니라 몸통에서 시작하는 게 맞는 거죠.”
“그래.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여기잖아.”
“당신은 그게 아무렇지 않나요? 우리 가문의 선조는 라드를 모는 정예군이었어요. 내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발톱에 왔다는 걸 듣고…….”
젠장, 나지막이 욕을 뱉었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랐다. 밝은 달빛이 한층 더 견고해진 눈을 비췄다.
남이 해 주는 어른스럽다는 말로 저 자신을 다독였을 터다.
그게 그리사에겐 독이 된 눈치였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커가는 불안은 들키기 싫었을 것이다.
“돌아가자.”
“됐어요. 그 난리 피우고…….”
“이번 임무 잘해서, 우리 꼭 위로 가자.”
그는 믿기지 않는단 보라색의 눈을 하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감정도 없어요? 내가 밉지도 않나?”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뿐, 놀랍게도 밉지는 않아. 그리고 넌……. 나랑 비슷한 듯 다르네.”
그가 발톱을 벗어날 성과를 내고 싶은 데에는 가문이란, 합당하고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친모와 같은 입장이 되어 진실을 알자는 알량한 목표와 봉급이 전부였다.
또 플란 종족임에 자부심이 있는 그리사와 달리 그녀는 핏줄과 동족을 인식하며 살아오진 않았다.
그와 동질감을 느끼지만 자신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이유였다. 성년도 안 된 이의 야심 찬 포부가 못내 부러웠다.
중천에 뜬 달을 보니 슬슬 대화를 끝내고 돌아갈 때였다.
나디사는 로마의 허리춤에 채워 둔 주머니를 열어서 비상식량을 꺼냈다.
볼일을 기다려 주던 인기척은 그녀의 뒤를 착실히 따르기 시작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멱살잡이하면서도 흔들리고 깨지는 그의 시선을 읽었다.
이곳 사람들은 각자의 불안을 각자의 방식으로 삭혔다. 그렇기에 티 나지 않는 것일 뿐일 터다.
밤하늘이 어두워질수록 별의 반짝임은 돋보였다. 아낌없이 빛을 내는 다정한 별 무리 덕에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아까 말한 거.”
그리사의 입술은 언덕에 다 왔을 즈음 열렸다.
제 손으로 뜯어낸 망토를 고쳐 다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플란 종족이라서 당신이 비행을 잘한다고 했지만.”
언덕에 발을 걸쳐 둔 나디사는 삐뚤어진 자세로 그를 돌아봤다.
말을 시작한 그리사의 얼굴은 별빛 때문인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그보단 당신 자체의 센스도 있어요. 당신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건, 아까 그건, 내가 기분 나빠서 한 말이니까요.”
말끝을 흐리는 걸로 보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했다.
그 고고하던 그리사 데이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디사는 쑥스러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 칭찬이지?”
“네?”
“칭찬 같아.”
절대 친해질 수 없는 종족의 사람이나 절대 만날 일 없는 신분의 사람이나. 한날한시에 모여 이렇게 말을 나누는 것이 신기했다.
“가자.”
자신만큼 쑥스러워하는 그리사를 두고 혼자 언덕을 올랐다.
그의 붉은 뺨이 모욕감 때문인지 무언지 모르겠으나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사!”
그새 장작불을 피운 발톱 부대는 나디사의 귀환을 기다린 것처럼 분주해졌다.
“나디사 마로닌. 그래도…….”
편히 앉아 있지 않고 서성이던 아트리스는 하던 말을 삼켰다. 뒤따라온 흑발의 청년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그리사를 데려왔네? 그나저나 길을 찾은 것 같아. 아트리스가 지도를 잘못 읽은 게 아니라, 이것들이 옛날 지도를 준 거 있지?”
“아, 앉아. 두 사람 다.”
자리에 앉은 아트리스는 그리사의 합류를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장작불 앞에 선 그리사는 어물쩍 합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경솔했어요.”
싸움을 벌인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던 시선이 아트리스 쪽으로 몰렸다. 화해의 손을 내민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 시선을 무시한 아트리스는 장작불이 죽지 않게 지키며 말했다.
“동이 트자마자 움직일 거니까. 앉아서 쉬어.”
그리사까지 앉음으로써 모두 모이게 된 발톱 부대는 불티가 튀는 장작불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글거리는 불길에 손발을 녹인 나디사는 조용한 건너편 자리로 눈이 갔다.
무릎에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는 히아신은 왠지 다른 때보다 기운이 없었다.
문득 주머니에 챙겨 온 것이 생각난 그녀는 육포를 장작불 건너편에 건넸다.
“이거 먹어.”
불을 쬐던 이들의 관심이 마른 육포로 모였다.
천천히 고개를 든 히아신은 달갑지 않은 것처럼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배고프다고 그랬잖아.”
선뜻 받아먹고 웃을 놈의 반응이 이상했다. 초점 나가 풀어진 눈빛은 자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왔다.
“안 먹으면 내가 먹는다?”
숭, 하고 사라진 육포는 마벤이 가져갔다. 넉살 좋게 육포를 굽는 그녀 덕분에 분위기는 전환될 수 있었다.
“더 있어.”
가져온 육포를 바닥에 놓고서 한 사람씩 나누어 주었다.
군소리 없이 받아 간 부대원들의 순서가 지나고 다시 히아신 아스만이 남았다.
“배 안 고파? 얼른 받아.”
팔이 아파 와서 점점 손이 내려가고 있었다. 끝끝내 거부할 듯하던 히아신이 손을 뻗어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받쳤다.
주인처럼 얄궂은 새끼손가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스쳤다.
육포를 가져간 히아신은 바로 먹지 않고 나디사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나디사는 장작불을 가리켰다.
“구워 먹어. 딱딱해.”
그러자 청개구리처럼 딱딱한 육포를 씹는 그를 보며 어이없어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나디사는 남들이 앞으로 갈 때 혼자 뒤로 가는 그의 성격을 잘 알았다.
타닥, 타닥,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날이 풀린 초봄의 밤을 지켜 주었다. 이렇게 또 무사히 넘어가는 하루였다.
환하게 동이 트자 예정한 대로 아트리스는 앉아서 졸고 있는 이들을 모두 깨웠다.
잠자리가 불편하여 늦게 깨는 사람은 있었으나 부대는 제시간에 맞춰 출발 준비를 끝냈다.
하룻밤 지낸 들판을 떠난 건 먹구름 낀 오전이었다.
잠이 덜 깬 주인을 태운 라드들이 차례로 하늘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