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리사 데이. 모범생이던 그가 등을 돌리자 아트리스 또한 동요했다.
그는 잘못이 없었다. 수장이기에 윗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만.
하지만 바른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시기였다.
첫 정식 임무라고 기대가 컸던 나디사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산 넘어 산. 라드군에서 살아남기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 고꾸라진 분위기는 살아날 기미가 안 보였다.
임무를 통해 성과를 보여 주면 이보단 대우가 나아지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희만의 허상이라는 걸 깨닫고 말았으니.
“이봐! 아트리스!”
짐을 꾸려 하늘에 오르고서도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지도를 갖고 있는 아트리스가 초행길이다 보니 실수를 했다.
“아까 왼쪽이라며!”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야 소통이 됐다. 마벤의 입 모양을 읽은 아트리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목적지 부근으로 갈수록 바람이 거세지는 느낌이었다.
하필 바다 부근에 있는, 주인이 진즉 왕실에 팔아넘긴 낡은 성이었다.
대책 없이 싼 값에 사고부터 본 왕실도 용도를 찾다 찾다 임시 기지로 쓰는 데였다.
한 손으로 중심을 잡은 아트리스는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파닥, 파닥, 바람에 의해 구겨지는 지도를 그가 이로 물어서 바르게 폈다.
때마침 바람을 타고 다니다 앞쪽까지 날아온 히아신은 웃음을 터뜨리며 라드의 목줄을 세게 당겼다.
끼이이이, 라드의 울음소리를 업고 뛰쳐나온 히아신이 바람에 접힌 지도를 강탈했다.
“히아신 아스!”
헝클어진 은발을 보는 다섯 명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미움을 즐기는 듯한 히아신은 펼친 지도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여기 아닌데?”
“뭐라고.”
“그리고 나 배고파.”
지도를 든 히아신이 아래로 하강하는 자세를 취했다. 윙크를 해 보인 그는 그만두라고 하기 전에 내려가 버렸다.
“저 자식이…….”
“아트리스, 잠시만.”
옆에서 시네라가 말려 보았어도 아트리스는 그를 쫓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떨어지고 있는 두 마리의 라드를 보며 위에 남아 있는 이들은 깊게 탄식했다.
“저 바보들. 이럴 시간 있어? 빨리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몰라요. 어차피 이따위 임무에 늦어도 아무도 상관 안 할 텐데요.”
“그리사. 꽤 반항적이다?”
다혈질인 마벤은 자주 성질을 냈지만 그만큼 풀리기도 빨리 풀리는 편이었다.
반면 신중하다는 평을 듣던 그리사 데이는 이번 임무를 계기로 완전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지시에 순응하지 않는 건 물론, 모든 일에 적극적이던 그가 한발 물러서서 관망적인 태도를 보였다.
땅으로 떨어진 라드 두 마리는 올라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도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순간에 그리사의 라드도 목을 아래로 숙였다.
“뭐야, 다들. 왜 저래.”
위에 남은 것은 갈팡질팡 중인 세 사람. 나디사는 땅에 가까워지는 세 마리의 라드가 어지러이 섞이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곧 밤이니까. 내려가서 쉬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저 바보들이랑? 길바닥에서? 차라리 나를 죽여.”
“그럼 너는 여기 떠 있어, 마벤.”
나디사가 웃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본 마벤은 발을 콱 굴렀다.
“저게! 사람 놀리고 있어! 야, 시네라. 너 어쩔 거야?”
그러나 시네라 또한 나디사를 따라서 라드의 목을 내린 후였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마벤이 비명을 질렀다.
외로이 울려 퍼지는 하늘에서의 비명은 결국 대세에 순응했다.
* * *
큰 어려움 없이 착륙하고 내려오자 들판 위에 풀어져 있는 세 마리의 라드가 보였다. 그 주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동녘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합을 맞추어 장기 비행을 해 본 적이 없는 데다가 체력이 약한 마벤의 경우엔 수직 비행이 어려워졌다.
지친 라드를 세워 둔 나디사는 어렵지 않게 길을 잡았다. 말싸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히아신은 일정이 짜 맞추어진 군인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남을 놀리고 괴롭히는 데엔 최선을 다했다.
정 반대편에 선 듯한 아트리스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아트리스가 모르는 걸 나디사는 알고 있었다. 히아신이 헐렁해 보여도 남자 하나쯤 가지고 놀 만한 실력이 있단 말이다.
그러하니 함부로 시비를 걸었다가 다치는 건 아트리스 쪽이란 이야기였다.
봄맞이 잔디가 솟아나는 언덕 위였다. 오가는 목소리는 험하고, 시끄럽고, 격정적이었다.
언덕을 오르는 종아리가 당겨 왔으나 그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디사의 발이 가까스로 언덕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녀는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히아신은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구경 중이었고 싸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사와 아트리스였다.
“그러니까 항의도 하지 않고, 이런 걸 받아 온 게 문제란 거죠!”
“그걸 항의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아무리 수장 배지를 달았다지만 나도 너와 똑같은 입장이야. 이미 지난번 항의로 사람 둘이 추락해 죽을 뻔했어.”
“나라면 달랐을 겁니다. 기세 좋게 수장하겠다고 나선 뒤로 당신이 한 일이 뭐죠?”
양쪽 다 과열되어 있었다. 그때 그녀를 발견한 히아신의 부름은 소란 속 한 줄기 빛이었다.
“나디사!”
부대에 들어오고 나서 히아신의 얼굴이 이처럼 밝았던 적이 있었나.
“여기서 구경해!”
한참 말싸움 중인 두 남자의 눈을 피해서 히아신에게 달려갔다.
유일한 목격자인 그의 설명이 필요했다.
“히아신.”
“왔어?”
“왜 저렇게 싸우는 거지?”
“그건 이것 때문이야.”
“이거?”
히아신이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쳤다. 듣고 싶으면 이리와 앉으라는 뜻이다.
잡초밭에 풀썩 주저앉은 나디사는 어서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장난할 상황이 아니잖아.”
“내가 만든 상황 아니야.”
“히아신.”
“나는 배고파서 쉬려고 한 것 뿐인데. 갑자기 쫓아와 싸우는 걸 어떡해. 그리고…….”
“그리고?”
“난 싸움이 좋아.”
도움이 되지 않는 히아신은 그녀가 어디 가지 못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이 싸움판처럼 후끈한 팔을 감아두고 손가락은 까닥거렸다. 같잖은 지휘자 흉내였다.
“말려야 돼.”
“가끔은 말이야, 디디. 싸움도 필요해.”
디디. 나디사는 그의 라드의 이름 또한 디디인 것을 기억하곤 그의 손을 팍 밀쳤다.
“왜 네 라드의 이름과 내 애칭이 똑같아?”
“와우, 역시, 난 네가 이래서 좋아. 그걸 다 지난 지금 물어본단 말이야? 무척 세심한 성격이구나.”
그러나 말로만 공격하던 그리사가 아트리스의 멱살을 잡은 순간 잡담은 끝이 났다.
히아신은 놀란 척 입을 가렸지만, 웃고 있는 눈이 모든 걸 말해 줬다.
“그리사. 그만해.”
나디사는 쏜살같이 일어나 그 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트리스는 멱살이 잡히자 도리어 침착해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앙금이 가신 눈은 아니었다.
“놓아. 그리사 데이.”
“수장을 다른 사람한테 넘긴다고 하면, 그때 놓아주죠.”
“네가 하면 다를 것 같나?”
“다를지, 안 다를지. 보여 준다고요.”
잘 단련된 그리사의 팔은 각목 같았다.
“뭐 하는 거야! 밤도 오고 있는데!”
“그, 그리사!”
길을 헤매다 온 마벤과 시네라까지 합류하자 아트리스는 직접 그 무례한 손을 잡았다.
“윽.”
멱살을 놓친 그리사의 손이 밀렸다. 한계점에 다다른 듯 아트리스가 손목을 비틀 기세로 말했다.
“놓아. 다시는 목줄도 못 잡게 부러뜨리는 수가 있어.”
건조한 협박을 들은 그리사의 입술엔 비웃음이 진해졌다.
“해 보든가요.”
“그리사!”
끼어든 마벤과 나디사에 의해 두 사람은 간신히 갈라졌다. 나디사는 그리사의 양팔을 죄인처럼 잡아 뒤로 끌었다.
마벤이 끌고 간 아트리스는 어느덧 중심을 잡고 서서 풀어진 코트를 여몄다.
주먹 쥔 모양을 보니 신사다운 화해는 텄다.
스산한 침묵이 내려앉은 언덕의 마무리는 히아신이 지었다.
“조금 더 더럽게 싸워 주지…….”
그리사는 한심해 죽겠다는 듯이 웃은 다음 나디사의 팔을 뿌리쳤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그녀는 군화 굽 덕에 중심을 버텼다.
언덕을 내려가며 그리사는 어깨에 달린 망토를 뜯었다. 하얀 군복만 입고 떠나는 그의 걸음걸음마다 감정이 실려 있었다.
패전국 깃발처럼 버려진 푸른 망토가 언덕으로 날아왔다.
바람의 이동을 지켜보던 나디사는 뛰어가 망토를 붙잡았다. 합리적 인간형의 표본이던 그가 이렇게까지 사나워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보내. 저러다가 말겠지, 뭐.”
“내가 가 볼게.”
안타깝지만 모두 망토를 들고서 뒤쫓는 나디사에게 성공률이 없다고 봤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둑해지는 오후는 내리뜬 녹색 시선을 가려 주었다. 그 시선이 발하는 차가운 기운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