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사건 다음 날 눈을 뜬 마벤 로사의 부상은 크지 않았다.
시네라 칸은 그다음 날, 가장 마지막 날에 나디사가 깨어난 셈이었다.
군부 내에 있는 의사의 말로는 충돌 때문에 생긴 부상을 제외하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세 명의 신입이 실려 나간 이 사건에 대해서 윗선에서는 쉬쉬하는 중이었다.
한결같은 무시에 속은 쓰라렸지만, 그래도 아예 성과가 없진 않았다.
라드의 머리가 발톱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실무를 심장 쪽이 다 보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머리에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라드군의 수장은 머리니 말이다. 심장은 머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고, 뛰어난 신입이 있다는 말에 차근차근 특수 무기와 정식 임무를 주라는 명이 떨어졌다.
아트리스는 어설픈 지휘를 한 것이 꽤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식사 때마다 수프를 나르려고 했으니.
그리고 그의 침대에서 일어나게 된 경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왕국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해 준 침구는 가져다 버린 모양이었다.
세련된 프릴이 달린 양털 이불이 새 침대에 덮여 있었다. 부잣집 아가씨인 마벤 로사의 취향이었다.
그래 놓고선 그녀는 자기가 그랬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은 양 시침을 떼고 있었다.
“마벤.”
방으로 돌아온 나디사는 방구석에 앉아 책을 보는 중인 마벤에게 말을 걸었다.
오자마자 바뀐 침구를 보았다. 하지만 마벤이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아, 쑥스러운가 싶어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책 거꾸로 들었어.”
“하.”
티 나게 헛기침을 한 마벤이 책을 덮어 침대에 던졌다.
그나저나 안 본 동안 가구가 하나 더 늘었다. 이 비좁은 방에 꾸역꾸역 넣어 둔 티 테이블은 잘 조경된 정원에나 어울릴 법했다.
그런데 마감이 끝내주는 분홍색 벨벳 의자가 두 개였다.
그전까지의 마벤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평소였다면 의자는 하나만 놓아두었을 거다.
“몸 건강해 보이네.”
“응.”
찻물도 없는 주전자를 들었다가 놓는 소리가 요란했다.
새 셔츠로 갈아입고 한숨을 돌린 나디사는 힘이 빠져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름은 정했어?”
보드라운 새 침구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라니.
“무슨 이름.”
“아니, 네 그, 라드 말이야.”
정신이 없어서 그것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명령이야? 이름 짓는 거.”
“이봐. 네가 감성이 메마른 거 아는데 이름 짓는 게 명령일 리 있니?”
“그럼, 안 지어도 되겠다.”
“세상에. 말을 말자.”
이름 짓기 같은 재주는 없었다.
샤포드에서도 길고양이나 들개에게 먹이를 준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감히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평생 갈지도 모를 것을 제가 지어 준다는 게 부담이었다. 그럴 바엔 이름이 없는 게 낫지 않나.
누군가, 더 대단한 이름을 지어 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이런 나디사의 감상을 끊는 헛기침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 없는 나디사조차 그녀에게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책 더 안 읽어?”
“나디사 마로닌. 네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조금 심하잖아.”
“……뭐가.”
“미치겠네. 침구 어떠냐고!”
마벤이 꽥 소리를 질렀다. 나디사는 그제야 제 손 밑에 깔린 침구를 인식하고는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는데.”
“그래, 말을 좀 해 봐.”
“이런 건 어디서 사? 비싸지?”
그녀를 키워 준 부부는 이렇게 부드러운 이불을 구경해 보기나 했을까 싶다. 봉급으로 사 주려면 몇 달이나 걸리려나. 곧 봉급이 나오는데, 그것으론 턱도 없겠지.
“그거는, 마음에는 든다는 뜻이야? 아니야?”
“아, 마음에 들어.”
“하! 와아. 정말. 그 말 한번 듣기가 이렇게 힘들 일이야?”
“그 말을 바랐어?”
“말을 말자. 됐어, 난 나갈래.”
마벤 로사는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책을 안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하도 쿵쾅거려 아래층 천장에 구멍이 뚫릴까 봐 걱정했다.
나디사는 바뀐 침구와 깨끗해진 방 안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녀 나름의 고맙다는 표시였다.
나디사는 이불 위에 풀썩 누우며 천장을 바라봤다.
가끔 자신을 원망하는 마로닌 부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올 때가 있었다.
곧 그들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세탁소 일당 몇 달 치보다 비싼 이불을 덮고 잔다고 편지를 쓸 수도 있을지도.
봉급을 받으면 그것부터 부치자.
나디사는 밀린 잠을 자듯이 눈을 감았다. 미소는 여전한 채였다.
* * *
라드는 비슷비슷하게 생겼다지만 마구간에 넣고 보니 각자의 특징이 있었다. 정신이 연결되어 그런지 주인을 닮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벤의 로즈는 무려 두 칸을 혼자 쓸 정도로 깔끔쟁이에다가 덩치가 컸다.
히아신의 디디는 병든 닭처럼 틈만 나면 잠을 잤고, 아트리스의 무스는 순찰하듯 제일 늦게 잠에 들었다.
시네라의 캐롯은 소심하여 구석 자리를 선호하고, 그리사의 에이는 까칠 담당이었다.
요 며칠 이름을 부르면 먼 거리에 있어도 주인에게로 오는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안녕.”
그리고 나디사는 훈련을 끝내고 마구간에서 자신의 라드와 마주 보고 있었다.
아트리스의 명령 때문이었다. 라드의 이름을 오 일째 짓지 않고 있는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 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나디사의 라드는 가장 온순하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평을 들었다.
만남이 길어지고, 교감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라드는 강아지와 같아졌다.
손을 내밀자 다가와 코끝을 비비는 라드를 보며 나디사는 웃고 말았다.
이런 녀석한테 어떤 이름이 잘 어울리는지, 책 한 권 안 읽는 제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나디사.”
끼익, 마구간 문을 연 것은 아트리스 메놈이었다.
오늘도 훈련을 주도한 그는 며칠째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물론 나디사는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할 말 있어?”
나디사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 정했는지 궁금해서.”
“아직.”
주인이 지어 준 이름만 듣고도 찾아올 수 있도록. 라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훈련이었다.
지난 사건 이후 발톱의 수장으로서 훈련할 사항 몇 가지를 받아 낸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무엇보다 작은 것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그의 성격이 지금의 발톱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트리스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골칫거리 삼 대장인 마벤, 히아신, 시네라가 아니라 나디사가 이 일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나 보다.
“하늘을 나는 것보다 이름을 짓는 게 어렵다니.”
“하늘을 나는 것도 어려워.”
“그래도 우리 중 네가 제일 오래 날 수 있잖아.”
어제 라드를 타고 한 바퀴 도는 연습을 할 때, 오직 그녀만이 무사하게 완주하여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사랑 너도 들어올 수 있었잖아. 마지막에 다른 사람 챙기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힘들면 이름, 내가 지어 줄까.”
떨리듯 울리는 목소리에 마구간 울타리를 짚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마찬가지로 울타리를 짚고 있는 그의 손에 긴장한 듯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러는 게 나을 수도.
하지만 미묘한 아쉬움에 대답을 미루는데, 그녀의 침묵을 오해한 아트리스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날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어떤 날?”
“……솔직히, 구해 줄 거라고 생각 안 했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먼 거리라는 걸 알아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
하얗게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중 가장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나 생각해 보면 그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신입이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시네라와 마벤은 여기에 없었을 거고. 나는, 아마도 도망쳤겠지. 여기서.”
며칠간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우물쭈물하던 게 이것이었다.
나디사는 침울하게 그의 금안을 바라보았다. 그런 건 생각지 않게 생겨 가지고.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수장이었다.
나디사는 울타리가 부서져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네가 도망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거에 대해서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했을 뿐이라고 말하려다가, 무슨 영웅처럼 말하고 있는 게 조금 낯부끄러웠다.
아트리스는 들키지 않게 조심히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금안이 낯 모를 감정으로 일렁였다.
“미안하지 않아. 그런 걸론.”
“그러면 다행이고.”
“고마워하고 있지.”
라드 특유의 물비린내가 가득해진 마구간은 그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미끄럽고 부드럽게 만들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