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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6화 (16/210)

16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자신의 라드를 부르며 혼비백산 뛰어다녔다.

제시간에 맞춰 라드가 도착해 타고 가도 시간이 맞을지 모를 차.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한 마리의 라드가 판도를 뒤집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플란 종족 신입이었다. 제 동료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겠지만 저건 상황을 악화시키는 오판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라드를 탄 발톱 부대였다.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라넌 경. 지금 당장…….”

그런데 그들의 수장의 상태도 이상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귀에는 다른 말이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천대받는 발톱이라고 해도 라드군이었다.

사망 사건이 일어나면 일이 커졌다. 일이 수습하지 못하게 커지기 직전, 수하들끼리 모여 어떻게 시체 세 구를 처리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는 순간.

“세상에.”

“이야…….”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뛰어다니며 제 라드를 부르던 이들도 멈추어 서서 하늘을 지켜봤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를 모아 둔 심장 중에서도 저런 이는 없었다.

저건, 타고난 재능이었다.

어린 라드와 강제 동화를 한 다음, 떨어지는 이들보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한 사람은 라드의 허리로 받고, 한 사람은 제 몸을 희생하여 받아 냈다.

세 사람을 받은 라드는 떨어지는 충격에 연이어 허리가 휘어졌다.

가여운 라드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고꾸라질 뻔하였으나 조종수가 희미하게 남은 정신으로 날개를 평평하게 만든 듯했다.

그게 라드를 한두 해 몰아 본 이들이 아님에도 기함하는 이유였다.

울고 있는 라드와 그 위에 엎어진 세 사람. 몇 분 후 조종수의 정신도 끊어진 것처럼 라드의 움직임이 산만해졌다.

하늘에서의 기적이 끝나고 구경 중이던 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행인 것은 그들의 수장도 돌아왔다는 것이다.

“저거랑. 위에 있는 놈들까지. 다 데려와.”

말을 끊어 뱉는 라넌의 목소리에는 짙은 패배감이 깔려 있었다.

그녀의 수하들은 그 모든 것을 모른 척하고 뒤늦게 도착한 라드에 올라탔다.

동화가 끝난 라드는 어리둥절하여 제 주인을 제외한 나머지를 버리고 싶어 했다.

하늘로 비상하는 수십의 라드 중에 그것만이 라넌의 눈에 박혔다.

생긴 것만 똑같은 줄 알았더니. 하는 짓까지 판에 박힌 듯 닮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딸일 리가 없었다. 한때 가장 친한 친우였던 라넌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그럴 만한 남자도,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다는 걸.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날아오는 라드의 무리는 세찬 바람을 만들어 냈다. 그녀의 금발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첫 비행이 떠올랐다. 실수투성이였던 자신에 비해 완벽에 가까웠던 비행이.

그간 나디사 마로닌에 대해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낳고 키워 준 부모는 레나이 가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 혹은 육감이 심장을 뛰게 했다.

그 오만한 보라색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말이다.

* * *

누군가의 무게에 눌려서 숨을 못 쉬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적엔 이미 정신이 나갔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감촉에 기분이 좋아진 나디사는 추락하는 꿈을 꾸다가 움찔 눈을 떴다.

갓 빤 것처럼 침구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자신의 것이 이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는 아니다. 요 근래 매일 먹고 자고 일어나는 숙사였으나, 그 구조가 약간씩 달랐다.

나디사의 숙소는 마벤 덕분에 화장대와 옷장 등, 나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소박한 침대 두 개만 놓여 있었고, 그마저도 나디사의 것보다 길이가 길었다.

남자 숙사.

일어난 나디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깼어?”

침대에 걸터앉아 빨간 무언가를 깎고 있는 남자는 히아신 아스였다.

정체 모를 과일을 과도로 잘라서 곧바로 제 입에 넣는다. 와그작, 와그작, 아삭한 과일 씹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보통 나 같은 사람한테 주지 않아?”

“뭐를?”

“과일.”

“주까?”

과일이 양 뺨에 가득 차 있어서 발음이 뭉개졌다.

사실 과일이 탐난다기보다 그냥 해 본 소리에 가까웠다.

움직이는 과도에 햇볕이 반사되어 눈을 쪼았다. 그 바람에 그와의 마지막이 기억났다.

야비한 미소나. 자기가 도와줄까, 같은 재수 없는 말이나.

감정은 날아가는 도중에 휘발되고 사라진 줄 알았더니. 저만 먹겠다고 부풀린 양 뺨을 보자 다시금 꿈틀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과육을 자르고 있는 날카로운 단도에서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 커튼에 가려진 창문 아래는 평화로워 보였다.

추락하고, 떨어지고, 그런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갔지.”

“음, 바쁘던데.”

“그쪽은?”

“나는 안 바빠.”

묘하게 비껴가는 시선, 축 가라앉는 말꼬리. 그는 어딘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침대에 신발을 올리고 앉아 있는 그의 자세도 심히 삐딱하였기에.

나디사는 커튼 젖히던 손을 내리며 그를 불렀다. 꿋꿋하게 과도만을 보고 있는 그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본데.”

그 말을 마치자마자 과육에 물든 새빨간 입술이 양옆으로 찢어졌다.

“내가?”

“없으면 안 해도 되고.”

“아! 하나 지금 생각났어.”

이 대화를 기다린 것처럼 껍질 안으로 파고들던 과도가 멎었다. 빨간 즙이 예리한 과도를 타고 흘렀다.

정오의 그늘에 가려진 눈빛은 그 과도보다 날카로움을 띄었다.

“나는 무모함을 좋아해. 무모한 사람은 오래 안 봐도 되니까. 자기가 알아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거든.”

“……응.”

“그런데 삼 일 전에는 네 무모함이 싫었어. 나는 싫은 건 정말 싫어. 싫은 걸 보면 며칠 동안 기분이 더러워.”

진지하게 그의 정신 상태가 걱정됐지만, 이런 화법도 계속 듣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사람을 괜히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삼 일이나 지났구나.”

나디사의 초점은 그 말에 가 있었다.

히아신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들고 있던 과도로 허공을 찔렀다.

“그게 아니잖아. 여기서는 왜 내 기분이 더러웠는지, 내가 왜 그러는지 물어봐야 해.”

“무모한 내가 싫다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너도 내 동료인데 싫었나.”

“뭐?”

짧은 정적이 끝나고 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입술이 하도 빨개서 무서웠다. 그는 간지러운 하프 소리 같은 웃음 중간중간 말을 섞었다.

“내가, 하하, 네, 동료야?”

“내 말에 그렇게 웃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나디사는 그가 웃도록 내버려 두고 팔을 움직여 봤다. 약간 뻐근하다고 느껴지는 손을 주무르는 동안 웃음은 잦아들었다.

과도가 땡그랑,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나디사의 고개가 돌아갔다.

히아신이 쉿, 함과 동시에 떨어진 과도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발에 밀쳐지는 과도를 보며 한마디 하려는데 문이 열렸다.

“……나디사 마로닌.”

방 주인의 정체가 밝혀졌다. 수프 그릇을 든 아트리스 메놈이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

아트리스는 감정이 복잡한 것처럼 눈이 흔들렸으나 이내 그 흔들림은 분노로 변했다.

말해 무엇한가. 남의 침대에 함부로 올라탄 히아신 때문이었다.

“히아신 아스. 네 방은 여기가 아닐 텐데. 그리고 거긴 시네라의 침대인데 함부로 밟고 올라가?”

“눈썹에 힘주지 마. 시네라가 그래도 된다고 그랬어.”

“시네라가 그럴 리 없어. 그 또한 네 헛소리겠지.”

“정말 그랬어. 내 꿈에서.”

아트리스의 경멸 어린 감정이 눈가에 가득했지만 정작 받아치는 히아신은 신나서 죽으려고 했다.

쓰러진 동안 히아신에게 오죽 시달렸는지 눈만 마주쳐도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아트리스.”

험악한 분위기를 깬 나디사는 침대 밖으로 발을 내놓았다.

아트리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가만히 있어.”

“아니, 괜찮아.”

나디사는 부축을 거절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다.

순간 아트리스의 등 뒤에서 그 꼴을 흐뭇하게 보는 히아신과 눈이 마주쳤다.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런데 왜 내가 네 침대에 누워 있어?”

“아, 그건…….”

아트리스의 손에 든 수프 그릇도 그렇다. 자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트리스는 죄인처럼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트리스는 작은 테이블 위에 수프 그릇을 올려 둔 뒤 뜸 들이며 말했다.

“직접 내려가서 봐.”

직접 가져온 수프 그릇처럼 뜬금없고, 무척이나 생경한 말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커튼 뒤에 갇혔다. 비로소 추위가 물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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