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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4화 (14/210)

14화

아트리스를 중심으로 의식을 끝낸 부대원들이 모였다.

피떡이 된 다른 이들에 비해 히아신 아스와 플란 종족인 나디사, 그리사는 몸이 괜찮은 축에 속했다.

플란 종족이 교감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타고난 교감이라는 게 이 정도로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반면 막 의식을 끝낸 아트리스의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쪼개질 듯한데 그 와중에도 하나가 된 라드를 느낄 수 있었다.

짐승이 허락받지 않고 제 몸을 나누어 쓰는 기분이랄까. 할 수만 있다면 라드와 떨어져 안정을 취하고팠다.

나디사 마로닌을 빼고 처지는 고만고만한 편이었다. 손바닥에 머리를 대고 애교를 부리는 건 나디사의 것이 유일했다.

그리사 데이 또한 플란 종족이지만 낯선 라드를 다루는 데에 자신은 없어 보였다.

그의 경우는 구토나 코피 같은 부작용이 덜한 정도의 도움이었다.

히아신 아스는 종족부터 출신지까지 비밀에 싸여 있으니 분석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었다.

어쨌든 심장의 수장인 라넌 샤스가 원하는 것은 비상이 아닌 추락인 게 명백해진 상황.

그만하시는 게 어떠냐는 말에도 그녀는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이참에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내린 결정이라기엔 라넌의 눈은 이 상황을 즐거워했다.

“우리가 진짜 비행을 한다고? 나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마, 맞아. 지금, 당장, 어떻게 날아.”

마벤과 시네라는 백기라도 들 기세였다. 사툰 종족의 강인한 신체로도 이겨 낼 수 없는 통증인데 더욱이 적합하지 않은 상대인 시네라는 죽을 맛일 거다.

아트리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군용 망토를 조여 맸다. 턱으로 달려간 땀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힘을 준 눈이 흐릿해지는 찰나에 그는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징징거리지 마. 마벤 로사, 시네라 칸.”

“뭐? 징징?”

“라드군에게 라드가 없으면, 우리는 평생 이곳에서 빈 마구간이나 지키다가 죽을 거다. 그러고 싶어?”

“하지만…….”

“높이 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멀쩡하게 날 수는 있어야 해. 중간에 떨어지더라도…….”

마지막 말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지도하던 훈련 중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면, 제아무리 라넌 샤스라고 하더라도 위기가 찾아오지 않겠나.

“분명 우리를 구해 줄 거다. 그러니 누군가 떨어지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이런, 미친.”

“더 할 말이라도 있어?”

비행은커녕, 새로 산 안장을 그 등에 얹어 보지도 못했다. 엎드렸을 때 가슴께까지 오는 라드가 막막하긴 저도 마찬가지였다.

마벤, 시네라, 그리사, 나디사, 히아신. 한 그릇에 넣어 봤자 종족, 가문, 성별, 모든 게 따로 노는 조합이었다.

허탈하게 웃은 아트리스는 땀에 젖은 목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귀밑으로 파고든 바람이 땀을 식혔다. 진정될 때까지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그도 그만의 진심을 내보였다.

“나는, 날고 싶어. 그것도 아주 잘.”

어수선하던 시선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의 손, 발, 목소리 중에 떨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개자식 같다는 건 알아. 라드를 달라고 항의했다가, 너희를 사지로 몰아넣었지. 지금은 날라고 협박하고 있고.”

평소와 다르게 풀어진 목 단추 같은 것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핏자국이 선명한 그의 입가는 또 어떻고.

수장 뽑기, 마구간 짓기, 윗선에 불합리를 항의하기 등.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애써 왔다.

그런 그가 손을 떨면서 함께 날아 보는 게 어떠냐 제안하고 있었다.

나디사는 순해진 제 라드를 내려다봤다. 승마조차 하루아침에 될 일이 없는데, 과연 저 하늘로 무사히 날아오를 수 있을까.

의심과 불안은 우연히 라넌 샤스의 시선을 마주하고서 옅어져 갔다.

자신을 지켜보는 그녀의 시선에 호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수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라넌은 조심성이 없었다. 제 눈에 번진 감정이 무언지 마음껏 보게 했다.

환멸, 증오.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통해 자신을 본 것이지. 그리고 그게 누구를 뜻하는지 나디사는 알 것도 같았다.

라드군에 들어와 친모를 둘러싼 그 딱딱한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도 오늘 라넌 샤스에게 얕보여선 안 됐다.

“도망치고 싶지.”

요요한 바람을 타고 들린 속삭임에 나디사는 옆을 돌아봤다.

쉿, 하듯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있는 히아신이 눈에 들어왔다.

“너만 도망치게 해 줄까. 정말로 저 여자가 떨어지는 우리를 구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

“네 시체는 내가 갖지만, 벌써 갖고 싶진 않아.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나디사는 체념하듯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창백한 아트리스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에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라드군이니까, 나는 게 당연하지.”

예상치 못한 발언인 듯 아트리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좀처럼 나서는 법이 없던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껴 있었다.

“날자.”

때마침 라넌 샤스가 결정을 재촉하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멍하니 나디사를 살피던 아트리스가 입술을 잘끈 물었다.

“준비해. 안장을 가져와.”

멀리서 아트리스의 말을 들은 라넌은 멈추어 섰다. 어디 한번 날아 보라는 듯이 얼굴엔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디사는 상대편처럼 서 있는 히아신을 지나쳐 성탑 안으로 들어갔다.

안장을 가지러 가는 그녀의 걸음은 겨울 공기보다 차가웠다.

* * *

수장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짜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사전의 교육받은 적이 없는 발톱은 라넌의 지휘하에 날아오르도록 했다.

나디사는 빳빳한 가죽 안장을 라드의 등에 얹고 겁먹은 표정의 마벤 옆으로 갔다.

안장을 얹기 전부터 그녀는 난동을 부리는 라드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항상 당당하고 거침없었던 마벤이기에 그 변화는 매우 뚜렷하게 다가왔다.

“마벤.”

“틀렸어, 정말 죽을 거라고…….”

무리를 이끌어야 할 아트리스를 보며 마벤은 점점 더 확신을 잃어 가는 얼굴이었다.

조금 그녀가 얄밉다고 생각했다.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가, 사툰 종족이, 뭣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사람이 취미 삼아 라드군에 들어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떨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동지일 뿐이었다.

나디사는 머뭇거리며 다가간 손으로 마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건 훈련일 뿐이니까.”

평생을 덤덤하게 살아온 나디사의 음성은 높낮이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마벤의 입술 사이로 불안함이 새어 나왔다.

“……설령 떨어져도 저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 주겠어?”

“그럴 거야.”

“어떻게 알아, 네가.”

“훈련하다가 죽은 사람 봤어. 게다가 넌 사툰이잖아. 분명 구해 줄 거야.”

나디사는 자신이 아는 것을 총동원하여 마벤을 다독였다.

“라드에 올라.”

라넌의 명령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은 주지 않았다.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던 이들의 가슴을 날카롭게 휘저었다.

마벤의 어깨에서 손을 내린 나디사는 명령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명확하게 자신을 겨누고 있는 황금색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안장에 올랐다.

-아르르.

목울음을 소리를 내는 라드를 내려다보자 석양 같은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날고 싶어 안달이 난 눈이었다.

“일단.”

기분 좋아 보이는 라드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아트리스의 첫 지시가 시작됐다.

“날아오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라드와 연결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라드의 감정, 뼈, 체온. 의식을 나눈 라드의 날개는 곧 그녀의 날개였다.

등에 힘을 주자 라드가 날개를 폈다. 라드와 일체화된 등은 자신이 날기라도 하는 양 움찔거리고 있었다.

첫 비행을 맡은 아트리스가 뒤로 누웠다. 비상의 시작이었다.

* * *

몸을 젖힌 아트리스의 라드는 하늘로 뻗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본인이 일으킨 흙먼지를 안고서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붕, 붕, 바람을 머금는 날갯짓 소리가 웅장했다.

아트리스 덕에 비상하는 방법을 터득한 발톱은 몸을 최대한 뒤로 젖히고 있었다.

라드 여섯 마리가 일으킨 바람은 작은 돌풍을 몰고 왔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겨울의 것 같지 않았다.

긴장이 사라진 나디사의 라드가 맨 처음 하늘에 올랐다.

남들과 차이가 나기 시작하자 아트리스가 내려오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그게 되려나. 합이 맞지 않는 머리 두 개가 조종수에게 달린 꼴이었다.

설상가상 바람이 밀려와 몸을 눕히고 있었다. 라드의 쭉 뻗은 날개가 저항하듯 더욱 힘찬 날갯짓을 이어 갔다.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여섯 마리의 라드끼리 경쟁이 붙었다. 지시를 내려야 할 조종수들이 미숙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바람에 말소리가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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