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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3화 (13/210)

13화

“수석이더군요.”

그 여자도 수석이었다. 늘 이기고 싶었고, 늘 응원했고, 늘 선망했던 여자.

티사. 그 여자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나.

“수석이 왜 발톱에 있는지, 왜 라드도 타지 못하게 하는지, 제가 라넌 경께 묻고 싶습니다.”

열심히 들여다보던 양피지에 적힌 내용이 그것이었나 보다.

라넌은 대답 없이 짧은 이별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을 등져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저 신관도 다른 이를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그러하니 친절하겠지, 도와주고 싶겠지.

뒤따라오는 발걸음은 항의하듯 목소리를 내었다.

“라넌 경. 지금 저게 무슨…….”

“저 신관이 보던 걸 나한테도 가져와.”

“네? 아, 네.”

하루하루가 지루했었는데, 오랜만에 새로운 기쁨을 찾았다.

록은 아마 후회할 것이다. 그녀의 기쁨은 증오 안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발톱의 수장인 아트리스가 왜 나디사를 데리고 본거지에 다녀왔는지는 본인만이 알 터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든, 아니면 운이 좋았던 것이든, 그는 수장이라는 이름답게 기대치 넘는 성과를 얻어 돌아왔다.

두 번째 신관의 입김이 닿아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발톱 부대는 그걸 마음씨 좋은 신관의 참견 정도로 여겼다. 그 정도 정성이면 나디사의 축복 미수 건은 실수려니 생각됐다.

라드를 얻는 것은 물론, 부릴 수 있는 심부름꾼의 숫자도 늘었다.

다음 날까지 휴식하라는 말을 듣고 방으로 돌아온 나디사는 곧장 눕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뜯지 않고 쌓아 둔 편지를 꺼내서 책상에 펼쳤다.

마로닌 부인이 보낸 편지를 뜯어보지 못하는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토록 반대하던 라드군에 들어와 놓곤 심장은커녕 몸통도 되지 못하고 있는 제 처지가 솔직히 말해서 한심했다.

시체도 남에게 저당 잡힌 상태였으며, 가슴에 대못 박을 짓만 여러 번 한 자신이 과연 그 편지를 읽을 자격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남의 입에서 들은 수석이라는 단어가 그 죄책감을 일부 씻어 내려 주었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이곳이라는 확신 같아서. 그런 인정은 남의 입으로 들어야지만 비로소 진짜 같았다.

빨간색 인장이 박힌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디사는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동작이 빨라졌다. 널브러진 편지들을 손으로 쓸어 서랍에 넣었다.

“마로닌. 일정이 바뀌었다고 하니까 내려와.”

휴게실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내려간 마벤이었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일어섰다.

벗어 둔 군복을 입고 마벤의 뒤를 따라가 돌계단을 밟았다. 단추를 채우며 무슨 일정이냐 묻던 나디사는 성탑 창문 앞에서 척 멈추었다.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지은 마구간 앞에 여섯 마리의 괴물이 웅크려 있었다.

서글픈 울음소리가 오갈 데 없는 바람에 실려 왔다.

“생각보다 더 징그럽다.”

마벤은 저 괴물에 대한 평가를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주인을 찾고자 온 라드들이 들을까 무서웠다.

“징그러워.”

마벤에게 주었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나디사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듣던 것하고는 달랐다. 길고, 커다랗고, 아름다웠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돌벽 창문 밖에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왜 여기까지.

초라한 성탑을 의무적으로 훑는 금색의 시선. 심장의 수장, 라넌 샤스였다.

* * *

첫인사부터 심장 부대는 일렬로 나란히 서서 이 어린 부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몸통이나 무릎이라면 많이 봐 왔을 테지만, 배정되자마자 방치된 발톱 부대는 거의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어리고 약한 라드들도. 그리고 그걸 직접 시범하듯 보여 주는 심장의 수장도.

라넌은 제 수하를 시켜 라드 한 마리를 끌고 오도록 했다. 발톱 여섯은 앞에 놓인 라드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드를 본 적이 있나. 아니면 알고 있던 사람은.”

매서운 겨울 날씨와 딱 어울리는 질문은 유감스럽게도 답을 바라지 않았다.

“대답은 없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라넌은 라드의 목에 감긴 목줄을 팽 잡아당겼다.

-까아아아.

반항적인 라드는 팔을 들고 뒤로 누우려 했다.

비늘로 덮인 등과 배, 다리는 여섯 개. 도마뱀과 비슷한 생김새지만 등에 달린 날개 덕분에 옛적 사라지고 멸망한 용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아트리스 메놈. 나와.”

건조한 부름에 응하며 걸어 나온 아트리스는 바르게 섰다.

“너는 수장이니, 가장 큰 놈을 맡도록.”

“네.”

“대답 하나는 마음에 드네. 잡아봐.”

라넌은 비웃음 띤 얼굴로 목줄을 넘겨주었다. 아트리스는 그 줄을 넘겨받으면서도 미심쩍은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몇 번의 대치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라드군이지만, 라드를 탈 수 없는 무용지물로 만들 생각인 게 너무도 뻔하여서.

하지만 단 한 번의 요청만으로 라드는 그들의 차지가 됐다.

하자가 있는 놈들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수장 신분인데 직접 지도까지 해 주고 있었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내빼기엔 늦었다. 냉정한 시선들 앞에서 아트리스는 목줄을 손에 감았다.

“꽉 조여.”

그 말에는 잠시 망설였다. 이미 목을 죄고 있는 줄 때문에 라드가 고통스러워 보여 아트리스는 조금만 잡아당기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아아아아아아!

당기길 기다렸던 것처럼 비명을 지른 라드가 꼬리로 땅을 탁, 탁, 내리쳤다.

그 고통이 전염된 듯 아트리스의 이마에도 파란 실핏줄이 생겨났다.

“눈을 마주쳐. 무언가 느껴지기 전까지.”

진행 순서를 모르니 지시대로 따랐다.

울고 있는 라드의 눈동자를 몇 분이나 바라보았다. 뼈 위로 꿀렁거리며 이동하는 통증이 차츰 거세지고 있었다.

“하…….”

“버텨.”

줄을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드와 의식이 연결되는 동안 그의 전신은 불에 타는 듯했다. 고통을 의지로 참아 보려다가 코피가 났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동기간 끈끈한 우애는 없다고 하더라도 한 지붕 아래서 먹고 자며 보낸 시간이 있지 않나.

발톱 부대서 미간이 찌푸려지지 않은 것은 히아신 아스뿐이었다.

하다 하다 이젠 눈가에서까지 피가 철철 흘렀다. 저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나서야 라넌의 중재가 들려왔다.

“그만.”

“하, 아…….”

목청을 찢을세라 울던 라드의 움직임이 멎었다.

어떻게든 떠는 손으로 끈을 움켜쥔 아트리스가 끝내 합격점을 받았다.

“나머지도 동일한 방법으로 해. 라드 앞에 서라.”

원래라면 이런 고문 같은 방식을 쓰지 않는다. 먼저 라드와 단둘이 교감하는 시간을 보낸 후에 날을 잡아 조용한 밀실에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다음. 빨리 안 오나?”

라넌의 관심은 다 쓰러져 가는 군인에게 있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라드를 내어 달라 했으니, 정말로 기다릴 필요 없이 내어 주었을 뿐.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온 발톱 부대는 안타까운 희생양에 불과했다. 이 제단은 줄곧 한 사람만 원하고 있으니까.

수석. 과연 그 위명에 맞게 나디사 마로닌의 라드 적합률은 역대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이 성적이면 몸통으로 들어가 심장에 오를 준비를 마쳐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라넌 샤스가 심장의 핵심축으로 있는 이상, 플란을 필두로 한 소수 종족은 절대 상위 부대에 얼씬도 못 할 터였다.

타고난 핏줄로 얻어 낸 실력은 오만하고 감정적인 비행으로 제 살을 기본, 동료의 살까지 깎아 먹었다.

하물며 티사 레나이와 다른 점을 찾기 힘든 저 여자는 말해 무엇 할까.

이래서 좋지 않은 선례를 없애려면 수백 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라넌은 대기 중인 나디사 마로닌의 전신을 눈으로 훑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은근한 기대감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시작해.”

까마득한 윗사람의 명을 거부하느니 여기서 피거품 물고 쓰러지는 게 군인으로서는 나을 거였다. 전부 비슷한 타이밍에 팽팽한 목줄을 당겼다.

거친 방식에 익숙지 않은 라드들은 꼬리를 사방으로 튕겼다. 단단한 꼬리 비늘에 맞은 돌이 튀어 올라 사람의 얼굴을 쳤다.

의식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다.

십여 분쯤 지나자 두통과 부상을 호소하는 어린 군인들 사이에서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난생 본 적도 없는 은발 머리의 신입과 나디사 마로닌, 이 둘이었다.

심지어 나디사 마로닌 쪽은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녀와 짝지어 준 라드가 꼬리 짓을 그만뒀다.

이렇게나 빨리. 이렇게나 간단히.

“라넌 경.”

“조용히 해.”

방금 수하의 말을 막지 않았다면 저들을 위 부대로 보내는 게 어떠냐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라넌은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독기 오른 그녀의 목소리가 빈터에 울렸다.

“모두 의식이 끝난 건가. 대단한데. 발톱이 이렇게 날카로울 줄이야.”

의식이 채 끝나지도 않은 이도 있었으나 라넌은 그 사실을 철저히 무시했다. 저 정도면 의식이 끝났을 거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서였다.

“아트리스 메놈.”

비틀거리며 일어선 아트리스 메놈의 짧은 소매는 피로 푹 젖어 있었다. 짝지어 준 라드와 상성이 최악인 경우였다.

“네가 주도해서 한 바퀴 날고 돌아와.”

수하 중 하나가 반대 의견을 냈지만 라넌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라드를 몰 자격이 없다.”

티사의 망령이 부활하면서 묻고 살던 원망도 깨어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론은 같았다. 이들은 라드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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