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아트리스가 일어나 휴게실 중앙을 거닐었다. 그의 걸음에 달라붙은 긴장된 시선이 네 개였다.
특히 시네라 칸은 제 이름이 불릴까 싶어 아예 소파 뒤에 숨은 모양새였다.
고민하는 아트리스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은 그리사와 나디사였다. 두 플란 종족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결정을 마친 아트리스의 입술이 한 명의 이름을 담았다.
지긋지긋한 두통이 다시금 찾아왔다. 책상 서랍을 열어 습관처럼 약통을 찾아 꺼냈다.
옆에 서 있던 하인은 단정한 몸짓으로 그녀의 잔에 물을 따랐다. 라드군의 심장이자 차기 머릿감인 라넌 샤스는 그가 따른 물에 약을 타서 마셨다.
잠잠해지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는데 하인이 커튼을 걷었다.
집무실 내로 쏟아지는 햇볕은 오늘이 비행하기 좋다는 걸 알리듯이 강렬했다.
라넌은 찡그린 눈을 서서히 떴다. 실구름 한 점 없는 겨울 하늘이 그녀의 앞에 펼쳐졌지만 마음이건 입꼬리건 미동이 없었다.
라드를 모는 사람은 전부 크고 작은 부작용을 안고 살았다. 라드와 적합률이 높을수록 부작용은 적어지지만, 애당초 그런 축복받은 자는 손에 꼽는다.
“몸통의 수장이 잠시 뵙고자 한답니다.”
“그래.”
잠시도 휴식할 시간을 주지 않는군.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는 게 나으려나. 생각은 보통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 찾아오니 말이다.
라넌은 목에 달린 금색 단추를 잠그며 헛숨을 삼켰다.
요즘 따라 단추를 잠그면 두통이 세 배로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똑똑, 어김없이 들리는 노크 소리에 라넌은 훈련된 것처럼 이마에 생긴 주름을 없앴다.
“들어와.”
냉정한 심장의 수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저벅저벅 걸어오는 수하의 인사를 받았다.
“라넌 경.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차 한 잔 마시면 듣지. 어차피 오늘은 오후 훈련도 없으니까.”
그녀의 수하는 겁이 많고 담이 작아서 모든 보고를 저리 비장하게 진행했다.
수하의 성격을 잘 아는 라넌은 망토를 팔에 두르고 집무실 밖으로 걸음 했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수하의 걸음걸이는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고 빨랐다.
“라넌 경. 그러니까 발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발톱. 아, 맞아. 그런 부대도 있었지.”
자격 미달인 오합지졸을 한데에 묶어 놓은 부대를 떠올린 라넌이 피식 웃었다.
수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앞질러 걸어왔다.
“그런데 거기 수장이…….”
“잠깐.”
라넌의 걸음이 딱 멎었다. 뒤따라오던 수하의 걸음도 자연히 함께했다.
라넌의 흉흉한 금안은 수비교 신관들을 지나치지 못했다.
“저자들이 왜 여기에 있지?”
“아, 글쎄요…….”
“글쎄요?”
“알아보겠습니다.”
1급 정보까지 있는 시설에 신관들이 있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비록 그들이 1급 정보까지 접근할 수 없더라도 이건 월권이었다.
통솔권을 가진 왕세자와 친하다는 이유로 식사하듯이 본거지에 들락날락하는 첫 번째 신관 랍이 떠올랐다.
쓴웃음을 지으며 라넌은 구경꾼처럼 모여 있는 신관들 앞으로 갔다.
“라넌 경.”
“여기서 뭣들 하는 거지? 요즘 신관들은 기도실이 아니라 라드군 본거지에서 기도를 하나?”
“아, 그것이…….”
하급 신관만 줄줄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저 안에 있는 게 그들의 주인일 것이다.
보통 상급 신관들이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이런 것들을 허리에 달고 다니니 말이다.
라넌은 더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밀치고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알기로는 왕족이나 상급 신관들이 보아도 무리 없는 정보만이 있는 곳일 거다.
그렇다고 봐준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원체 신관이란 것들을 싫어하기에.
“아, 라넌 경.”
그리고 그런 라넌조차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있었다. 예의 바른 인사를 전한 남자는 첫 번째 신관이 아니었다.
두 번째 신관 록. 그는 신관을 싫어하는 라넌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품의 소유자였다. 위가 아닌 아래를 볼 줄 아는 참된 신관.
보통이라면 신전에 박혀 있을 사람이 여기까지 납신 것도 이해가 가지 않을 법한데, 심지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더욱더 몹쓸 생각을 키우게 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잠시.”
“볼일을 다 하셨다면 나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인 것을 느낀 록은 애매한 미소로 보던 것을 내려놓았다.
역시 신관치고 순한 사람이다. 첫 번째 신관이었다면 다음번엔 왕세자를 대동하고 나타났을 거다. 록은 그런 유의 사람은 아니었다.
순순히 라넌을 따라서 시설을 나온 그가 하급 신관들에게 나비처럼 손짓했다. 둘이서만 걷고 싶다는 뜻이렷다.
말은 하지 못해도 라넌은 그가 불편했다. 신관이라서가 아니었다. 그건 두 번째 이유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잊고 싶은 과거를 정확히 재조명시키는 이라서 그랬다. 가령 그녀의 신입 시절 같은 것.
지금도 아름답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라드군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훈련에 찌든 군인에게 풋풋하고 아름다운 신관이란 얼마나 보기 좋은 상대인가.
철없고, 그저 하늘이 좋기만 하던 시절이 그의 눈동자에 업혀 끌려왔다.
“라넌 경.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훤하게 뚫린 복도로 기울여진 햇볕이 그들의 금발 위로 들었다. 떨어져 걷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맞춘 순간이었다.
“라넌 경.”
자기 혼자 라드군의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없는 그녀의 수하가 등장한 뒤였다. 그러나 라넌은 그 뒷말이 어땠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앗아 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하늘로 떴다가 사라진 그녀의 청력이 다시 돌아왔다. 라넌은 숨을 고르며 사력을 다해 대화에 집중했다.
발톱 배지를 달고 있는 두 사람이 수하에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수장은 그 옆에 수장이라는 표시에 배지를 하나 더 단다. 하지만 라넌의 시선은 발톱의 수장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온 여자에게 가 있었다.
“잠시만.”
라넌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듯 수하가 비켜섰다.
발톱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는 군인보단 신관에 잘 어울릴 외모였다. 자로 잰 듯 단정한 이목구비가 재수 없었다.
“너는 누구지.”
“아트리스 메놈입니다. 발톱의 수장을 맡았습니다.”
“그래. 그런데?”
아마 책상 위에 쌓인 수많은 보고서 중에 그런 내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넌은 중요한 보고서가 아니면 전부 아랫사람들에게 대신 서명하도록 했다.
“라드 때문에 왔습니다.”
“라드?”
“아무리 저희 부대가 외곽에 있다고 하더라도 라드는 다른 신입과 동일하게 지급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트리스 메놈은 분명 호기롭고 제 부대를 위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아직 애송이 티가 났다.
제 앞에 있는 게 차기 머릿감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안다면 멍청한 것일 터다.
수하인 몸통의 수장조차 고개를 들지 않는다. 눈을 부라리며 저들의 부당함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그건 제 윗사람들에 대한 반항이자 공격이었다.
“자네는 인내심이 없군.”
“훈련에서 배제됐습니다. 정확한 날짜를 알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사흘입니까? 열흘?”
“열흘이 아니라 일 년일지라도 상관없어.”
차가운 라넌의 말에 발톱의 대표로 온 두 사람의 어깨가 들먹거렸다.
“너희는.”
바라만 봐도 울렁이는 보라색 눈을 지닌 여자. 라넌의 시선은 그 여자를 향하여 있었다.
“……내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라드를 얻을 수 없다. 자격 미달인 놈들에게 그 값비싼 라드를 그냥 내어 주는 멍청이는 될 수 없으니까.”
시선은 흔들리나 무정한 입매. 밤하늘의 축복을 얻은 듯 새까만 머리카락조차 그 여자와 똑 닮아 있었다.
한때는 친우였고, 전우였고, 지금은 단지 잊고 싶은 사람이 된 그 여자를.
“일 년이나 방치해 둘 생각이셨다면, 저희를 뽑아 둔 이유가 뭡니까.”
해서 한참 아랫것이 건방지게 날뛰고 있는데도 알맞은 대응을 하지 못했다.
얼빠진 그녀를 대신해서 몸통의 수장이 나서려는 때에 엉뚱한 목소리가 끼었다.
“옳은 말인 것 같은데요, 라넌 경.”
과거에 붙잡혀 있던 라넌의 시선이 천천히 돌려졌다.
록을 신관 중에 싫어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신관답지 않아서였다.
왕세자의 신임을 얻은 수비교는 그들이 마치 왕족이라도 된 양 모든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려고 들었다. 실제로 그들의 말에 힘이 없지도 않다는 게 문제였고.
자랑스러운 라드군의 심장으로서 라넌이 그들을 싫어하는 건 지당했다.
그래서 이런 문제로 한 번도 다툼이 없었던 록이 입을 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라드군인데 라드가 없다면 큰일인 듯한데요.”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제가 축복했습니다.”
읽지 않으면 보고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허공에서 맞닥뜨린 두 개의 금색 시선은 아까의 예의를 버리고 서로를 노렸다.
“월권입니다.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을 텐데요.”
“저는 왕세자님의 라드군에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습니다, 라넌 경. 게다가…….”
라넌은 신관의 눈길이 한 여자에게로 부드럽게 옮겨지는 것을 지켜봤다. 거기에 담긴 온화한 기운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두고 온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두드렸다.
전혀 다른 사람, 얼굴만 닮은 사람일지라도 그 감정은 똑같이 발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