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9화 (9/210)

9화

나디사 마로닌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녘에 감시관이 편지가 도착했다며 문 앞에 두고 갔다.

보통의 라드군이라면 심부름꾼이 방에 한 명씩 배정될 테지만, 이곳은 무엇이든 느려 여태 심부름꾼 하나 없었다.

첫 임무라 일찍 눈이 떠진 나디사는 그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다. 뜯어보지 않아도 봉투에 써진 필체가 주인을 알리고 있으니 말이다.

마로닌 부인의 손길이 닿은 그 편지는 나디사의 개인 서랍장 안에 고이 놓였다.

편지에 자신을 향한 비난이 담겼든, 자신을 향한 응원이 담겼든, 분명 그녀의 하루를 망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같은 방을 쓰는 마벤 로사 때문이었다. 부유한 집의 아가씨인 듯했다.

오자마자 침구류를 하나하나 바꾸더니 심부름꾼이 오기 전까진 청소를 도맡아 달라는 말로 미움을 샀다.

일전에 저의 일탈을 감싸 준 것이 저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기세가 등등하여 마치 나디사를 제 아랫것처럼 대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아침부터 소집 명령이 떨어져, 나디사는 피곤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단추를 채우는 중이었다.

생각할 거리가 좀 많아야지. 몸보다 마음이 힘든 군 생활에 잠을 설쳤다.

“무엇을?”

존대하지 말라는 따끔한 아트리스의 말을 상기했다. 일생 하대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말버릇이 됐나 보다.

“내가 바깥에 나갔다가 와도, 모른 척해 달라고.”

“그건 한 번이었어. 첫날이니까 소란 피우기 싫어서.”

제 말에 반항할 줄은 몰랐나 보다. 새침하게 눈을 뜬 마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목소리 예쁘다?”

난데없는 칭찬에 나디사는 망토를 걸치다가 말고 잠시 주춤했다.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그런데 왜 이제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착한 척했어?”

종잡을 수 없는 대화였다.

마벤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디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문으로 걸어갔다.

“내가 딱 싫어하는 성격.”

마벤이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나디사의 입이 다물렸다.

편지에, 모시고 살아야 할 룸메이트에. 벌써 샤포드의 으스스한 바람이 그리워질 줄이야.

망토 끈을 묶는 나디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나디사는 아트리스 메놈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지만 그가 수장 자리를 가져간 것에 대해서 꽤 많이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에 그 감상은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말았다.

“저 머리가, 엄청, 오래 걸리는 머리거든.”

아트리스와 같은 방을 쓰는 시네라가 전한 말이었다. 라드의 발톱에서 제일 사교적이고 정상인 사람은 단연 시네라 칸이었다.

그의 말대로 꽤 번거로워 보이는 머리 스타일을 고수한다는 건, 아트리스가 그만큼 부지런하고 집요한 성질머리의 소유자라는 뜻이었다.

더욱이 그는 제가 맡은 역할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후방인 무릎의, 후방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릎의 누군가가 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완벽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어야 된다는 소리고.”

“그래서?”

마벤은 그와 다툰 날 이후로 사사건건 그의 말에 시비를 걸었다. 그새 내성이 생긴 아트리스는 그녀의 도발을 가볍게 무시하며 손가락을 들었다.

“나디사, 마벤은 마구간 내부 청소. 나머지는 자재를 옮겨. 수리는 그 이후에 다 같이 모여서 한다.”

“응, 그럼 자재는, 어디에.”

“저기 있네요.”

협조하며 함께 움직이려는 찰나 지시를 내리던 아트리스의 한숨이 길어졌다. 그의 신경을 긁는 이는 따로 있기에.

장신의 남자가 나무 밑에 누워 노곤히 잠들어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그 남자는 히아신 아스였다.

그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눈을 덮는 책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

나디사는 마구간을 청소하러 가는 척하면서 그를 재빨리 훔쳐봤다.

그의 눈을 덮은 책이 익숙해서 시선이 깊어졌다. 그 책이었다. 마차에서 아트리스가 읽던.

성탑 뒤뜰에 있는 마구간은 곧 그들에게 분양될 라드 때문이라도 필수로 갖춰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안 쓴 지 몇 년은 되는 이 성탑에 멀쩡한 마구간이나 헛간이 있을 리 없었다.

감시관에게 수리를 요청하니 알아서 하라며 빗자루와 자재들을 두고 갔다.

해 본 적 없는 마구간 수리를 지휘하는 와중에 이탈자가 생겼으니. 수장인 아트리스의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아직은 서먹서먹하고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말로만 불평 중이지만, 그 평화로운 기간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나디사는 관심을 끊고 마구간으로 가려다가 돌연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나무 밑에 늘어져 있는 인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머리칼이 힘없이 나풀댔다.

부풀고 가라앉는 그의 가슴팍을 보아하니 깊은 잠에 든 것 같았다.

하물며 그가 눈을 가리고 있는 책은 수비교 신전의 교리 책이었다. 아트리스가 매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그것 말이다.

나디사는 이 성스러운 책을 제 눈가리개로 쓰는 남자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의 목적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첫 만남 이후로 딱히 접촉해 오지 않는 남자는 그 고민을 우습게 만들었지만.

나디사는 바쁘게 일하는 중인 아트리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자재의 수를 계산하며 마구간 설계도를 그리는 중이었다. 그 앞에 선 시네라와 그리사는 팔을 걷어붙이고 있고.

그 뻔질거리는 마벤도 빗자루를 들고 마구간으로 떠났다.

한마디로 다들 제 할 일을 하느라 바쁘다는 소리였다.

나디사는 아트리스가 책을 발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이 됐다.

평범의 범주를 넘어서는 전당포 주인과 아트리스가 피 터지게 싸우는 장면이. 그리고 엄한 불똥은 자신한테 튈 듯싶었다.

낮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조심스러운 손길이 책에 닿았다. 두꺼운 책을 살며시 집어 들어 올렸다.

긴 속눈썹이 아름다운 남자가 책 밑에 숨겨져 있었다.

“잘 자네.”

나뭇가지 모양의 그늘이 그의 두 뺨과 입술에 드리워졌다. 교묘하게 얼굴의 반만 가린 그늘이 남자의 인상을 더욱 서늘하게 했다.

이런 남자와 아트리스가 맞붙으면 어떻게 되겠나. 책은 티 나지 않게 아트리스 근처에 던져두어야겠다.

“어!”

일어난 순간 몸이 뒤로 당겨졌다. 풀썩, 주저앉고 보니 손목이 잡혀 있었다.

“저기.”

미소를 짓고 있는 히아신은 눈을 뜨지 않고서 말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아.”

그러곤 손가락으로 제 눈을 콕콕 찌르듯이 가리켰다.

그날 전당포 앞에서 헤어진 후로 그와 정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거 본인 책 아니잖습니까.”

“존대하지 마. 들켜, 그러다가.”

기다란 검지가 그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들켜도 좋아. 너는 어때? 그러는 게 좋으면, 그래도 돼. 괜찮아.”

이 모든 말을 눈 뜨지 않고서 하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빨리 덮으라는 손짓을 한 뒤 다시 잠들 준비를 했다.

이 남자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와의 거래가 밝혀져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디사는 눈 뜨고 코 베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트리스의 책을 함부로 쓸 순 없었다.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는데 나오는 게 없었다. 손수건 한 장이라도 들고나올 걸 그랬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던 나디사의 시선에 굴러다니는 나뭇잎 한 장이 보였다.

눈을 가리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어 엉거주춤 일어나 그것을 주웠다.

곤히 잠든 척하는 히아신의 눈 위에 살며시 나뭇잎을 놓아 주었다.

살랑거리는 나뭇잎이 제 눈을 덮었음에도 히아신은 화를 내거나 치우지 않았다. 싱긋이 웃으며 그 나뭇잎이 도망치지 못하게 손가락으로 잡아 누를 뿐이었다.

이런 허접한 눈속임을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다. 나디사는 얼떨떨한 기분을 한 아름 끌어안고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도 이번에는 잡지 않았다.

나디사는 몰래 아트리스의 책을 그의 주변에 떨어트려 놓은 뒤 서둘러 마구간으로 향했다.

돈을 빌려주는 대신 시체를 가져가라고 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고자 주위를 맴도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 금화 주머니에 든 액수가 많다 했다.

하지만 게으른 빚쟁이인 남자는 오로지 잠만 잤다. 협박, 갈취, 폭행 등과 거리가 먼 빚쟁이였다.

“마벤 로사?”

마구간에 도착한 나디사는 먼저 청소 중인 마벤에게 사과를 하려 했다.

“마벤.”

그녀가 마구간에 있었다면 말이다. 쓸다가 만 먼지와 지푸라기를 보며 나디사는 한숨과 신음이 섞여 나왔다.

이번만큼은 그냥 눈감아 주지 않겠다.

일을 안 하고 노는 건 저쪽에도 한 명이 더 있으니 그러려니 한다지만. 아예 군 밖으로 나다니는 건 언젠간 큰 눈덩이가 되어 자신에게 굴러올 게 분명했다.

약간의 신경질을 부리듯 쇠갈퀴로 지푸라기를 긁어 한곳에 모았다.

밖에다가 살림을 차린 양 뻔질나게 나다니는 마벤 로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던 차였다.

마구간 안쪽에 까만색 구두가 튀어나와 있었다. 구두 끝을 쇠갈퀴로 툭 건들게 된 나디사는 그 물건의 정체를 알곤 코웃음이 나왔다.

귀한 아가씨처럼 굴던 마벤이 마구간 한쪽을 깨끗이 치워 놓고 잠들어 있었다.

저 누울 자리만 반짝반짝하게 치운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고작 이 정도를 치우고 곯아떨어져 버린 그녀가 제일 웃겼다.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발톱에 배정된 사연은 모른다만 이곳과 맞지 않는 건 분명했다. 살아온 환경이나 뭐로 보나.

나디사는 부러진 나무 울타리 조각을 줍고 주워서 한 묶음을 만들어 냈다.

먼지와 오래된 지푸라기만 말끔히 치우면 되는 일이라서 한 시간 내외로 끝낼 수 있었다.

마구간 정리도 끝이 보였다. 환기하려고 열어 둔 문밖에 마지막 먼지를 버렸다.

마무리 작업을 하며 따끈한 차 한 잔을 생각할 무렵. 남은 나뭇조각을 챙겨 나오는데 마구간 문이 인위적으로 삐꺽 움직였다.

이상함을 감지한 나디사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무언가에 밀린 것처럼 스르륵 문이 닫혔다.

“안녕, 나 왔어.”

문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의 짓이었다.

그 남자, 히아신 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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