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라드군은 통솔권을 가진 왕세자의 명령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왕권을 돈독히 하는 데에 큰 힘이 되어 주는 일이었지만, 통솔자의 능력에 따라 그 강대한 라드군이 무용지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단점 또한 명확했다.
지금의 라드군은 평화로웠다. 왕권은 안정적이며, 후계는 이미 첫째 왕자로 임명되어 있었다.
주변국은 수비타 왕국에게 복종하거나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어떠한 외부 위험이라고 해 봤자 파르난 뿐이었다.
하지만 근 백 년 들어 파르난이 큰 사고를 친 이력은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태평성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제일 중요하다고 일컫는 라드의 머리도, 심장도 펑펑 놀고 있는 판국에 라드의 발톱 따위가 할 만한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새벽부터 이들을 모아 둔 것은 감시관이었다. 할 일이 없어도 군인답게 아침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 그의 명이었다.
“우선 마구간부터 치워야 되지 않아? 다 무너졌던데.”
감시관의 말에만 의존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기 전, 그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작은 성탑에는 일 층에 부엌 딸린 식당이 있고, 그 위층으로 방이 세 개였다. 남자는 고층의 방을 둘씩 나눴고 여자들은 이 층 방을 썼다.
그리고 룸메이트인 마벤은 어젯밤을 합숙소에서 지내지 않았다.
나디사는 그걸 감시관에게 보고했어야 하지만, 첫날부터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눈감아 주는 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감시관은 상부와 연결됐다 뿐이지 그들의 상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함께하게 된 동료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우선은 말이다.
“라드는 언제 우리한테 와?”
휴게실에 모인 라드의 발톱은 총 다섯이었다.
저번부터 잠을 자거나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한 명을 제외하면 전원이 모인 셈이었다.
남자 셋은 과묵하거나 소심했고 마벤은 시종일관 질문만 해 댔으며 마찬가지로 나디사 또한 수다와 거리가 멀었다.
비는 멎는 듯하더니만 다시 새벽부터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어 두어 빗소리가 휴게실로 넘어왔다.
“마구간이나 라드 문제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게 있어.”
의자에 앉아 조용히 이 사태를 관망하던 아트리스의 입이 열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리 중 수장을 뽑아야 해. 어쨌든 이곳도 하나의 부대니까.”
이들 중에서 영원히 발톱으로만 남고 싶은 사람은 없을 터였다. 얌전히 듣고만 있던 나디사에게도 솔깃한 주제였다.
그녀의 목표는 여러 개가 있었다.
봉급을 마로닌 부부에게 보내어 두 사람의 여생을 풍족하게 해 주는 것과 친모와 같은 입장이 되어, 대관절 목숨보다 중한 라드군이 무언지 느껴 보는 것.
그중에서도 이 두 가지가 대표적인 그녀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선 기를 쓰고 심장까지는 올라가 봐야 했다. 발톱의 수장이 된다면 이듬해 진급은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벌떡 일어선 아트리스는 휴게실에 널브러진 제 동료들을 돌아봤다.
“수장은 나로 하겠다고 전하겠어. 이의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해.”
퍽 오만한 그의 통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이 됐다.
만난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트리스의 독선적인 성격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 이의 있는데?”
마벤이 웃으며 번쩍 손을 들었다. 그녀의 금안은 짜증으로 번져 있었다.
“투표도 하지 않고 왜 당연히 너라는 거야? 건방지게. 여기서 온전한 사툰 종족은 나밖에 없잖아. 안 그래?”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던 마벤은 지지 않는 듯이 일어서서 아트리스를 마주 보았다.
“나는 너희들하고 다르게 집안, 종족, 재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수장이 되려면 내가 하겠어.”
“빠지는 게 없다?”
“응.”
“어젯밤 왜 합숙소에서 보내지 않았지?”
“뭐라고?”
“첫날부터 군을 이탈하는 너를 수장으로 하느니 탈영하는 게 낫겠어.”
“내가 언제 나갔는데? 본 적 있어?”
마벤은 낯빛 한 번 바뀌지 않고서 비웃음을 날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상대하던 아트리스는 갑자기 나디사 쪽에 이목을 돌렸다.
“나디사 마로닌. 네가 대답해 봐.”
불붙어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나디사에게 향했다.
어떻게 하면 수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디사는 뭐가 뭔지 몰라 반응이 늦었다.
“마벤 로사와 같은 방을 쓰잖아. 어제 같이 밤을 보냈나?”
“당연하지. 안 그래?”
이런 상황을 겪을 줄은 몰랐다. 한 명은 진실을, 한 명은 거짓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파국을 불러오리란 예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선 진실을 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초반부터 마벤을 알게 모르게 감싸 준 것도 명백히 명령 위반죄였다.
“나디사 마로닌.”
“네.”
“미안하지만 존대는 집어치우고. 진실을 말해.”
아트리스는 큰 키로 아주 짙고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 위압감에 눈이 떨려왔다. 벼랑에 몰린 마벤이 반격하려고 나설 때였다.
휴게실 문 쪽으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숨 막히는 대치에서 눈 돌릴 곳이 필요했던 구경꾼들은 차라리 발소리를 반겼다.
감시관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던 시선들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발소리의 주인은 휴게실 문을 연 채로 들어왔다.
계단 쪽 빗소리까지 합쳐져 실내는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큰 발소리가 휴게실 안을 저벅저벅 돌아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각자 다른 의미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
비밀에 가려져 있던 여섯 번째 인물.
도무지 상식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모든 행사에 불참여하면서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운 좋은 신입.
“좋은 아침.”
아침이라기엔 이미 점심을 넘어갔으며, 해는 뜨지도 않는 우중충한 날씨라는 것이 문제였다.
또 그것을 제쳐 두더라도 군복 바지만 간신히 입고 나타난 그의 상체는 눈을 두기가 민망했다.
탄탄한 양 가슴 아래로 쭉 뻗은 근육들은 섬세하게 짜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낯이 화끈거리는 터라 여인이고 사내고 헛기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막 씻고 나온 것처럼 목에 수건을 두른 불청객은 정작 부끄러움이 없었다.
“윗옷은 어디에 있지?”
아트리스의 눈이 한심하다는 것을 보듯이 바뀌어 있었다. 안 그래도 불성실한 그에게 불만이 있던 참이었다. 첫인상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내 침대에.”
“입고 내려와.”
“가져다주라.”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안 그러면 안 입을 건데. 내가 안 입는 게 좋아서 내버려 두는 거면 그래도 돼. 나는 이해할게.”
아트리스의 경멸은 기어이 정점을 찍었다. 휴게실의 평화는 멀리 떠난 듯했다.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와 빗소리가 맞물리는 이때. 나디사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살면서 놀랄 일이 많이 없었다. 먹고살기 바쁜 이에겐 놀랄 만큼의 사건이라고 해 봤자 봉급이 끊기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세상에, 맙소사.
신입으로 들어온 남자의 외양이 전당포 주인과 똑같았다.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저 신입의 상반신에는 문양 없이 깨끗하다는 것일까.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드는 차에 은발의 남자가 휴게실을 제집처럼 쏘다녔다.
창문을 열고, 닫고, 소파에 앉고, 바닥에 앉고. 그러다가 나디사를 발견한 그의 시선은 깊게 머물며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맞구나. 눈길이 섞이는 순간 남자의 목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선연하게 보였다. 씨익 웃는 그의 뺨에 파인 볼우물도 그대로였다.
돈이 필요한 시기에는 그게 누구든, 설령 파르난의 사람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만. 이건 어마어마한 미친놈하고 엮인 기분이었다.
“인사가 늦으면 나를 까먹을까 봐. 이렇게 보여 줘야 안 잊을 거 아니야.”
이윽고 남자의 황당한 인사에 모두가 대꾸할 기운을 잃은 것처럼 눈을 돌렸다.
그 강직한 아트리스마저도 골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름은.”
“히아신 아스.”
“종족은?”
아트리스는 사툰 종족일 리 없는 그를 두고서 조사하듯 물었다.
막힘없이 이야기하던 히아신이 그 질문에는 눈을 접으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종족은. 무엇이냐고.”
“그건…….”
히아신의 얼굴에는 함부로 지나치지 못할 비장함이 깔려 있었다.
“그게 왜 궁금해?”
“여기 중에 그걸 안 밝힌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나는 말이지…….”
수건을 서서히 쥔 히아신이 팔을 위로 들었다. 그를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라본 아트리스는 시간을 끄는 작태에 주먹을 쥐었다.
“나머지는 쟤가 알려 줄 거야.”
히아신이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나디사가 앉아 있었다.
마법처럼 허공에 흩어져 있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분란을 일으키고서 히아신은 유유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진 그의 무책임은 나디사가 떠안게 됐다.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멀어지는 발소리가 원망스러웠다.
아트리스의 눈빛은 그녀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한 그가 입을 열기 전이었다.
휴게실로 쳐들어온 감시관의 걸음이 더 빨랐다.
“내일부터 임무에 나간다.”
속이 더부룩해 보이는 표정의 감시관은 휴게실로 들어와 좌중을 쭉 둘러보았다.
“수장부터 정해. 누구지?”
감시관의 말에 손을 든 건 아트리스였다.
자신이 수장이라 말하는 그를 두고 마벤은 코웃음을 쳤지만, 찔리는 게 있는 터라 강하게 반발하진 않은 듯싶었다.
“아트리스 메놈. 알겠다, 그렇게 보고해 두지.”
나디사 또한 히아신이 남기고 간 여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넋이 나간 나디사에게 들러붙은 묘한 시선 또한 줄곧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