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빗물이 떨어지는 나디사의 입술에서 여린 숨이 뿜어져 나왔다.
내일부터는 정식 라드군이기에 임무와 훈련이 연달아 내정되어 있었다.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 입문식 같은 것은 건너뛰고 싶은 터였다.
하지만 감시관은 단호했다.
왕자는 일정이 밀려 먼저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수비교 신전 쪽에서 신관을 보내겠노라 약속했단다. 해서 이쪽은 그 신관이 오기 전까지 대기 상태인 것이다.
라드의 발톱은 총인원이 여섯이었다.
선임은 없고 올해 들어온 신입이 발톱의 전부였기에 자연히 무릎이나 몸통에 속한 병사가 그들의 윗선이 되었다.
같은 신입임에도 차이가 나는 것이 억울해 죽을 노릇인데, 시작부터 노골적으로 발톱은 버리는 패라고 널리 알리는 중이다.
내리는 비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굴욕이 사람의 몸을 떨게 했다.
“감시관님.”
저 혼자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감시관이 하품하며 고개를 들었다.
“신관께서 오시기는 하는 겁니까.”
아트리스였다. 맨 처음 나서는 일은 상당한 용기를 요구했다.
나디사는 땅을 보는 척하며 그를 은근슬쩍 곁눈질했다. 비에 젖은 갈색 머리가 그의 흉흉한 눈빛을 얼마쯤 가려 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지금 내가 신관께 언제 오냐고 닦달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저희는 당장 내일부터 훈련이 있습니다. 입문식을 서면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아트리스 메놈입니다.”
“메놈. 경고다. 이것도 일종의 훈련이야. 이만한 인내심도 없이 라드군에서 어떻게 버틸 거지?”
감시관은 쫄딱 젖은 생쥐 같은 그들을 비웃으며 뒷짐을 졌다.
적어도 신관이 오기 전까지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치졸한 감시관의 아량은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아트리스는 감시관을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이럴 때야말로 아트리스의 말에 힘을 실어 줘야 했다. 미우나 고우나 동료가 아니던가.
특히 지금 같이 불합리한 경우에는 더더욱.
나디사가 추위에 파래진 입술을 달싹거린 찰나였다.
나태하던 감시관의 눈빛이 달라졌다. 튕기듯 일어나 허리를 세운 그가 허둥지둥 모자를 벗었다.
“두 번째 신관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로…….”
수비교에서 두 번째로 귀한 이가 직접 누추한 외곽까지 발걸음 했다.
신관 열둘을 대동하고 나타난 록을 보자마자 감시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보나 마나 가장 낮은 이를 보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여 발톱에 배정된 신입들은 입문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만약 귀띔이라도 했다면 푸른 망토가 젖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낭패 어린 기색의 감시관을 본 록은 차분히 그를 진정시켰다.
“왕자님과 첫 번째 신관께서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아닙니다! 이, 이 열악한 곳을 신경 써 주시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지금까지 고압적인 태도로 신입을 대하던 감시관이 안타까울 만큼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대기하던 발톱은 새로 등장한 신관을 관찰하는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수비교의 신관은 예외 없이 사툰 종족이었다. 이런 우중충한 날에도 빛을 내는 금발은 마치 햇볕을 훔쳐 온 것만 같았다.
미인으로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웃으며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는 군인들에게 하얀 신관복으로 감싸진 손을 내밀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전달하는 이가 혼란이 있었던 듯해. 가장 축복받아야 하는 날, 이런 꼴로 만든 것은 나이니 앞으로 그대들에게 수비교의 손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 주어.”
단상에 올라와 예정된 순서대로 입문식을 치를 줄 알았던 모두가 당황한 순간이었다.
감시관의 반응을 보니 이곳에 납실 신분도 아닌 듯한데. 신의 자비를 베풀듯 과분한 약속까지 하질 않았나.
“이쪽부터 시작할까.”
록은 앞에 선 아트리스를 가리켰다. 작은 성탑을 에워싸고 있던 하급 신관들은 록의 말에 따라 입문식을 준비했다.
성스러운 백색의 칼과 해의 기운을 담은 구슬을 가져왔다.
맨 앞줄에 서 있던 아트리스는 순순히 단상 위로 올라왔다.
왕자도, 음악도, 술도 없는 입문식이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진지하게 임했다.
음악 대신 빗소리로 문을 연 입문식의 처음은 따듯한 구슬 위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신관들이 뿌려 둔 작은 구슬 위에 아트리스는 무릎을 굽혔다.
“여기 있습니다.”
손잡이까지 하얀 검은 수비교의 상징이었다.
록의 이름을 박아 넣은 검에서는 흐릿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관의 이름은.”
“아트리스 메놈입니다.”
빗물을 흡수하여 볼품없어진 망토 자락에 검이 올라왔다.
스치기만 해도 그 검의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열기를 품은 검이 아트리스의 망토 끝, 무릎, 마지막으로 어깨를 지나쳤다.
록은 머리 위로 검을 올리고서 축복의 말을 전했다.
“날개 없는 그대가 누구보다 높이 날 수 있기를. 그대의 전장이 될 하늘이 어느 날보다 안녕하기를. 잠시 내려오고 싶은 날에는 따듯한 들판이 그대를 맞아 주기를.”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다.
빗물과 냉대에 지쳐 있던 라드의 발톱에도 그 따듯함이 전해졌다.
축복의 말이 끝나고 손수 아트리스를 잡아 일으켜 준 록은 삐뚤어진 발톱 모양의 배지를 똑바로 달아 주었다.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 신관님.”
아트리스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돌아서서 단상에서 내려왔다.
다음 타자는 아트리스의 옆에 서 있던 마벤 로사였다.
금발의 여인이 무릎을 꿇자 아까와 같은 축복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런 차례라면 마지막 순서는 나디사 마로닌이었다.
그즈음 약해진 빗줄기는 세 번째 순서가 지나고 나서야 먹구름과 함께 사라졌다.
비를 맞아 울상인 열두 명의 신관의 얼굴도 밝아지고 있었다. 상서로운 조짐이라며 웃는 신관들의 얼굴 위로 달빛 한 줄기가 비추었다.
물러간 비 대신 안개가 내린 밤이었다. 달빛 아래서 치르는 입문식은 태양을 숭배하는 수비교의 축복과 어울리지 않는 시간대였다. 그럼에도 이 숭고한 입문식은 중단되지 않았다.
밤안개가 자욱한 식의 끝 무렵에 나디사의 차례가 돌아왔다.
“다음은…….”
고개를 든 나디사와 록은 눈이 마주쳤다. 그처럼 높은 사람을 처음 마주하게 된 나디사는 신기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놀란 제 얼굴이 우스워 보일까 싶어 얼른 눈을 내리깔고서 단상 위로 올라섰다.
꽃처럼 핀 환한 구슬 위에 무릎을 꿇자 젖은 몸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이 풀렸다.
혀를 깨물며 잠이 쏟아지는 느낌을 꾹 참아 냈다. 어서 입문식을 치르고 싶어 성스러운 검이 제 머리 위에 얹어지길 기다렸다.
“…….”
“…….”
소문이 자자한 사내답게 발톱 부대를 성심껏 축복해 준 두 번째 신관 록.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디사의 차례에선 잠잠했다.
축복의 말이 내려오기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자세를 풀었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얼어붙은 듯한 록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금색 들판 같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빗방울이 하얀 뺨으로 떨어졌다. 흡사 눈물같이 또르르 굴러갔다.
안개가 물러서고 광명을 되찾은 달빛이 단상에 내려졌다.
선명해진 시야에는 위엄을 잃어버린 한 연약한 신관이 서 있을 뿐이었다.
축복의 말을 잃어버린 록의 입술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급 신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망연해진 금안에 이채가 돌았다. 바스러지고 있던 그의 정신은 금세 바로잡혔다.
“아니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
하지만 어지럽다고 말하면서도 록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급 신관이 물러서고 다시 축복의 말이 시작되었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름이?”
자애로운 미소가 사라진 질문엔 조바심이 넘쳐났다.
나디사는 그런 록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유 모를 긴장감에 가슴이 막막해졌다.
“나디사 마로닌입니다.”
록은 미세하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미세함을 읽을 수 있는 건 가까이에 있는 나디사 뿐이었다.
록은 백색의 검을 들어 앞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렸다.
생략된 과정이 많았으나 누구도 그의 행동에 대해 참견할 수 없었다.
“날개 없는 그대가 누구보다 높이 날 수 있기를. 그대의 전장이 될 하늘이 어느 날보다 안녕하기를…….”
확실히 록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머리가 꼬인 사람처럼 얼뜨게 행동하다가 축복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검을 거두었다.
록이 마무리 짓지도 않고 등을 돌려 버려, 졸지에 그녀의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
아래에 있던 신관들은 단상 위로 올라와 뒤늦은 수습을 했다.
“일어나시죠.”
하급 신관의 말에 나디사는 홀로 구슬을 딛고 일어났다.
록은 아예 이쪽을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다 끝난 건가?”
“네……. 한 명이 더 남아 있긴 한데, 지금 이 자리엔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신관들의 대화를 몰래 훔쳐 듣고 있던 감시관이 비굴한 자세로 대답했다.
“도저히 몸 상태가 아니라며 들어가고 싶다고 한지라. 축복이 없어도 괜찮답니다.”
“나중에라도 필요하다면, 신전으로 와 달라고 말해 주게.”
그만 돌아가지, 라는 말 한마디에 신관들은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나디사는 빗물 고인 웅덩이를 밟고 사라지는 열세 명의 신관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축복도 해 주기 싫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다정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느낀 건 혐오감이나 증오가 아니었다.
나디사는 초라한 탑을 빠져나가는 금색의 행렬을 보며 발톱 모양의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누군가 해 주지 않으면, 저 자신이라도 축복해야 하니 말이다.
다음 날 작은 탑에도 축복이 내려졌다는 소문은 빠르게 번져 갔다.
모두 입을 모아 두 번째 신관인 록의 넓은 마음을 칭송했으나 그가 한 여인의 축복을 마치지 못했단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