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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6화 (6/210)
  • 6화

    라드군은 왕국군 중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곳으로, 권력의 상징이자 왕국의 얼굴마담이었다.

    일반적으로 왕이 될 후계자가 라드군의 통솔권을 가졌다. 현재 왕이 될 자는 첫째 왕자로 정해져 그에게 통솔권이 가 있었다.

    매번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강력한 군대는 이처럼 왕권과 친밀했다.

    비록 그 수는 적지만, 일단 전장에 나타났기만 하면 승기를 잡는 라드군의 위명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라드군은 가장 상위 부대인 머리부터 심장, 손톱, 몸통, 무릎 순으로 내려간다.

    그러니까 라드의 발톱이라는 것은, 신입이면 보통 배정되는 무릎에도 못 간다는 뜻이었다.

    발톱 모양의 배지를 가슴에 단 나디사는 새삼 친모를 떠올렸다.

    플란 종족임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라드의 심장에 소속되어 있던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툰 종족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이런 취급일 것이다. 있는지도 몰랐던 발톱이라는 부대에 소속되다니.

    나디사는 마차 안에서 조심스레 제 배지를 만져 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본격적인 라드군의 본거지로 떠나는 마차는 둘로 나뉘었다. 나디사는 그중 바퀴가 큰 마차에 올라탔다.

    주근깨가 있는 코 주변을 긁적거리는 시네라 칸과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아트리스 메놈. 두 사람이 동행한 차였다.

    라드군의 본거지로 이동하는 동안 세 사람은 각자 시간을 보냈다. 아트리스는 독서, 나디사는 풍경 감상. 시선이 바쁘게 움직이는 건 시네라뿐이었다.

    마차를 탄 순간부터 그는 좀체 가만있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독서를 방해받은 아트리스는 보던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날카로운 그의 눈초리에 시네라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는 발톱에 들어올 줄 몰랐어서, 말단, 이잖아. 그, 봉급은 얼마 정도 되는 걸까?”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나도 너와 같은 입장이라는 걸. 어제 들어온 내가 알 턱이 없잖아.”

    “아, 그렇지, 미안.”

    아트리스의 딱 끊어 내는 목소리에 시무룩해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나디사는 이 대화에 휘말릴 것을 예상하고 몸을 긴장시켰다.

    “저, 그, 나디사, 맞지?”

    말 한 번 힘겹게 꺼내는 시네라는 제 당근색의 눈처럼 얼굴이 새빨갰다. 수줍음이 과한 사람 같았다.

    “나, 나는 여기에 와서 나 말고 다른 소수 종족은 처음 봐서 신기했어. 플란 종족은, 그, 신비롭기로 유명하잖아.”

    분위기를 풀고자 하는 말임을 알고 있지만 그가 꺼낸 주제가 유쾌하지 않았다. 신비롭다는 말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수비타 왕국에서 신비로운 것은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나도 신기했어요. 팃이라는 종족은 처음 봐서.”

    팃 종족은 대체로 온화하고 순하여, 사툰 종족의 정복 전쟁에서도 큰 반기 없이 복종의 맹세를 했다. 말 그대로 싸움에 재능이 없어 보이는 종족의 청년인 그가 라드군에 지원하다니.

    “말, 말 편안히 해. 우리, 같은 부대고, 그리고…….”

    “플란 종족은 다른 종족보다 비교적 라드군에 들어오기 쉽지.”

    대화를 들은 아트리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플란 종족이 하나 더 있었지. 이름이 그리사였던가.”

    “응, 맞아, 그, 그리사 데이라고…….”

    “너한테 물은 게 아니야, 시네라.”

    “아, 미안, 미안해.”

    “미안하진 않아도 돼. 사과가 아니라 두 번은 그러지 말라는 뜻이니까.”

    과도하게 위축된 시네라와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아트리스. 갈색 머리에 금안인 그는 잘 교육받은 사람처럼 사소한 것에도 절제가 묻어났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책을 읽는 행위나 단정히 자른 머리카락이 그렇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을 그가 라드의 발톱이 된 이유는 아마 그것일 거다.

    “그, 아트리스는, 무슨 종족이야?”

    책을 다시 펼쳐 보려던 아트리스의 손이 멎었다.

    황금의 자식들. 사툰 종족만이 금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금실처럼 밝은 머리가 그들의 특권이자 특징이었으니, 당연히 갈색 머리의 사툰 종족은 없었다.

    즉, 아트리스는 혼혈로 설명할 수 있었다.

    “시네라 칸.”

    “응?”

    “미안하다는 말은 이럴 때 써.”

    “어?”

    “초면에 미안하지만 입 좀 다물어. 독서에 방해되잖아.”

    민망해진 시네라는 낯이 달아올랐다.

    저를 바라보는 아트리스의 눈이 잘 벼린 칼날 같기 때문이었다. 당장 제 목을 칠 것처럼 번뜩이는 눈빛.

    시네라는 홍당무처럼 빨간 눈을 눈꺼풀 아래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디사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파악했다.

    한 놈은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산골 소년이고, 한 놈은 오만한 사툰 종족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았다.

    나디사는 훌쩍거리기 직전의 시네라에게서 눈을 돌렸다.

    동기들이 어떻든 간에, 말단이 되든 간에, 자신은 라드군이었다.

    친모가 자식과 친우까지 내팽개칠 만큼 사랑하는 라드군에. 그게 중요했다.

    그녀는 라드군이 아닌 이상 본인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디사의 생을 짓누른 건 원망보다는 호기심이 컸다. 그 무거운 호기심은 친모가 아껴 마지않는 라드군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감상은,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나서 모르겠지만.

    여전히 나디사는 친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

    라드군의 본거지는 수비타 왕국 중심부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왕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서 수도인 왕궁 가까이에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왕국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집단답게 라드군의 본거지는 왕실 직속 부대보다도 돈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합숙소 건물은 왕의 친인척을 위해 쓰던 성 하나를 통째로 빌려 쓰고 있었다.

    그 앞에 작은 초소와 라드를 위한 마구간을 짓고, 훈련에 매진한 군인을 위하여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인공 호수를 조성해 뒀다.

    첨예한 탑으로 이루어진 성은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서 꽤 쓸 만한 합숙소가 됐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빈터에는 신입을 위한 입문식이 한창이었다.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는 이들의 앞으로 왕자와 수비타 왕국의 첫 번째 신관이 축복을 위해 방문했다.

    이런 축복이 가득한 날, 짓궂게도 하늘은 비를 내렸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왕국의 자랑이 될 새 사람들을 위한 축제가 진행되던 그 시각.

    “저희는 입문식을 하지 않는 건가요?”

    본거지 외곽에 지어진 작은 탑을 합숙소라며 받은 발톱. 이 작은 부대는 그 축제에 초대받지 못했다.

    같은 신입임에도 입문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본거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입문식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도 아니었다.

    성탑 앞에서 비를 맞으며 일단 대기하라는 명을 수행 중이었다.

    “저쪽의 입문식이 끝나면 이쪽에도 들린다고 하셨다. 기다려.”

    본거지 외각의 성으로 배치된 것도 기가 막힌 와중. 입문식이란 핑계로 그들을 두 시간째 세워 두고 있었다.

    검은 군복을 입고 다니는 감시관의 역할은 하나뿐이었다.

    라드군의 심부름꾼 노릇.

    하지만 그런 감시관조차도 라드의 발톱은 제 아래로 보았다.

    푸른 망토를 입었으나 그만한 대접은 받지 못하는 자들.

    빗줄기 때문에 입문식을 서둘러 끝내는 기색임에도, 축복을 위해 방문해야 할 왕자와 신관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말단 주제에 첫날부터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일렬로 서 있는 라드의 발톱은 그 누구도 이 입문식에서 웃지 못했다.

    가장 축복받아야 할 날 가장 비참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 * *

    수비교의 두 번째 신관인 록은 왕궁으로 돌아올 첫 번째 신관과 왕세자를 기다렸다.

    “두 번째 신관님. 왕세자께서 마중 나올 필요는 없으시답니다. 비를 맞으셔서 곧장 욕탕으로 가신다고요.”

    빗줄기를 가로질러 뛰어온 터라 어린 하인의 몸은 홀딱 젖어 있었다.

    록은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굳이 뛰어오지 않아도 됐는데. 이걸로 얼굴을 닦게.”

    “아닙니다.

    “사양 말고.”

    엄한 첫 번째 신관 랍과 달리, 바로 그의 밑 서열인 록은 신실하고 자애롭기로 소문이 났다.

    그의 호의가 거짓이 아님을 아는 어린 하인은 공손히 그 손수건을 받았다.

    록은 하인이 빗물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하필 왕자가 고대하던 입문식 날에 비가 오다니.

    호승심 강한 왕자가 이번엔 누구에게 분풀이할까 걱정이 들었다.

    “올해의 입문식은 비가 말썽이구나. 왕자님을 잘 달래 드려야겠다.”

    “네. 걱정 마십쇼, 두 번째 신관님.”

    “그래.”

    손수건을 돌려준 어린 하인은 이만 가 보겠다는 듯이 허리를 숙였다.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 준 록도 수비교 신전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맞다. 신관님.”

    “그래.”

    떠나려던 어린 하인이 돌아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하지만 깜빡하고 전해 드리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록은 괜찮다는 뜻으로 다정히 웃어 보였다. 안심한 눈빛의 어린 하인은 못다 한 말을 전했다.

    “외곽 쪽까지는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아래 신관들에게 대신 준비를 해 달라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음?”

    평화로이 빗소리를 감상하던 록은 잠시 멈칫했다.

    외곽 쪽에 입문식이 필요한 상황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외곽 쪽에 새로 라드의 발톱이 생겼습니다. 그쪽은 입문식에 참석하지 못했거든요. 아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두 번째 신관님께서 가실 필요는 없으시고…….”

    록은 기가 찬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거지 외곽이라고 해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늘이 다르게 보일까.

    이 궂은 날씨에도 축복을 기다리고 있을 어린 병사들이 아른거렸다.

    “내가 가지.”

    “예?”

    “채비해서 내가 간다고 전하게. 그편이 왕자님이나 첫 번째 신관께서 안심하실 수 있을 거야.”

    어린 하인이 말한 아래 신관이란 그를 지칭하는 게 아닐 터였다.

    하급 신관 아무나 보내어 입문식을 기다리고 있을 그들에게 던져 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록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외곽으로 빠졌다고 한들, 그들도 수비타 왕국의 자랑스러운 라드군이었다.

    그건 해가 동녘에서 뜨는 것처럼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날이 궂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왕자님께서 기다리시겠어. 어서 가 보렴.”

    말을 마친 록은 하얀 신관복을 나풀거리며 왕궁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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