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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화 (2/210)

2화

나디사는 제대로 된 성인 남자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직장인 세탁소는 여자가 주를 이뤘고, 하루 임금이 터무니없이 낮은 샤포드 같은 곳엔 멀쩡한 남자들이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농장과 경비대 일을 전전하다가 샤포드를 떠나 타지로 가 버리니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여자들밖에 없으니 치안은 좋지 않고, 늙고 힘없는 노인과 여자만이 있다는 소문에 샤포드는 점점 누구나 기피하는 마을이 되어 갔다.

“음.”

그래서 나디사의 놀라움은 상당했다. 전당포의 주인은 어느 정도 멀끔한 수준이 아니었다.

은발에, 녹색 눈.

그 조합도 신선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는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대단히, 라는 수식어가 민망할 만큼.

추위를 타지 않는 듯이 밖으로 내놓은 팔 힘줄에 시선이 나앉았다.

전체적인 몸의 선이 날렵한 듯하지만 일일이 뜯어 보면 남자다운 단단함이 있었다.

여러 이유가 겹쳐 나디사가 머뭇거린 차였다.

오르간 건반 누르듯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눈가 쪽을 가리켰다.

“눈이 보라색!”

조금 커졌던 나디사의 눈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나디사는 웃음이 헤픈 남자를 보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라색? 보라색이 비싼가?”

“아니요. 눈의 색 때문에 비싼 건 아닐걸요.”

속으로 키워 준 마로닌 부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린 뒤, 뻔히 속내가 보이는 남자를 설득의 장으로 끌고 왔다.

“저는 플란 종족입니다. 플란 종족의 눈은, 비싸요. 피도요.”

“나는 처음 들어 봐.”

“그래요? 그런데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처음 듣는 거 좋아해. 내가 틀리는 것도 좋아.”

남자는 다부진 어깨를 창문 밖으로 내민 뒤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

은색 반지를 낀 손가락이 눈두덩에 스쳤다.

“크게 떠 봐.”

“네.”

나디사는 할 수 있는 한 눈에 힘을 줘서 크게 떴다.

남자는 제 눈두덩이 살을 잡고 벌려, 시린 보라색 눈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런데 눈을 어디에 써?”

“그걸 왜 저한테 묻죠?”

“너한테 물으면 안 되는구나. 그럼 누구한테 물어?”

“당연히…….”

“당연한 거 싫어하니까 나는 너한테 물어볼래. 내가 눈을 사면, 그걸로 뭘 해야 좋을까.”

“…….”

“정말 할 게 없잖아. 공으로 쓰기엔 작고. 무기로 쓸 수도 없고. 먹기도 조금 그래. 맛없어 보여.”

하나도 예상된 반응이 없었다.

플란 종족의 눈과 피라고 하면 비싸게 쳐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 앉게 듣던 말이니까.

유명한 전당포의 주인이 되려면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야 하는가 보다.

삶이 워낙 고된지라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나디사조차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정신이 사나웠다.

감정을 끝낸 남자의 손이 창틀에 턱 올려졌다.

상체를 빨래처럼 늘어뜨린 남자의 눈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내가 안 사고 싶다고 하면, 다른 것도 더 내놓겠지?”

“이것 말곤 없어요.”

남자의 반응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는 이 거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쪽이 아니었다.

나디사는 최후의 수단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편지를 꺼내서 창틀에 놓아두었다.

남자는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설명하라는 식으로 눈썹을 추켜세웠다.

“편지 읽는 거 싫어하니까 읽어 줘.”

“라드군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입니다. 기본적으로 내어 주는 군복 외에 안장값, 평상복 세 벌, 그 외 기타 비용이 필요해요.”

나디사의 말을 집중하며 듣고 있던 남자는 1분도 지나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내용을 흘려들은 얼굴이었다.

“그렇구나.”

“내일까지 마련해야 돼요.”

“그럼 눈은 언제 주게? 지금?”

“아니요. 제가 죽고 나서.”

하하, 하고 웃은 남자의 얼굴은 오뉴월 햇살처럼 밝았다.

“죽는 날이 정해진 사람도 아닌데, 그럼 나는 돈을 빌려주고 네 명복도 빌어야 하고, 시체 수거도 해야 하고. 그렇다면 네 눈이 아주 비싸거나 아주 마음에 들어야 하잖아.”

“돈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요. 눈은 아직 필요하고요. 내일까지 마련해…….”

나디사는 문득 여기까지 말하고선 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전당포는 없을까. 알아본 바로는 여기가 가장 유명하고 빨리 돈을 주는 전당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죽은 뒤의 눈을 주는 대가로 돈을 빌리는 게 터무니없는 짓이었나 보다.

머리를 굴리느라 답을 미루자 남자는 딱 손가락을 튕겼다.

“안녕? 나 아직 여기 있어.”

“안 사실 겁니까?”

나디사는 창틀에 놓아둔 편지를 가져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그렇지. 일이 쉽게 풀릴 리 없었다. 안 사겠다는 사람 붙잡고 시간 낭비할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롯소 안을 샅샅이 뒤져서 살 사람을 수소문해야지.

전당포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차였다.

“안 판다고 하니까 사고 싶어지네.”

변덕쟁이 주인이었다. 가다가 붙잡힌 나디사는 고개를 어정쩡하게 돌렸다.

아까보다는 진중해진 분위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매끄러운 눈빛은 손에 든 편지에 머물렀다.

“우리의 계약은 죽은 너의 몸을 내가 갖는 대가로 필요한 돈을 달라는 건데, 글쎄, 난 거기에 조건 하나를 더 붙이고 싶어. 그러면 조금 내가 악랄해 보일까?”

“네.”

악랄해 보인다는 말이 좋은 듯 남자는 볼우물이 파일 정도로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천진한 소년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나디사는 쉬이 상념을 깨트릴 수 있었다.

남자의 목과 어깨에 정체불명의 문장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샤포드에서 자라나 세상 물정을 모른다지만 저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불길한 문장은 목둘레가 파인 웃옷 때문에 드러난 가슴에도 생겨났다.

저절로 한걸음 물러서게 된 나디사는 하품하며 입을 가리는 남자의 행동에 기이함을 느꼈다.

서서히 풍경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외딴곳에 자리한 오두막은 이제 더 이상 전당포라고 부를 수 없었다.

깨진 창문에 붉은 핏자국이 다다닥 붙어 있었다. 야간 사냥을 나선 올빼미 울음소리가 적절한 시기에 울려 퍼졌다.

남자는 그 핏물로 범벅된 전당포 안에서 회중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돌지 않는 고장 난 시계를.

나디사는 엊그제 짧게 깎은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당신. 전당포 주인이 맞습니까?”

간절함이 지나쳐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 상황은 사람의 힘으로 벌어진 게 아니었다.

코앞에 있는 피 칠갑을 몰라보았던 것은 말로만 듣던 마법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전히 마법을 쓸 수 있는 경우는 오로지 세 가지뿐이었다.

신을 믿는 신관이 되거나, 라드를 모는 라드군이 되거나, 마지막 경우가 최악인데 ‘마혼’이라는 암담한 존재와 계약하거나.

그 계약자들은 몸에 표식이 생긴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표식 같은 것을 가진 남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회중시계를 닫은 남자는 이윽고 삐딱하니 창틀을 짚고 섰다.

“아니면 우리의 거래가 달라질까?”

퍽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저 녹색 잎사귀 눈은 그녀의 의중을 떠보는 중이었다.

나디사는 애써 침착한 척을 해 보였다.

“돈만 확실히 줄 수 있다면 달라지지 않죠.”

“그럴 것 같았어.”

잘 골랐다는 듯이 웃은 남자는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고서 악수를 청했다,

“두려운 게 없어 보여. 멋있어.”

그러니까 그깟 돈 때문에 여자가 이러냐는 비꼼처럼 들렸다.

연고 없는 마을에 와 맨몸으로 돈을 빌리려고 했던 건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그렇지만 나디사는 태생부터 막히고, 밀리는 그 삶을 무모하게라도 나아가 보고자 했다.

“맞아요. 난 두려운 게 없어요.”

“그러면 내가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거잖아. 그렇지?”

“네, 당신이 누구여도……. 돈만 내줄 수 있다면.”

설령 상대가 마혼과 계약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소문은 무성하였으나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사실 그녀에게 동화 속 악의 무리보다 무서운 것은 세탁소가 휴일이라 일당을 벌지 못한 날이 아니던가.

“히아신이라고 불러. 성은…….”

손을 내민 남자의 눈이 전당포 간판을 건성으로 훑었다.

“아스라고 해.”

누가 보아도 전당포에 달린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아스의 전당포에서 나왔으나 실제 이름과 가문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과의 악수라니.

잡으면 끝인 손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고되지만 나름 큰 사건, 사고 없이 삶을 살아왔다. 이 손을 잡는다는 건 그런 삶과의 이별을 뜻했다.

누구보다 바라는 바였다. 나디사는 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맞닿은 손바닥은 장갑을 낀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히아신 아스.

이름은 이 거래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라 그녀에게 들어올 돈이었으니.

“나디사 마로닌입니다. 돈만 제때 준다면, 제 시체는 당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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