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꼴이 엉망이었다. 그건 남들 눈에도 다르지 않은가 보다.
마중 나온 수많은 인파와 인사를 하는데 기름기 흐르는 머리, 풀린 눈, 코, 다리에 관해 한 마디씩 꼭 물어왔다.
“저, 안녕하십니까. 나디사 경.”
“아, 누구신지.”
알고 보니 이번에 배정된 하녀였다.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소개를 듣고, 식사 메뉴를 듣다가 문득 이 전시에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소, 양처럼 죽어 나가는 날에 이건 너무 화기애애한 것 아닌가.
“그, 식사도 좋지만 우선 씻으시는 게…….”
이내 본론을 꺼낸 하녀는 얼른 뛰어가 천막을 열어 주었다.
내리깐 눈으로 꼴을 돌아보니 음, 과연, 나라도 욕탕에 처넣고 싶을 거다.
황송하게도 하녀는 옷을 갈아입혀 주고, 씻겨 주기까지 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출세했다. 웃으며 단추를 하나 풀다가, 아차, 그게 생각나고 말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네?”
개인 천막에, 하녀까지 주는 것은 특혜였다. 고생고생하여 뜨끈한 물까지 대령해 두었더니 내쫓기나 해? 하녀는 그런 얼굴이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단호한 거절에 우물쭈물하던 하녀는 별수 없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홀로 코트, 셔츠에 달린 금속제 단추를 모두 풀었다. 어릴 적부터 해 오던 일이어서 어려울 건 하나 없다만.
가슴 언덕 쪽에 난 수많은 입술 자국을 보며 그 남자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얼마나 모진 놈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속옷을 벗고 하녀가 미리 덥혀 놓은 물에 들어갔다. 팔, 다리, 배, 가슴, 머리 순으로 천천히 물에 잠겼다.
칭송받아 봤자 피비린내를 씻고 나면 그저 한 명의 여인일 뿐이라는 것을 이렇게 실감하고 만다.
출렁이는 물이 그의 손길 같다. 상처가 난 손으로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쓸어 만지다가 음부 근처에서 손이 망설였다.
이 상황을 이해한 손가락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종아리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됐다 싶어 물 밖으로 나왔다. 가운을 두르고 앉아 물에 분 손가락으로 편지를 썼다.
[그 남자는 긴 장마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도 그를 떠올리면 눈가가 젖었다.
떠나보내리라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는 비를 타고서 나의 침실로, 마음으로, 기억으로 들어왔다.
혼자서 뺨을 꼬집어 본 적이 있다. 다리 사이를 지나다니는 바람이 그의 손길 같아서.
별이 펼쳐진 밤하늘을 보면 몸은 뜨거워진다. 상냥한 유린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의 배 아래서 바르작거리던 첫날 밤. 은밀한 곳을 드나드는 손길에 울던 그날. 온몸이 젖은 남자가 사랑에 대해 말했다.
그 기억이 있는 한 계속될 것 같다.
나 혼자 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읽는 날이.
잘 지내기를.
나도 그럴 테니.]
“나디사 경.”
반으로 접힌 편지는 오늘도 수신인이 없다.
다시 옷을 입을 시간이었다.
1화
나디사 마로닌의 하루는 길었다.
볼일이 있어 허리가 펴지기 무섭게 세탁소를 나섰다만 늦은 밤이 돼서야 검문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행료.”
“여깄습니다.”
“어디서 왔지?”
“샤포드.”
“샤포드? 거기서 사람이 왔다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있나?”
샤포드라는 말을 듣자마자 검문관의 눈빛이 깐깐해졌다.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다. 나디사는 낡은 주머니에서 삼 일 전에 받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여깄습니다.”
“어디 보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받아 낸 편지를 훑던 검문관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마침내 검문관이 봉투에 찍힌 인장을 확인했을 즈음엔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라드군에 합격하셨군요.”
우선 말투부터가 달랐다. 사람이 오든 말든 반쯤 드러누워 코를 후비던 그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확인이 끝났다며 공손하게 두 손으로 편지를 돌려준 검문관은 직접 일어나 검문소 문을 열어 줬다.
지금까지의 무례는 없던 일로 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혹시 롯소에 처음이어서 안내원이 필요하시다면…….”
“괜찮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나저나 바쁘실 텐데 시간 낭비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안타까울 정도로 굽신거리는 검문관을 보며 문득 열흘 전 일이 생각났다.
마을 아이가 열병에 걸려 옆 마을로 떠나야 할 일이 생겼는데, 검문관 통과가 어려워 의사는 구경도 못 했다고 들었다.
“그럼, 나가실 때 뵙겠습니다.”
검문이 오래 걸리지 않았음에도 손발에 진땀이 흘렀다.
자본이 조금 있는 사내라면 한 번씩 들려 본다는 롯소는 걸어 들어갈수록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옷 한 벌에 금화를 몇 닢씩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수 지은 치마를 입은 여자는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불이 꺼지지 않는 롯소의 밤은 취객과 부랑자, 그리고 도박꾼의 차지였다.
“이봐.”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 우리 심부름도 같이 해 줘.”
술 냄새를 풍기는 사내들은 괜히 지나가는 나디사를 말로 툭툭 건드리며 저들의 유희 거리로 삼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디사의 입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걱정한 것보다 시비 거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몸이 아닌 말로 거는 시비는 이쪽에서 무시하면 됐다.
“저기.”
“응?”
“길 좀 알려 주시겠어요. 아스 씨의 전당포를 찾고 있는데요.”
“아스의 전당포?”
하얀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말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의 시선에서 두 가지를 읽을 수 있었다.
어쩌다가 저런 비렁뱅이가 롯소에. 게다가 전당포를 간다니, 말세군.
식당의 요리사로 보이는 남자는 딱 하다는 듯이 그녀를 만류했다.
“무얼 맡기려는지 모르겠지만. 아스는 구두쇠로 유명해. 제값을 못 받는 정도가 아닐 텐데.”
“저도 제값을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니라서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허.”
생각보다 더 대단한 꼴통이 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은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왼편을 가리켰다.
“쭉 가. 허물어져 가는 가게 하나 보일 거다.”
“고맙습니다.”
남자의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법한 것이, 아스는 반값도 감사할 정도로 가격을 후려치는 구두쇠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한 금액도 아쉬운 사람만이 아스를 찾았다.
“젊은 여자가 벌써 거기까지 가다니…….”
롯소에서 보는 도박꾼은 거의가 남자였다. 간혹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만큼 가난한 티를 풀풀 풍기지는 않았었다.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남는 돈으로 재미 삼아 해 본다면 모를까.
아스가 소문난 구두쇠라고 알려 줬음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여자의 얼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모르겠다. 이 롯소에서 그녀 같은 한량은 한둘이 아니니 모른 척하는 게 나을 거다.
남자는 아까 피우지 못한 담배에 불을 붙였다.
* * *
웬만한 도박 중독자가 아니고서야 인가에서 떨어진 그곳은 들릴 일 없는 터였다.
아스의 전당포. 인적이 드문 길가에 오두막 한 채만이 덜렁 지어져 있었다.
여기까지 올 담이 없으면 돈을 빌릴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했다.
나디사는 닫혀 있는 전당포의 창문을 노려보듯이 봤다. 자그마한 그림자라도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문전성시를 이뤄야 할 전당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나디사의 주먹이 창문으로 날아갔다.
쾅,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자신이 왔음을 전당포에 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전당포의 주인을 만나야 했다. 정 안 되면 밤을 지새울 계획이었다.
이곳만큼 돈을 빨리 쳐주는 곳은 없다고 들었다.
흥정에 실패할 것을 걱정했지, 주인이 없어서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될 줄이야. 커다란 낭패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신이 그녀의 편을 들어 주었다. 내내 미동 없던 작은 창문이 위로 올라갔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벌어진 창문 틈을 통과한 손이 쇠고리에 한 팻말을 걸었다.
-쉬는 날♡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적은 그 팻말을 걸고서 사라지려고 했다.
냉큼 떠나라는 신호였으나 나디사의 눈빛은 단호했다. 닫히기 직전인 창문에게 말을 던졌다.
“글을 못 읽어요.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
거짓말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전당포 주인과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해 잔꾀를 부렸다.
조명이 꺼진 전당포는 썰렁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든 손이 생각 중인 것처럼 멈추어 있었다.
“돈을 빌리려고 왔습니다. 내일까진 시간이 없고요.”
그때 안쪽에서 낮고 간사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짐작한 것보다 젊게 들리는 웃음소리였다.
전당포 주인은 그녀의 절박한 말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조금씩 위로 창문을 올리던 주인은 중간쯤 손을 거두었다.
전당포 밖으로 흘러나온 냄새가 코를 쏘았다. 운이 좋아 닭이라도 잡는 날엔 이와 비슷한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 말이다.
“오늘은 쉬, 는, 날, 이라고 적었어.”
활기찬 전당포 주인은 팻말에 적힌 글을 또박또박 읽어 줬다.
“그래도 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당신한테 팔고 싶은 게 있어요.”
반쯤 열린 창문으로 팔짱을 낀 남자가 보였다. 나디사는 창문틀을 잡고서 허리를 조금 숙였다.
“보시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네.”
“파는 게 아니고 맡기는 거잖아. 전당포는 물건을 맡기고 돈을 받는 곳이지? 그렇지?”
젊은 남자는 아랫사람 대하듯 말을 낮추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러한 말투가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나디사는 창문틀을 잡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전당포가 뭐 하는 곳인지 압니다. 그걸 몰라서 판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남자는 한 자세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맡길 수 없는 물건입니다.”
“왜냐고 묻기 싫은데, 묻고 싶어. 왜?”
일부러 호기심을 자극해 주인이 가게 문을 닫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것을 들켰나 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남자가 이 대화에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나디사는 그를 낚을 마지막 미끼를 던지기 전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팔고 싶은 게, 제 눈이라서요.”
나디사의 귀를 통과하고 있는 목소리는 제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건조하고 덤덤했다.
그리고 그 건조한 울림을 들은 남자의 하얀 손이 창문을 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연결되어 있던 작은 창들이 올라갔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은 어느덧 남자의 상반신을 모두 담을 만큼 커다래졌다.
모습을 드러낸 전당포 주인은 가히 놀라웠다.
제 눈을 판다는 말에 그는, 소름이 쫙 끼칠 만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