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16화 (116/119)

116화

* * *

“그런 일이 있었다고?”

프리비아는 필립이 마스터 오템을 만난 이야기를 들은 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월광검의 계승자에게 의무 같은 게 있었습니까?”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너를 그냥 내버려 두었겠느냐? 내 서약은 오직 월광검이 제대로 계승되도록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러면 마스터 오템은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한 겁니까?”

“내가 어찌 알겠느냐? 드래곤이라고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한다. 뭐 오템 그놈이야 워낙 아쉬운 게 많은 삶을 살았으니 후계자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지.”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템 그놈? 너만큼은 아니지만 같은 세대에 태어난 인간 중에선 가장 잘난 놈이었지. 당대에는 놈의 일검을 받아내는 놈이 드물었다.”

“같은 세대라면 ‘검성’이라 불린 마스터 솔베인도 있지 않습니까?”

필립이 알기로 천 년 전 가장 강했던 검사는 마스터 솔베인이었다. 프리비아는 필립의 질문에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솔베인? 그놈도 제법 잘났지. 하지만 놈은 생에 단 한 번도 오템을 이기지 못했다. 애초에 분수에 맞지 않는 영광을 누리던 놈이었지. 가진 재능에 비해 과분한 의무를 지었고, 다행히 인복은 있어 어떻게든 해내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프리비아의 말투로 봤을 때 그녀는 그 검의 대가들과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것 같았다.

“어쨌거나 너는 의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애초에 그놈들은 계승자에게 의무 같은 걸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예. 뭐 알겠습니다. 그런데 프리비아 님.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무엇이냐?”

필립은 응접실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프리비아를 바라보며 진심이 담긴 질문을 건넸다.

“집에는 안 가십니까?”

당최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프리비아는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게 집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요 일주일 동안 필립은 그녀가 다른 곳에 가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하루 내내 이 별장에서 먹고 자며 남는 시간에는 월랑족 로로의 딸이나 흑묘족 타니아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야말로 돈 많은 백수의 표본이었다.

‘안 나가겠다는 말이군.’

프리비아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필립은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가서 데려온 월랑족의 무녀와 이야기나 나누거라. 그 계집애는 제법 쓸모가 많으니 잘 구슬려서 이것저것 시키면 될 것이다.”

“셴리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그 꼬맹이 말이다.”

“그녀가 잘하는 게 많습니까?”

“청소를 잘하지. 요리도 제법 하고. 종종 내 둥지의 청소를 맡겨 놓으면 결과물이 나쁘지 않더구나.”

“…으음. 그렇군요.”

월랑족의 무녀라면 고대 제사장이라고 봐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신분이 높았다. 적어도 필립은 그렇게 생각했다.

월랑족 무녀 셴리를 밀반입하는 데 성공한 필립은 일단 그녀를 로로와 함께 지내도록 배려했고, 오랜만에 만난 자매는 온종일 붙어 다니며 우애를 과시하고 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응접실을 아주 자기 방처럼 쓰는군. 이왕 이렇게 된 거 큰 방을 하나 내줘야 하나.’

필립은 한숨을 내쉬며 응접실을 나섰다. 집에 여자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복도에 음기가 안개처럼 깔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미야아옹….”

생각 없이 복도를 걷던 필립은 문득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새끼 고양이가 비 맞은 쥐처럼 몸이 젖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 비가 온 적이 없는데, 어쩌다 그렇게 젖었니. 타니아?”

“미야야앙….”

타니아는 애처롭게 울며 필립에게 뛰어들었다. 그녀를 안아 든 필립은 문득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이건 침 냄새잖아.?’

그때 복슬거리는 은색 털뭉치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월랑족 라포와 로로의 딸이었다.

‘이름이 라티아라고 했나?’

통통한 몸통과 짧은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렇게 깜찍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타니아는 그녀가 두려운 모양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쟤, 쟤 가라고 해….”

타니아는 아주 가끔 사람의 말을 했고,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나 제스쳐로 해결했다.

“왜 그러니?”

“자꾸 쫓아다니면서 핥는단 말이야….”

“네가 좋아서 그런 거겠지.”

필립은 라티아에게 손짓했다.

“앙!”

그 작은 강아지는 꼬리를 열정적으로 흔들며 필립에게 달려왔다. 타니아를 안고 있는 반대쪽 팔로 라티아를 안아 들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하아아악!”

라티아가 혀를 내밀며 자신을 핥으려 하자 타니아는 이빨을 드러내며 털을 바짝 세웠다. 아마 라티아가 아직 새끼가 아니었다면 당장 타니아의 앞발에 턱이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반려동물도 많아졌군. 개 두 마리에 고양이 한 마리라.’

그녀들마저 모두 암컷이라고 생각하니 필립은 문득 어지러워졌다. 물론 그녀들은 모두 수인, 즉 사람이었으나 아무래도 짐승의 형태가 지내기엔 더 편한 모양이었다.

필립은 두 새끼 동물들을 데리고 로로에게 내어준 방으로 향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해요. 작은 주인님. 제 동생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로로는 필립에게 극도로 공손히 인사했다. 그녀는 인간의 형태로 변해 그녀의 여동생인 월랑족 무녀 셴리와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주인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돌이 된 채였을 거예요. 어젯밤에도 그런 꿈을 꿨어요.”

“나쁜 기억은 빨리 잊는 편이 좋겠지. 푹 쉬면서 마음을 좀 추슬러라.”

필립이 부드럽게 말하자 셴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월랑족의 주인께서 바쁘게 지내고 계신데, 어찌 제 몸이 편할 수 있겠어요? 무슨 일이라도 시켜만 주신다면 신명을 바쳐서 해내겠어요!”

기껏해야 쟈니스 또래로 보이는 셴리가 그렇게 말하자 필립은 흠, 하고 침음했다. 일 같은 걸 시키기엔 너무 어린 게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별장에서 일하는 하녀들도 그녀보다 고작 몇 살이 많을 뿐이었다.

“뭐든 좋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될 거다. 지금은……그렇지.”

필립은 품에 안고 있던 새끼 동물들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 애들을 좀 부탁할게. 나는 할 일이 좀 있어서.”

“맡겨만 주세요!”

셴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이제 루아의 검술과 카밀라의 체력 단련을 봐줄 시간이었다.

* * *

꿀맛 같은 휴일을 덧없이 보낸 필립은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기 위해 아카데미 외곽의 창고 건물로 향했다.

여행부 학생들은 회의실에 미리 모여 있었다. 나름대로 자주 모이며 친목을 다진 아이들은 이젠 꽤 친해진 듯 서로 농담을 건네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요. 공주님?”

“…힘들어요. 무르엘라 영애.”

공주 카밀라는 요즘 죽을 맛이었다. 검술 학부에 입학 신청을 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품위나 이미지 같은 걸 챙길 여유가 없을 정도로 그녀에겐 버거운 과정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광장 주변을 달리고, 근육을 늘리기 위해 특수 제작된 쇳덩어리 같은 것으로 몸을 단련하는 와중에서 공주다운 모습은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오늘 아침의 체력 단련에서도 그랬다. 이미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는 1학년생과 달리 그녀는 기초가 없었기에,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무리를 해야만 했다.

‘팔이 안 움직여….’

훈련복을 교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힘들어 루아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그녀는 진심으로 학부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수업을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카밀라.”

필립이 조용히 나타나며 카밀라를 응원했다.

“…정말요?”

“이미 몇 달 동안 단련된 아이들에게 맞춰진 과정이다. 네가 어떻게든 쫓아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아마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여유로워질 거다.”

필립이 부실에 나타나자 아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필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음 여행지를 공지하기 위해 너희를 불렀다.”

지난번 신기루 숲에 다녀온 이후 방학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기대 어린 눈으로 필립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여행지는……하르딘 온천이다.”

하르딘 온천은 설정상 유명한 관광지였다. 그곳에서 솟는 온천수에는 특별한 효능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신체에 적용되고 있는 부정적인 효과들을 제거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필립이 저주 같은 것에 걸린 건 아니었다. 저런 효능이 아니라 단순히 피로 회복과 힐링을 목적으로 한 여행지였다.

겸사겸사 언젠가 짓게 될 대형 목욕탕을 위한 벤치마킹도 겸할 생각이었다.

‘호수 요정을 어떻게든 써먹어야지.’

“온천이 뭐예요?”

온천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루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쟈니스가 친절히 설명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인데, 다른 평범한 물이랑은 좀 달라. 그곳에 몸을 담그면 살갗에서 반질반질 빛이 나거든? 너도 마음에 들어할 거야.”

“그러고 보니 몇 년 동안 가보질 못했네요. 정말 좋은 곳이었는데.”

카밀라 또한 말을 보탰다. 온천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셰릴은 기대로 눈을 반짝였다. 평민인 그녀는 한평생 그런 관광지와는 인연이 없었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남학생 둘, 헤일리 바로운과 스테판 브레이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겠군.’

‘검술에 도움이 될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지만, 여기서 반대 의견을 냈다간 무사하지 못하겠지.’

둘은 눈치가 제법 빨랐기에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을 택했다.

“따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나, 꼭 구경하고 싶은 장소가 있는 사람은 없니?”

필립이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전 좋아요.”

“저도요.”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카밀라와 쟈니스, 그리고 셰릴은 찬성했고, 루아는 온천이라는 곳에 대해서 감을 잡지 못했으나 일단 언니들이 간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음 여행지는 하르딘 온천으로 정해졌다. 마차로 한나절은 가야 하는 곳이라 전날 밤에 출발해야 할 것 같으니 미리 준비하면 좋겠구나.”

필립은 그렇게 말하곤 아이들이 마음껏 떠들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도 갈래. 온천.”

그리고 그는 펠리시아 오스왈드 교수와 마주쳤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필립을 빤히 쳐다보며 선언했다.

“응?”

“나도 온천에 데려가라고. 왜 너만 쉬려고 하는데. 나도 쉬고 싶단 말이야.”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떼를 쓰는 펠리시아를 향해 필립이 질문하자, 그녀는 세상 서럽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필립의 옷깃을 붙들었다.

“이번 주말에 다른 아카데미 교수진과 모임이 있거든? 우리 쪽에서도 학부마다 교수 두 명이 참석해야 하는데, 우리 존경하는 수석교수님께서 날 데려가려고 하거든?”

“가면 되지. 왜?”

“난 거기서 수석교수님 인형이나 다름없어. 온종일 실실 웃으면서 수석교수님이 ‘우리 아카데미에는 이렇게 어리고 예쁜 교수가 있어요~ 어찌나 착한지 제 말도 정말 잘 듣는답니다~’ 하고 자랑하는 장단에나 맞춰야 한다구!”

말만 들어도 끔찍한 일이었다.

“거기서 빼내 달라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

“처음으로 멀리 나가는 거니까 도와줄 교수가 한 명 필요하다고 하던지, 아니면 그냥 말없이 납치하던지 어쨌든, 응? 이번에 도와주면 네 부탁 하나 들어줄게.”

필립은 잠깐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싫어하는데 도와주지 않았다간 그 앙금이 꽤 오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일단 최대한 말은 해볼게. 통하지 않아도 날 원망하지 마.”

“…고마워, 내 동생.”

펠리시아는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대체 얼마나 싫으면 저러는 거지?’

그 부담스러운 반응에 필립은 어쩔 수 없이 곧바로 수석교수를 찾아가야 했다.

수석교수는 필립의 방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펠리시아가 필요하다고? 왜?”

“이번에 저희 여행부에서 하르딘 온천으로 여행지를 정했는데, 아무래도 여학생들을 인솔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디아나 프렌할이나 크리스틴… 아니, 오필리아 교관을 데려가면 될 일 아닌가?”

“프렌할 교관은 아무래도 아이들이 심하게 눈치를 볼 것 같고, 오필리아 교관을 데려갔다간 나중에 추문이 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가족인 오스왈드 교수와 함께 가는 게 여러모로 좋습니다.”

“안 돼. 그 애는 나와 함께 모임에 참석해야 하니까.”

수석교수의 칼 같은 거절에 필립은 어쩔 수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석교수를 불렀다.

“교수님. 이번에 양보하지 않으시면 적어도 한 달은 누나에게 말도 붙이시지 못할 겁니다. 지금 독이 아주 바짝 올랐거든요.”

그 말에는 수석교수 또한 흠칫했다.

“…정말인가?”

“예. 교육 과정이 바뀌면서 여유는 많아졌지만, 누나가 제대로 휴식다운 휴식 시간을 가진 적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한 번 양보하시면 두 달 동안은 더 빡세게 굴릴 수 있을 겁니다.”

천천히 손익을 따져보던 수석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고 고맙네. 조만간 술이나 하지.”

“아닙니다. 교수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