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 *
오만가지 생각이 차냐의 머릿속을 스쳤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다음 학기는 어떻게 해? 방학 동안에 용병 일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곧 필립과 오필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렇게 허탈한 표정이니.”
필립은 나라를 잃은 듯한 차냐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교관님. 저는 감점인가요?”
그제야 차냐가 무엇을 불안해하고 있는지 알게 된 필립이 피식 웃었다.
“네가 왜 감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교관님들께서 나서도록 행동했으니까요…?”
“너희 조는 할 몫을 끝냈고, 지금 일어난 일은 단지 사고에 불과해. 네가 지금 마주친 고블린 무리는 다른 조에서 미처 못 보고 놓친 놈들이거든. 그러니 딱히 감점할 만한 구석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필립의 말에 차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렇지도 않죠. 가장 먼저 동료들에게 미리 지원을 요청하도록 지시하지 않은 점. 그건 그냥 여기서 죽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만약 실제 상황이라면 말이에요.”
오필리아 교관이 필립의 말에 반박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실무에 배치되려면, 검증된 전문가들의 교육과 보통 평민이 평생을 벌어도 어림없는 수준의 금화가 필요해요. 학생들이 안전하게 교육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 안다면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살아서 본인이 받은 교육을 후대에 전해줘야죠.”
오필리아는 엄한 표정으로 차냐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기백 탓에 차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움츠러들었다.
“희생? 좋아. 희생.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니? 하지만 말이지. 처음부터 희생을 각오하면 남는 건 죽음뿐이야. 만약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서 널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거야?”
“…그건….”
“죽었겠지. 그렇지 않더라면 사로잡혀서 우리가 널 찾아낼 때까지 두려움에 떨며 온갖 고통을 당했을 거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홉고블린이 네 팔다리를 그냥 내버려 둘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 네가 그렇게 되면 남은 가족들은? 널 여기 두고 떠난 친구들은?”
뭔가 맺힌 것이 있는 듯한 그녀의 말에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립은 과거에 그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하마터면 마족들에게 사로잡힐 뻔했다고 했던가.’
캐릭터 설정 중의 하나였기에 필립은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 단지 굉장히 힘든 경험을 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쯤이면 차냐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교관님.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죠.”
훈계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필립은 눈물을 글썽이는 차냐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돌아가서 쉬자꾸나.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실 거다.”
* * *
괴수 토벌 실습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필립은 마차에 올라 좌석에 몸을 묻었다. 돌아가는 길은 실습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분위기는 출발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보페스 자작가는 과연 명문이더군요. 고작 열여섯 먹은 후계자가 벌써 현역에서 십 년은 구른 기사처럼 노련하게 행동하더랍니다. 요즘 자작 가문에선 트롤을 쫓아내는 법도 가르친답니까?”
“저희 조에 피어스라는 평민 학생을 아십니까? 그 아이도 매우 놀랍더군요. 사냥꾼의 아들이었다가 영주의 눈에 띄어 지원을 받은 아이인데, 본능적인 움직임이 그야말로 놀라울 뿐입니다.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더라면 학년 수석을 노려도 될 것 같았습니다.”
교관들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학생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토벌 실습에 나갔던 교관들은 하루의 휴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페렉 교관을 향해 물었다.
“교관님. 쟈니스 무르엘라는 어떻습니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치는 가문 아닙니까. 평범한 활약을 펼쳤을 리는 없을 텐데요.”
페렉 교관은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대답했다.
“…무르엘라 양은 저보다 마법을 잘합니다. 소환 마법을 제외한다면요. 저는 평가할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쟈니스는 이번 실습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학점이 아쉽지도 않았고, 뭔가를 보여주거나 증명해야 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단지 셰릴, 그리고 스테판과 함께 추억을 쌓고 싶다는 생각으로 신청한 실습이었다.
모든 기회를 같은 조원들에게 양보하고, 한 거라곤 보조 마법이나 초급 마법들로 전투를 보조하는 것뿐.
그러나 페렉 교관이 보기에는 그 수준이 말도 되지 않았다.
“동의합니다. 마법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센스가 이미 현역 수준이더군요. 만약 이곳이 아카데미가 아닌 마탑이었더라면 그녀는 제 학생이 아니라 한 기수 높은 선배였을 겁니다. 저런 인재를 마탑에서 내버려 둘 리가 없거든요. 가문이 가진 지식과 보물만으로도 마탑과 맞먹는다는 무르엘라 가문 출신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마법 학부의 스피로 교관 또한 동의했다.
“…….”
사실 검술 학부 학생 중에도 그런 학생이 있기는 했다. 1학년 중에서는 헤일리 바로운이 천재라 불렸고, 고학년 학생 중에는 왕실 기사단장의 손녀인 에일렌 덴브러가 그랬다.
하지만 헤일리는 아직 어렸고, 교관 중 누구와도 실제로 붙은 적이 없는 데다 에일렌 덴브러는 4학년이 된 이후 아카데미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기사단인 오럼 나이트에서 실습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관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핏줄과 환경이 만들어 낸 격차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빼어난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이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쟈니스 무르엘라, 헤일리 바로운, 그리고 에일렌 덴브러는 별일이 없는 한 교관인 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영광과 명예의 주인공이 되어 역사의 한켠에 이름을 남기게 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오스왈드 교관님께선 쟈니스 무르엘라와 꽤 친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같은 중앙 귀족 출신이니까요. 교관님께서는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반쯤 눈을 감고 있던 필립은 어느 교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아, 무르엘라 양 말입니까? 음, 간식을 좀 줄였으면 좋겠군요.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과자를 얼마나 먹는지 살이 안 찌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푸흡.”
오필리아 교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직 어린 소녀를 부러워하는 교관들에게 일침을 놓은 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교관들은 아니꼽다는 듯 필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정체를 모르는 오필리아를 제외하고 필립의 배경이 가장 좋았다.
무르엘라 가문과도 친분이 있었고, 최근에는 왕가와의 친분 또한 밝혀졌으며 그보다도 수도의 가문 중에서도 명망 높고 유서가 깊기로 유명한 오스왈드 가문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바로 집에 가겠지.’
필립은 쟈니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귀환하기 전 집합할 때 셰릴과 쟈니스가 작당모의를 하는 모습을 본 필립은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좌석에 몸을 기대다가,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방금 저 상자가 꿈틀거린 것 같은데?”
테오도르 교관이 뒤에 실린 상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교관들이 상자에 관심을 가지자 필립이 움찔했다.
“분명히 덜컹거리는 게 멈춘 뒤에도 움직인 것 같습니다.”
필립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저 상자 혹시 어느 교관님 짐입니까?”
오필리아는 그 상자에 필립의 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필립이 곤란해 보이기에 먼저 나서 입을 열었다.
“그거 제 짐이에요. 교관님들. 죄송하지만 그냥 내버려 둬 주시겠어요? 안에 갈아입은 옷하고 속옷 같은 게 들어서….”
“크흠, 흠. 뭐 그렇다면….”
홍일점인 그녀의 말에 교관들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 평민 출신으로 알려진 그녀는 권세가 높지 않은 가문 출신의 교관들이나, 평민 출신 교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렇게 그냥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연출되려는 찰나 상자가 다시 한번 덜컹거렸다.
“…멍!…멍!”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개 짖는 소리까지 들렸다. 다시 모든 교관의 시선이 오필리아를 향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모른 척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
교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필립 쪽으로 당겨 앉자 필립이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오필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작게 대답했다.
“…고마우면 오늘 술이나 한잔해요.”
‘오늘은 쉬고 싶은데.’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날에는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야 해요. 그래야 잠도 잘 오고 아침에 더 개운하다고요.”
“술 좀 하십니까?”
필립이 묻자 오필리아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살면서 누구한테 져본 적은 없네요.”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걸로 말입니다.”
“좋죠. 자신 있으세요?”
교관들은 오필리아와 시시덕거리는 필립을 보며 질투심을 불태웠다.
‘이래서 얼굴 잘난 놈들하고는 상종을 말아야 해.’
‘…밤새 마시겠다고? 마신 다음에 뭘 할 생각인데?’
‘벌써 넘어갔다고? 제법 도도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잖아?’
‘제발 죽었으면, 아니, 죽지는 않더라도 무슨 병에라도 걸렸으면.’
‘…물건은 작겠지. 아니, 작아야지. 암.’
그들의 마음도 모른 채 마차는 하염없이 달렸고, 해가 슬슬 넘어갈 무렵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 * *
별장에 돌아온 필립은 말없이 옆을 돌아보았다.
“…여기가 너희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기로 오는 거니? 셰릴이야 그렇다고 쳐도, 쟈니스 너는?”
꾀죄죄한 몰골의 쟈니스와 셰릴이 배시시 웃으며 필립의 옆에 서 있었다. 거기에 평소에는 못 보던 여학생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차냐 우제추였다.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의기투합을 한 모양이었다.
여자애들끼리는 원래 빠르게 친해지는 법이었기에 필립은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이 아이들이 자기 기숙사나 저택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 불만일 뿐.
쟈니스는 그녀답지 않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여기 있어야 오라버니가 제 눈치를 안 볼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니?”
“조카가 생겼으면 좋겠다고요. 안 되나요?”
“안될 건 없는데….”
어차피 남는 게 방이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하니 딱히 거절할 생각이 들진 않았다.
“…저…저는….”
귀족의 집에 처음 와 본 차냐 우제추가 필립의 눈치를 보았다. 필립은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웃으며 그녀의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으니 편히 쉬다 가렴.”
어차피 여자뿐인 집구석이었다. 남자 식객이라도 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사춘기 여자애만 두 명인 집에 남자를 들이기도 좀 애매했다.
소녀들은 좋아하며 욕실을 점령하기 위해 올라갔고, 필립은 먼지로 가득한 몸을 이끌고 서재로 향했다.
저녁에는 약속대로 크리스틴 바로운의 방문이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가문의 기사 아저씨들이 그러던데, 여자한테 술로 지면 타격이 꽤 크대요. 대장님 중 한 분은 저한테 지고서 아예 술을 끊으셨던데.”
그리고 몇 시간 후.
“…죽겠군.”
그날 밤 필립은 와인 네 병과 위스키 세 병을 비웠다. 오필리아는 여자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술이 셌고, 필립은 하마터면 질 뻔했다.
‘중간에 고비가 세 번 정도 있었지.’
“우엑…으에에엑…….”
맞은편에는 테이블 위에 머리를 묻고 헛구역질을 하는 오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 또한 필립과 같은 양의 술을 마셨으나, 제정신을 유지하는 필립과 달리 거의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에으윽… 말도… 안…우에엑!”
“아니, 여기다 토하면 안 됩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필립은 급히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향했다.
“나…나 어지러워요…으엑….”
“아 좀!”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오필리아를 보며 필립은 그녀를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써먹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