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 *
은은한 달빛 속에서 필립은 눈을 떴다.
‘꿈이군.’
넓은 들판이 보였다.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마치 어린 소녀를 위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소.
흐드러지게 핀 달맞이꽃, 수줍게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그리고 작고 사랑스러운 요정들.
그 속에서 필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치 자각몽처럼, 본인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깨어나지 않는 꿈을.
필립은 발목에 스치는 풀의 감촉과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들판을 걸었다.
‘월광검을 계승할 때 봤던 바로 그 들판인데.’
그렇다면 저기 멀리 보이는 절벽 어딘가에 월광검의 창시자인 마스터 오템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 번 겪었던 일이었기에, 필립은 당황하지 않고 기억에 의지해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들판 끄트머리에 솟은 절벽을 올랐다.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절벽을 오르자, 좁은 분지에 이름 모를 꽃이 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곳에 하얀 머리의 노인이 기댄 채 필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필립이 그를 빤히 쳐다보자 노인은 피식 웃으며 필립에게 손짓했다.
“그래. 너로구나. 내 게으른 후계자가.”
별다를 것 없이 포근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장성한 아들딸의 부양을 받으며, 손주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거나 장난감을 만들어 줄 것만 같은, 시골 노인의 얼굴.
그러나 필립은 그에게서 비범한 뭔가를 엿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시선 그 자체였다.
단지 모르는 젊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눈동자 속에 깊은 관록이 느껴졌다.
“…당신은 마스터 오템이십니까?”
“그래. 내가 바로 네게 월광검을 넘긴 장본인이지.”
노인은 심유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필립을 쳐다보았다. 필립은 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를 왜 여기 부른 겁니까?”
압박을 이기지 못한 필립이 물었다. 그러자 노인, 마스터 오템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고작 묻고 싶은 게 그것이더냐? 네가 이어받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
“하나만 묻지. 너는 월광검을 이해할 수 있느냐?”
노인의 질문에 필립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있냐니…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다. 너는 어지간히 잘난 놈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광검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필립은 이제야 노인이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이해하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내용은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심상과 큰 의미 없는 암호로 가득하던데. 물론 덕분에 오러를 다루는 방법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만, 제겐 그저 방항성을 제시하는 이정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는 느낀 그대로를 노인에게 늘어놓았다.
노인은 필립의 말을 들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터무니없이 오만하군. 네까짓 게 감히 나의 월광검을 평가하느냐? 네 수준으로 본 것이 월광검의 전부인 줄 아는 모습이 우습구나.”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에도 필립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비전이랍시고 포장만 요란하지 내용물은 손톱만큼 든 걸 남기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아무리 파도 보석이 나오지 않는 광산에서 한없이 곡괭이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노인은 헛웃음을 뱉었다.
“…잘난 놈들은 이게 문제라는 말이지. 남들보다 조금 뛰어나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아. 이봐, 젊은 친구. 잠시 이걸 보도록.”
어느새 노인의 손에는 낡은 철검 한 자루가 생겨났다.
“보아라. 어린 천재여.”
노인이 검을 휘두르자, 한 줄기 창백한 빛이 허공에 번득였다.
달빛과도 같은 섬광이 잠깐 번득였을 뿐이지만, 필립은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단지 한 번의 가로 베기였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은.
그러나 필립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일격은 결코 피하지도, 막아내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그가 아는 강자 중 누구든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카데미의 수석 교수 에밀 파노이도, 알테어 칼라리아 교수도.
단지 짐작일 뿐이지만 드래곤인 프리비아 또한 용언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저 일격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노인은 필립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보았느냐?”
“…예.”
필립은 겨우 대답했다. 단지 한 수에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이었다. 자신을 마스터 오템이라 칭하는 저 노인은 필립이 지금까지 본, 아니, 앞으로 만날 그 누구보다도 강한 검사였다.
노인은 필립을 보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알 테지? 네가 아는 월광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건 또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본 게 맞는 것 같거든요.”
필립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현재 상황이 어딘지 좀 익숙했다.
‘다단계 사기꾼들이 피해자를 속이는 과정과 다를 게 없잖아.’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이곳이 꿈이 아니라 일종의 심상 공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월랑족과 마주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마치 미리 안배된 것처럼 일어난 일이라는 게 중요했다.
‘월광검은 속 빈 강정이야. 품고 있는 가능성만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건 분명하지만, 일부러 꼬아 놓은 걸 보면 의도가 분명해.’
애초에 완전히, 그리고 안전히 전승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식일 필요는 없었다.
‘배우는 사람이 일부러 감을 못 잡도록 빙빙 돌리는 거지.’
많은 학생을 가르쳐 본 필립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도를 가졌다면, 저 오템이라는 노인이 노리는 건 뻔했다.
‘날 이용해 뭔가를 하려는 건데. 그게 뭘까.’
월광검이라는 대단한 비전의 다음 단계를 미끼로 필립에게 뭔가를 요구하려는 것.
그냥 전수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밑밥을 깔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몰랐다.
필립은 원작을 알고 있다는 것.
세계관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무엇을 어떤 원리로 해낼 수 있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점 또한.
‘마스터 오템이 그렇게 잘났으면 천 년 전에 마족을 전부 죽였겠지. 하지만 멀쩡히 살아서 호시탐탐 대륙을 노리잖아.’
필립은 노인, 월광검의 창시자이자 한때 월랑족의 주인이었던 마스터 오템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 이렇게 대단한 걸 보여주셨으니, 후배 또한 작은 재롱으로 뭔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검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마스터 오템은 같잖다는, 그게 아니라면 같잖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필립에게 자신의 철검을 내밀었다.
필립은 그 반응에서 그가 그 누구와도 비견되지 않는 재능을 지녔었던 사람이라는 걸 확신했다. 살면서 열등감이라곤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사람이나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어디 두고 보자고.’
정신을 집중한 필립은 천천히 오러를 끌어 올렸다. 꽤 오랜 준비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만큼 성능은 확실한 기술을 선보일 생각이었다.
“방전 현상에 대해 아십니까?”
“…?”
“정전기의 전기적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전리작용을 말합니다. 뭐 전기가 없는 세상이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이 정전기라는 놈이 공기의 절연파괴 강도를 넘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마나는 형태가 없는 개념적인 에너지이기에, 잘만 다룰 줄 알면 이런 현상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죠.”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립이 든 철검에서 푸른 스파크가 일었다. 마스터 오템은 탁월한 직관으로 필립의 검에서 일어나는 것이 저 높은 하늘에서 치는 번개와 거의 같은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혹시 이거 하실 수 있습니까?”
필립의 질문에 마스터 오템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검도劍道라는 분야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 그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기술이었다.
“……전혀 모르겠군. 뭘 한 건가?”
그 반응에 필립은 단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시는 게 당연하니 너무 낙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허허.”
헛웃음을 뱉는 노인을 향해 필립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제 절 돌려보내 주시겠습니까?”
“빌어먹을. 적당히 잘난 놈이 월광검을 계승할 줄 알았더니 나보다 더한 놈이 걸려들었군. 자네 잘난 것 알겠으니 좆대로 하시게. 그리고 오해는 하지 말게. 난 정말로 월광검을 제대로 전수해 줄 생각이었어. 자네에겐 필요 없겠지만.”
노인은 그렇게만 말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필립은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고, 필립은 곧 묘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
방금 흘린 땀 냄새처럼,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으나 그리 좋다고도 할 수 없는 냄새였다.
필립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교관님?”
눈앞에 오필리아 교관이 있었다. 그리고 필립은 방금까지 자신이 머리를 대고 있던 곳이 그녀의 허벅지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제가 왜 교관님 무릎을 베고 잤습니까?”
필립의 질문에 오필리아 교관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간밤에 제 침낭에 들어오시더니, 제 온몸을 어루만지고….”
물론 필립은 그녀의 장난을 받아 주지 않았다.
“기억 안 나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 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시길래 장난 좀 쳐 봤어요. 제 무릎 어떠신가요? 편하던가요?”
“귀족 가문의 영애이자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로서 할 만한 장난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운 경.”
필립이 딱딱하게 말하자 오필리아 교관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 정색을 하고 그러세요? 그러면,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건 귀족이 할 만한 일이고요? 지금껏 제 정체를 알면서도 저를 가지고 놀았잖아요.”
“가지고 논 게 아니라 경을 배려한 겁니다.”
“알겠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앞으로는 저랑 친하게 지내요. 그러면 용서해 드릴게요.”
“…아, 예. 좋습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친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같은 고장에서 수십 년은 알고 지낸 그런 사이처럼 말입니다.”
필립이 억지로 웃으며 그렇게 묻자 오필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원하는 게 그런 거예요.”
‘웃기고 있네. 친해지기만 하면 넌 죽었다.’
그녀는 자신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할 줄 알았다. 필립은 저번에 꼬집혔던 어깨와 팔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선을 어느 정도 넘어도 될 만큼 친해지기만 하면 복수할 생각이었다.
* * *
“헉…허억….”
보리안 허비트는 놀 워리어의 시체에 걸터앉으며 거친 숨을 흘렸다.
괴수 토벌 실습의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전날 파악해 둔 괴수들의 위치와 기타 정보를 바탕으로 교관들과 교수들의 참관 아래 직접 괴수와 전투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었다.
“뭐야. 벌써 지쳤어?”
차냐 우제추가 그에게 다가오며 비웃었다. 화를 낼 기운도 없었던 보리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차냐는 땀을 좀 흘렸을 뿐 그리 지치지 않아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체력이지?’
보리안은 그녀가 자신보다 더 많은 괴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보리안보다 한 번에 많은, 그리고 더 강한 괴수를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검술로 대련한다면 보리안이 이기겠지만, 괴수 사냥이라는 분야에서 차냐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전문가였다.
“쳐들어온 괴수를 막아내는 거랑 직접 나가서 죽이는 거랑 같을 줄 알았어, 보리안? 그건 완전히 다른 일이야. 이제 알겠니?”
자존심이 매우 상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보리안은 이를 악물고 거친 숨을 코로 내뱉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셰릴이 로브 자락 아래로 땀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헥…헥…이제 이 구역은 정리가 끝난 거 맞지?”
그녀들과 보리안의 조는 평원 서쪽의 수색과 토벌을 담당했다. 해가 뜰 무렵 일어나 벌써 일곱 시간 정도 전투와 행군을 강행한 결과 아이들의 체력은 거의 바닥을 보였다.
물론 차냐를 제외하고.
“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차냐. 나 너무 힘들어….”
“응? 아…그래. 넌 정말 쉬어야겠다. 복귀할 체력은 회복해야지.”
이러다간 애 하나 잡겠다는 생각에 차냐 또한 앉을 자리를 찾아 셰릴의 옆에 주저앉았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모습에 보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보리안. 이제 알겠니?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 해. 같이 뭘 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나대면서 휘어잡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래. 알겠으니 제발 조용히 좀 해 주면 안 되나?”
함정에 빠졌을 때 도와준 사람이 차냐였기에 보리안은 차마 말싸움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백기를 들었고, 다른 두 명의 조원들은 차냐와 보리안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두 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데…어느 세월에 걷는담. 뭐, 그래도 다친 곳 없이 멀쩡히 복귀하는 게 다행이지. 다른 조 애들은 이곳저곳 많이 다쳤다던데.”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차냐는 입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사실 말할 기력이 남은 사람이 그녀뿐이었다. 셰릴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딱히 배려만이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톡톡 쏘는 듯한 말투와 생각보다 예쁜 목소리, 그리고 조금 특이한 말투는 셰릴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냥 말하는 걸 듣고만 있어도 지루하거나 질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로 차냐일 터였다.
“너는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야?”
“으음…쟈니스랑 같이 목욕할 거야. 아마 두 시간 정도? 그러고 나서는 편한 옷을 입고 푹 자고 싶어.”
“쟈니스, 그 애가 무르엘라 가문의 영애라고 했었나? 그 애는 고위 귀족이고 너는 평민인데 어떻게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어?”
문득 민감한 것을 물어오는 차냐의 질문에 셰릴은 힘없이 웃으며 대답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뭔가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파고들었다.
고블린의 독침이었다. 살갗에만 스쳐도 잠시 마비될 만큼 강한 신경독이었고, 그 독침은 셰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분명히 다 죽였잖아. 이 근처에 남았을 리가 없는데?”
차냐는 깜짝 놀라 자신의 창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곧 셰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그녀는 마비된 채로 몸을 덜덜 떨었다.
죽지는 않겠지만 이번 전투에서 마법을 쓸 수는 없을 터였다.
다행히 마법 학부 학생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라 생각하던 차냐의 눈에 수풀을 헤집고 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고블린들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여기 왜 홉고블린이?”
고블린 사이의 왕족이라 불리는 홉고블린이 고블린 여섯 마리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차냐가 아는 상식에선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누가 여기로 몰아온 게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홉고블린이 포함된 고블린 한 무리라면 현재 전력으로는 셰릴 없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고, 휴식을 시작하고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 몸이 다 식었기 때문이었다.
‘셰릴이 독침에 당해서 물러날 수도 없는데…….’
잠깐 고민하던 차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보리안을 불렀다.
“보리안. 셰릴을 데리고 다른 애들하고 같이 물러나. 내가 어떻게든 유인하다가 몸을 빼 볼게.”
“그런 게 되나…?”
“당연하지. 내가 너랑 같은 줄 알아?”
물론 될 리 없었다. 죽기 전에는 교관들이 살려줄 거라고 믿고 벌이는 일이었다. 독침에 찔리고, 돌팔매에 몇 번 얻어맞겠지만 아카데미에서 처음 사귄 친구가 험한 꼴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네 활약을 잊지 않겠다.”
보리안은 꽤 감탄한 듯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는 기회를 노려 바닥에 쓰러진 셰릴을 어떻게든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그 즉시 차냐가 홉고블린을 향해 창을 투척했다.
오러를 아직 다루지 못하는 그녀였으나, 투창 솜씨가 남달라서 그런지 제법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다른 고블린과 달리 황갈색의 피부를 지닌 홉고블린은 훈련받은 기사와도 비슷한 전투력을 지닌 개체였고, 의도가 뻔히 보이는 공격에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몸을 크게 숙여 투창을 피해낸 홉고블린이 녹슨 숏소드를 들었고, 차냐에게로 고블린들의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차냐는 보리안이 무사히 물러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살짝 돌렸다.
‘잘 도망쳤네. 으으, 좀 아프겠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공격 중 치명적인 것들, 이를테면 독침이나 급소로 향하는 돌팔매를 방어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응?”
그녀에게로 기세등등하게 달려들 것처럼 행동하던 홉고블린의 키가 머리 하나만큼 줄어든 것만 같았다.
‘아니…그게 아니라 그냥 머리가 없잖아?’
누가 있어 그 짧은 순간에 홉고블린의 머리통을 날린 것일까.
그게 가능한 실력을 지니려면 적어도 교관 수준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필립과 오필리아를 보며 이번 실습 점수를 대차게 말아먹었음을 직감했다.
‘차라리 다치는 게 나은데….’
그녀의 머릿속에 이번 학기의 장학금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